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74)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74화(74/184)
74화 휴가(3)
“선배님 늦었습니다.”
정태용은 김범근을 보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축구 대선배이기도 했고, 한국 축구 전설적 인물이기도 했으며, 여전히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 사재도 털어서 후원하는 인간적으로도 존경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게.”
김범근의 옆에 앉아 박정수도 얼른 일어나 정태용을 보고는 깍듯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그래. 오랜만이다. 정수야.”
박정수는 U-17 월드컵 우승을 이룬 뒤 바로 U-20을 맡아서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셋은 인사를 나누고는 가볍게 맥주 한 잔씩을 나누며 근황을 물었다.
“여기 오리고기가 맛이 참 괜찮아.”
“그렇습니까?”
“요새 아주 바쁘지?”
“뭐, 바쁜 척은 하는데 일이 잘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긴, 슈틸리케 경질 이후 갑자기 큰 직책을 맡았으니까.”
“하하하. 뭐 그렇죠.”
김범근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저를 내려놓고는 헛기침을 잠시 하였다.
사실 선수 선발이나 기용은 감독의 권한이었고,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월권행위이긴 했지만, 김범근은 그래도 한 번 더 정태용을 떠보고 싶었다.
“말씀 하십시오. 선배님.”
“그래. 자네 그거 알고 있나?”
정태용이 가만히 보자 김범근이 말을 이었다.
“K-리그에서 100골 이상 넣은 선수 중에서 유일하게 미드필더인 선수가 누군지?”
그 말에 정태용이 얼굴을 붉히면서 쑥스러워하였다.
“그걸 저라고 어떻게 말합니까?”
“그러면서 이야기하기는.”
“하하하.”
박정수가 김범근 옆에 앉아 있을 때부터 정태용은 김범근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이미 가늠을 하고 있었다.
일단 기량을 떠나서 최준호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어리다는 건 많은 경험을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의미였고, 단판 승부로 끝나는 월드컵에서는 전술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순간적인 기지가 중요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실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말이야. 오늘 그런 선수를 하나 발견한 거 같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녀석은 K-리그 아니라 좀 더 수준 높은 유럽 리그겠지만. 어제 그 녀석을 불러서 간단하게 테스트를 해봤어. 모든 면에서 공자철을 압도하더군.”
김범근은 헛소리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축구에 관해서는 냉철하고 때로는 냉혹한 면모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정태용은 <모든 면에서 압도>라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자철이를요?”
“그래. 둘을 싸움 붙여 봤거든.”
“……”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아네. 나 역시 감독을 해봤으니까. 하지만 그런 우려를 뛰어넘는 선수들이 한 세대에 한 명씩은 존재하는 법이야. 우리는 그들을 천재라고 부르곤 하지.”
옆에 있던 박정수가 입을 열었다.
“U-17 월드컵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준호 녀석 때문입니다. 그 녀석은 나이에 맞지 않은 노련한 부분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합류했지만, 한두 경기 뛰고서 바로 팀 전술에 완벽하게 녹아들을 정도로 축구 지능이 높은 녀석입니다. 대표팀에 들어가서도 금방 적응할 겁니다.”
정태용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고, 김범근은 고민에 찬 정태용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건 강요가 아니니까 고민하지 말게.”
그렇게 이야기한 김범근이 주머니에서 USB를 하나 꺼내었다.
“어제 경기 영상이야. 이걸 보면 내가 왜 부담스럽게 자네를 불러서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알게 될 거야.”
정태용은 김범근이 주는 USB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우리는 조력자지, 결정권은 여전히 자네에게 있지. 자, 이제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두고 우리 한 잔씩 더 할까?”
두어 시간 정도 식사를 하고서 음식점을 나선 정태용은 점퍼에 두 손을 넣고 묵묵히 걷다가, 휴대폰을 꺼내었다.
– 네, 감독님. 반갑습니다!
– 그래. 자철이. 잘 있었냐?
– 하하. 그럼요.
– …어제 최준호에게 발렸다며?
– 아니 발렸다니요! 그런 처참한… 뭐 사실이라 변명도 못 하겠네요.
흥분했다가 순순히 실토하는 게 공자철다웠다.
– 어떻더냐? 그 녀석?
– 하아. 좀 그렇습니다.
– 뭐가 그래?
– 녀석이 선수단에 합류하면 경쟁이 힘겨워질 거 같아서 싫기도 하고. 그런데 녀석이 합류하면 팀이 굉장히 강력해질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렇습니다.
–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 하아…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공자철은 얼마 후 입을 열었다.
– 뽑으세요. 그 녀석 진짜 최곱니다.
공자철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정태용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뽑고 안 뽑고는 내가 알아서 하는데, 왜 뽑으라는 거냐? 네가 감독이야?
농담 섞인 정태용의 말에 공자철이 투정을 부렸다.
–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 알았다. 조언 고맙다.
– 네 감독님.
정태용은 휴대폰을 끊고는 조금은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가운 겨울밤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
“드디어!”
