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76)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76화(76/184)
76화 A 매치(2)
비시즌 기간이라 푹 쉬다가 대표팀 합류했기에 몸도 무거웠지만, 피지컬이 좋은 몰도바 선수들의 강한 압박에 한국 선수들은 애를 먹었다.
K-리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압박들.
역습을 전개하는 공격수 한 명을 빼고는 10명이 모두 수비하는 우주방어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몰도바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에서 일본만큼 잘하는 팀이라고 긴장하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할 만했다.
조직력과 스피드가 좋다고 알고 나왔는데, 웬걸?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손발은 맞지 않았고, 공을 배급해야 하는 미드필더 선수들은 실수를 연발하였다.
몰도바 선수들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정태용 감독은 이번 전지훈련에서 최준호의 수비력과 탈압박 능력을 눈여겨보았다.
키 181cm, 몸무게 71kg으로 주변의 소문과는 다르게 피지컬도 아주 준수했다.
예측력과 위치 선정 능력이 모두 좋았고, 판단력도 굉장히 빨랐다.
킥력도 굉장했고, 어떻게 차도 공이 공중으로 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몸의 발란스와 민첩성, 유연성이 출중했다.
월드컵에서 한국은 최약팀이었다.
상대는 전방에서 강한 압박을 할 것이고, 그 압박을 풀고 나가서 공격수에게 패스해줄 선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정태용은 단번에 최준호가 그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준호는 신욱이랑 최전방 공격수로 뛴다.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신욱이에게 공을 전달하거나, 신욱이가 떨군 공을 처리하는 쪽으로 가자.
라인을 완전히 내린 몰도바를 상대로 최준호의 탈압박 능력을 보려면 전방에 배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스태프들이 미드필더로서 뛰던 최준호가 공격수 역할을 할 수 있겠냐는 의문을 제시했지만, 정태용은 확신이 있었다.
– 삑!
경기 시작 후.
몰도바는 전반전 전술 그대로 10명이 모두 수비 진영을 꾸렸다.
5-4-1의 형태.
새로 투입된 최재성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패스 미스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10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진신욱과 최준호에게 공을 주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공이 수비수들 사이에서 겉돌기 시작한 후반 10분경 무렵.
전방에 있던 최준호가 슬그머니 밑으로 내려왔다.
‘이런 팀이랑 싸울 때가 재미가 없긴 해.’
공간도 없고, 공을 받기도 힘들고.
뒤에서 제대로 된 지원이 없으면 전방에서 외롭게 싸돌아다니다가, 경기 끝나고 욕만 잔뜩 처먹는 공격수라는 포지션.
최준호가 내려와서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패스를 주고받자, 미드필더인 최재성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공을 받으면 항상 수적으로 불리해서 백패스를 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최준호가 자신의 주변에서 서성거리자, 수비수가 분산되었고 공간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축구 좀 할 줄 아네?’
단순하게 기술이랑 킥력만 좋은 게 아니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경기 전체를 읽는 눈이 있었다.
최재성은 자신에게 생긴 공간을 활용하여 압박하는 수비수 하나를 벗겨 낸 후, 최준호에게 패스하면서 스피드를 올렸다.
이렇게 밀집된 수비를 풀어내려면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빠른 타이밍의 패스나 원터치 패스를 해야 했고, 최재성은 침투하는 자신에게 공이 전달되기를 원했다.
몰도바 선수들은 최준호에게 공이 가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세 명의 선수가 그를 압박하기 위해 움직였다.
어떻게 봐도 패스를 해줄 만한 공간을 다 차단한 거 같은데, 최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놀려 공을 원터치로 툭 올려주었다.
이제는 최준호의 전매특허가 된 트리 벨라.
루카 모드리치만큼이나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점프를 뛴 수비수를 살짝 넘기는 로밍 패스는 침투하는 최재성에게 바로 연결이 되었다.
‘아…!’
최재성은 속으로 감탄을 터트리며 터치하기 좋게 떨어진 공을 툭 차며 달려 나갔다.
최준호를 압박하기 위해서 세 명의 선수가 달려들었기 때문에, 적진에서 한국은 순간적으로 수적 우위를 가져갔고, 최재성의 패스는 덩치 큰 센터백을 달고 달리는 진신욱에게 연결이 되었다.
– 뻥!
하지만 그의 슈팅은 저 머나먼 달나라를 동경하듯 로켓이 되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말았다.
진신욱이 최재성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최재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이런 기회가 얼마나 더 올지?
최준호도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욱이 형은 머리를 쓰게 해야지, 발밑은 힘들어.’
**
한 편,
정태용은 처음에 최준호가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불쾌했다.
하지만 최준호가 살짝 밑으로 내려가자 다른 선수들 운신의 폭이 넓어졌음을 깨닫고는 찡그린 인상을 다시 폈다.
4-4-2 포메이션이 아니라 4-4-1-1 같은 형태를 취하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움직임에 부자연스러움이 전혀 없었다.