양창명은 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숨을 훅 들이마시고는 내뱉었다.
“그분을 초대했습니다!”
양창명의 한마디에 <새벽의축구도사> 채널 채팅창이 터져나가듯이 댓글이 올라왔다.
800명대를 왔다 갔다 하던 접속자 수는 순간적으로 2,500명까지 튀어 올라갔고, 계속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 진짜 최준호 선수 출연하나요?
– 와! 대박!
– 미쳤다!
– 누나가 사랑해! 준호야!
– 너그동생 꺼져!
– 아아아아아아아! 너무 좋아!!!!
– 사실이야?
모종의 사건을 돕는 조건으로(?) 양창명이 운영하는 채널에 출연하기로 한 최준호는 정말 그 약속을 지켰다.
거멓게 탄 얼굴이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귀공자의 얼굴.
작은 머리에 멋진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딱 달라붙은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최준호가 화면에 등장하자 채팅창은 더 빠른 속도로 글들이 올라왔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에서 뛰는 선수 중에서 유튜버 개인 채널에 나온 선수는 최준호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잘 짜인 프레임과 온갖 편집으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라 날 것의 생생함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
“안녕하세요.”
최준호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 뭐야? 축구 선수 맞아? 왜 이렇게 잘 생겼어?
– 아, 진짜 장난 아님.
– 경기에서 땀에 젖고, 흙 잔뜩 묻은 모습만 보다가 저렇게 말끔한 모습을 보니 완전 다른데?
외모에 대한 품평이 댓글로 주르륵 흘렀고, 최준호는 읽지도 못할 것 같은 댓글 공세에 눈을 화면으로 돌렸다.
“자, 자기소개 좀 해주시죠.”
“현재 잘츠부르크에서 희찬이 형과 함께 뛰고 있는 최준홉니다. 반가워요.”
간단한 자기소개 후에 양창명은 평소 구독자들이 궁금해하는 질문들을 하나씩 던졌다.
“…음, 갑자기 독일로 왜 넘어갔냐고요? 음. 제가 중학교 때부터 축구팀에 들었는데 한 경기도 뛰지를 못했거든요. 한국에 있으면 축구를 못 할 거 같아서 자퇴하고 독일로 갔어요.”
– 아, 진짜였어?
– 맞아. 프로 데뷔 전에 한국에서 뛴 기록 자체가 없어.
– 아니, 어떻게 저렇게 잘하는 선수가 한 경기도 못 뛸 수가 있지? 도대체 감독 이름이 뭐야?
– 한국이 문제라니까.
– 아인슈타인이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중국집 짜장 배달을 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잖아.
– ……
– 어떤 인간인지 찾아봐야겠다.
양창명은 순식간에 한 명을 마녀사냥 하는 구독자들을 보며, 다급하게 말렸다.
“자자, 여러분 진정하시고요….”
본의 아니게 한 명이 매장당하게 생겼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20여 분 정도 양창명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운동하는 선수들이 다 그러진 않지만, 많은 이들이 무뚝뚝하고, 예능감도 없고, 질문에 짧게 대답하는 편인데, 최준호는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조리 있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구독자의 반응이 폭발적인 것은 당연하였고.
벌써 생방송 시청자가 6,000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축구 온라인이라는 게임을 아세요?”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게임이 있다는 것 정도는 최준호도 알고 있었다.
“들어는 봤어요.”
“구독자의 제보에 의하면 얼마 전 최준호 선수 카드가 나왔다고 하던데 몇 점인지 아세요?”
“아니요.”
양창명이 캡처해 온 사진을 띄었다.
최준호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는 카드 오른쪽 위 끝에 62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100점 만점에 62점인 건가요?”
“그렇다고 하네요.”
“흠… 다른 선수 점수는요?”
“한국 선수 위주로 이야기하면 박홍민 선수는 88점, 양희찬 선수는 81점, 공자철 선수는 80점, 윤강인 선수도 80점이네요.”
최준호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화면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음, …어, 이…이거 아직 업데이트되지 않은 거죠?”
웃자고 한 이야기에 최준호가 말까지 더듬으며 워낙 진지하게 대응하자 양창명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고, 그 반응은 채팅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아. 저 표정! 귀여워.
– 개발자가 축알못이네.
최준호는 얼마 후 정말 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앞으로 카드 점수 올리기 위해서 더 열심히 뛰어야겠네요.”
– 표정 봐라 진심으로 실망한 거 같아. ㅋㅋㅋ
– 웃으면 안 되는 상황 같은데, 아니 왜 이렇게 웃기냐.
– 와 빵 터졌다.
– ㅋㅋㅋ 미쳤다.
– 아, 재밌어 ㅋㅋㅋ
– 이 맛에 실시간 라이브 보지!
– 쟤 이 악문 거 같은데? ㅋㅋㅋ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약속했던 30분의 출연 시간을 거의 꽉 채웠다.
“자,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이걸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더라고요.”
“어떤 질문인지 엄청 궁금하네요.”