‘저 녀석 지금 자신이 뭘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건가?’
대부분의 선수는 감독이 요구하는 움직임만 가져갔다.
경기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정태용 감독과 함께 대표팀을 꾸려가는 고남일 코치가 다가왔다.
“괜찮겠습니까? 준호 저 녀석 전술대로 움직이지 않는데요?”
“그렇긴 한데, 지금이 아까보다 훨씬 괜찮지?”
정태용은 나름의 똥고집이 있는 감독이지만, 가끔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용인하기도 했다.
“네. 확실히 다른 선수들이 플레이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습니다.”
“그럼, 그냥 둬 보자고.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최준호는 경기하면서 힐끔힐끔 계속 벤치 쪽을 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자리를 지키라거나, 약속된 전술을 수행하라는 지시라도 나올 텐데,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정태용을 보고는 씩 웃었다.
‘소문처럼 완전 고집불통 감독은 아니네?’
최준호는 정태용 감독 밑에서 뛴 적은 없었다.
다만 이런저런 이야기만 들었을 뿐.
감독이 이런 움직임을 허락했다면, 이제는 자신 있게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후반 20분이 지날 무렵.
전반전과는 다르게 단 한 번의 역습도 수행하지 못한 미드필더 바딤은 살짝 짜증이 일어났다.
실력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역시 승부욕이 강한 몰도바 국가대표 선수였다.
90분 내내 이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경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 21번을 단 선수는 특별하게 조심해야 한다. 절대로 공간을 내주지 말고 1:1로 상대하지 마.
감독의 지시 때문에 최준호가 공을 잡으면 동시에 주변에서 세 명이 덮치는 수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공을 뺏어도 역습을 나갈 만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더 짜증 나는 건 21번은 절대로 공을 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비수들이 달라붙기도 전에 공을 패스하기 때문에 달려들다가도 다시 수비하러 돌아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번에도 최준호에게 공이 갔고, 바딤은 그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패스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난 역습 준비를!’
최준호가 공을 잡기만 하면 달라붙는 상대편 선수들,
그들이 전방으로 향하는 패스 길을 노련하게 막았고, 공을 가지고 개인기를 부릴 공간마저 없애 버렸기 때문에 빠르게 공을 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이번에는 한 명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전방으로 뛰어가는 다른 선수에게 패스하는 척 발을 휘두른 최준호.
달려들던 선수들도 조건반사적으로 자신이 맡을 선수를 찾아가려고 스피드를 줄이는 사이, 최준호는 패스가 아니라 공간으로 공을 툭 치고 순간적으로 가속하였다.
“아앗!”
놀란 바딤이 신속하게 달려들어 다리를 집어넣었지만, 속도가 붙은 최준호는 가볍게 점프하며 태클을 피해내었다.
순식간에 세 명을 제치고 달려 나가기 시작하는 최준호.
“중거리 슈팅 주지 마!”
깜짝 놀란 골키퍼가 소리를 지르자, 진신욱을 마크하던 두 명의 수비수 중 하나가 최준호에게 달려들었고, 최준호는 진신욱이 몸을 돌리는 것을 포착하고는 그대로 공의 밑동을 툭 차서 올렸다.
공은 골키퍼와 진신욱 사잇공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한 박자 빠른 크로스에 타이밍을 놓친 골키퍼는 나오질 못했고, 엄청난 피지컬을 가진 진신욱은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한 명의 수비수와 몸싸움을 벌이며 공을 향해 뛰었다.
공의 궤적으로 봤을 때는 발이 아니라 머리를 써야 했다.
머리로 하는 플레이에 자신이 있는 진신욱은 이번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되뇌면서 이를 악물었다.
펄쩍!
몰도바의 센터백도 피지컬이 훌륭하지만, 같이 점프를 뛴 진신욱의 타점은 머리 하나가 더 높았다.
– 턱!
진신욱은 공이 이마에 닿는 순간 고개를 가볍게 돌렸다.
골키퍼는 바로 앞에서 터진 헤더 골에 속수무책이었고 공은 어느새 그물을 출렁거리고 있었다.
A매치 38경기에 출장.
지금까지 2골이 전부인 진신욱은 한 번 더 고개를 돌려서 골대 안에 공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거의 울먹거렸다.
그의 별명은 <하얀 수건>이었다.
상대에게 항복을 할 때 쓰는 백기에서 따온 표현인데, 항상 지는 경기에 교체되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2m에 가까운 피지컬을 가지고도 그동안 2골밖에 못 넣은 진신욱을 비아냥거리는 별명이기도 했고.
내내 마음고생을 해왔기 때문에 갑자기 터진 골에 진신욱은 세레머니도 제대로 못 하고 내내 소매로 얼굴만 훔쳤다.
“축하한다!”
“이야! 드디어 골 넣었다!”