“혹시 여자 친구 있으세요?”
– 와우 세다!
– 누구냐 저런 질문 던진 놈.
– 년이겠지.
– 과연 있을까?
– 남미 애들은 10대 때도 결혼한다던데.
최준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는 제법 생각을 해서 답변을 했는데, 이 질문은 외통수였다.
있다고 해도 문제, 없다고 해도 문제, 답변을 피하겠다고 하면 있다고 분명 있다고 오해.
없다고 하면 귀찮게 스토킹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답변을 피하면 기자들이 꼬일 거고.
얼마 후.
최준호는 입을 열었다.
“네. 있어요.”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이한 독일의 시골 도시 메펜.
모두가 잠이 든 심야에 고즈넉한 2층 주택.
– 으아아아!!! 이 나쁜 자식!!!
바우어 부부는 난동 소리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지?”
마테우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알아먹지 못 할 말로 2층에서 레아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글쎄. 요새 한국어 배운다고 밤늦게 공부하더니,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일단 가보자고.”
**
며칠 후.
최현식은 햇살에 눈이 부셔 몸을 일으켰다.
“…맙소사!”
분명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 놓았는데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고, 화들짝 놀란 최현식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방문을 열고 나가니 준호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잘 잤어?”
“야, 일찍 일어났으면 나 좀 깨워주지.”
“응. 오늘 하루는 아버지 전세 좀 내려고.”
“…어?”
“일부러 알람 다 꺼놨어. 몸은 좀 어때?”
오랜만에 넋을 잃고 푹 자서 그런지 몸이 아주 가벼운 느낌이었다.
최현식은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곧 준호가 한국을 떠날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볍네.”
“잘됐다. 오늘 점심 먹고 아버지 나랑 축구 하자.”
“어? 축구?”
“생각해보니까, 내가 아버지랑 마지막으로 축구 했을 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거 같거든.”
준호의 말에 최현식이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부턴가는 일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같이 축구를 한 적이 없긴 했었다.
“아버지랑 축구가 하고 싶었구나?”
“응. 생각해보니까, 아버지랑 축구했을 때는 졌던 기억밖에 없어서.”
“하긴.”
어렸을 때부터 승부욕이 아주 강한 준호였다.
매번 승부하자고 해서 지면 자지러지게 울었고.
한 번쯤 져줄 만도 하지만, 최현식 역시 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은 확실히 아버지를 이기고 가려고.”
준호의 말에 최현식은 짧게 웃음을 지었다.
축구를 그만둔 지 16년이 넘은 최현식이었고, 준호는 지금 별들의 전쟁이라는 챔피언스 무대에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였다.
상대도 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 아버지가 아들한테 질 것 같냐? 오늘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아.”
그 말에 최준호가 고개를 돌려 최현식을 보더니 씩 웃었다.
“흐흐. 절대로 안 봐줄 거야.”
그때였다.
식탁에 올려놓았던 최현식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홍기의 전화였다.
– 응. 홍기야.
– 현식아 티브이 틀어봐봐. 정태용 감독이 1월 터키 안탈리아에서 행해질 전지훈련 선수 명단을 발표하고 있어.
– 그래?
– 준호도 포함이 된 것 같아.
– 뭐?
최현식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 뭐긴 뭐야. 준호가 국가대표 1군에 포함되었다는 뜻이지! 어서!
최현식은 그 말에 얼른 TV를 틀어 채널을 돌렸다.
– 2018월 러시아 월드컵을 대비하여 1월 22일부터 2월 4일까지 터키 안탈리아에서 1군 전지훈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 전지훈련 기간에 우리는 몰도바, 자메이카, 라트비아와 평가전을 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지훈련에 참여할 선수단 명단을 발표하겠습니다…비셀 고베의 고승규 선수…전북 현재 모터스 강민재 선수, 광저우의 박정권 선수…전북 현대 모터스의 최재성 선수…잘츠부르크의 최준호 선수… 이상의 선수들이며, 박홍민 선수, 양희찬 선수, 공자철 선수, 고성용 선수는 구단과 협의가 되지 않아 보류되었습니다.
최준호는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최현식 옆에서 TV를 보다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진짜 뽑힌 거야? 1군에?’
– 하지만 아시다시피 최종 명단은 아닙니다. 전지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과 해외파 선수들을 종합하여 3월에는 최종 월드컵 출전 엔트리를 발표하겠습니다.
16세 172일.
최준호의 나이.
2018년 6월 14일에 러시아 월드컵 개막이었고, 만약 최준호가 무난하게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한다면 그는 16세의 나이로 월드컵에 데뷔.
어쩌면 1958년 펠레가 기록한 17세 최연소 골, 17세 최연소 해트트릭을 모조리 갈아치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축하한다! 아들! 정말 축하한다!!!”
최준호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최현식의 품에 안겨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고마워요.”
**
최준호는 이후 오스트리아가 아닌 대표팀 전지훈련을 위해서 터키의 안탈리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