주변 선수들이 달려들어 그를 축하해주었고, 진신욱은 붉어진 눈동자로 축하해주는 최준호를 보고는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고맙다!”
**
“이야…!”
민선아는 감탄을 짧게 터트렸다.
전반전 내내 답답한 경기였다.
하지만 후반전에 교체되어 들어간 선수들이 경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고,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선제골을 터트렸다.
“단 한 번 놓쳤을 뿐인데, 바로 골로 연결되네요.”
정말 우주방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몰도바는 한국의 공격을 꽁꽁 묶어두었다.
심지어 최준호마저 묶인 상황이었는데, 단 한 번 생긴 공간을 파고들어 어시스트를 해버렸다.
양창명은 안도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게 최준호야. 단 한 번의 치명적인 기회를 위해서 똑같은 플레이를 반복하거든. 상대가 방심하는 순간 100% 확률로 치명상을 주지. 상대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나왔겠지만, 반복되는 상황에 집중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지.”
“단 두 선수가 바뀌었을 뿐인데, 패스 성공률이 엄청나게 높아졌어요.”
“한국 대표팀도 이제 세대교체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야.”
“남은 두 경기에서 최준호 선수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면, 국가대표 선발 명단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가능성이 충분하지.”
“몰도바가 공격할까요?”
“아직은.”
양창명의 이야기처럼, 몰도바는 여전히 수비 전술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첫 골이 터지자 3분 만에 어수선해진 몰도바 수비진은 좋은 위치에서 한국에게 프리킥 기회를 주고 말았다.
“재성이에게 이야기해서 준호 보고 차라고 해.”
최재성이 4번의 프리킥을 찼지만 모두 실패한 상황이었다.
정태용 감독의 지시에 따라 최재성은 공을 최준호에게 건네주었다.
“형 실망시키면 혼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재성도 최준호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다.
유럽 리그에서 프리킥 성공률 25%면 정말 엄청난 숫자였으니까.
“그럼, 골로 연결하면 오늘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예요?”
대한 그룹의 후원으로 원정 훈련에서도 최고급 뷔페를 먹는 국가대표팀이었다.
최재성은 최준호의 농담에 킥킥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갔다.
최준호는 공을 위치에 놓고 골대를 가만히 보면서 생각했다.
‘직접 슛? 아니면 크로스?’
최준호의 기록을 보면 누군가의 머리에 맞추는 것보다는 직접 슈팅 시 성공률이 4배는 더 높았다.
아마 그래서 그런지 몰도바의 수비진은 극단적으로 직접 슈팅을 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꽤 많은 인원으로 벽을 세웠고, 밑에 눕기까지 했다.
양쪽 골대에는 한 명씩 달라붙어서 공을 걷어낼 준비가 되었다.
덕분에 프리가 된 한국 선수들이 많았다.
최준호의 눈은 잠시 상대 선수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강민재 선수에게 향했다.
‘아직은 헤더 슛에 눈을 뜬 상태는 아닐 거고.’
그의 눈은 진신욱에게 향했다.
‘공격수에게 자신감만큼 중요한 게 더 있을까?’
축구팀은 한 명이 잘해서는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었다.
구성원 전체가 목표에 대해 갈망하고, 끊임없이 발전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유일의 타켓형 스트라이커인 진신욱의 포텐이 터져야만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었다.
최준호는 손을 가볍게 올렸다.
약속된 세트피스.
진신욱은 그 수신호를 보고는 가슴이 뛰었다.
‘직접 슈팅이 아니라 내 머리를 겨누겠다고?’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꽤 가까운 거리였다.
최준호의 슈팅 실력이면 충분히 골을 넣을 수 있는 거리였다.
‘…내 머리를 믿는다는 건가?’
몰도바는 직접 슈팅을 대비하느라 지역 방어를 선택하였는데, 진신욱은 왠지 최준호의 크로스라면 또 골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삑!
심판의 휘슬이 끝나고, 최준호는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가 가볍게 뛰었다.
– 뻥!
오른발 인사이드에 제대로 감긴 공.
벽을 형성한 채 이를 악물고 뛰는 몰도바의 선수들의 머리를 살짝 스치며 날아간 공은 골대에 다다르기도 전에 밑으로 뚝 떨어졌다.
공의 궤적을 읽은 골키퍼가 몸을 빠르게 움직였고.
골키퍼의 손안에 공이 들어가기 전.
공에 시선을 뺏긴 수비수가 진신욱의 움직임을 놓쳤다.
진신욱은 거의 다이빙을 하듯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고, 공은 진신욱의 이마에 맞고 한 번 땅에 튕긴 후 골대 상단 그물을 찢듯이 흩트려 놓았다.
진신욱의 두 번째 골!
몸을 벌떡 일으킨 진신욱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골키퍼를 보고는 벤치를 향해 달려가면서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그는 정태용 감독을 그대로 안아 들었고, 벤치의 선수들과 스태프들의 등짝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꽤 아팠지만, 너무 좋았다.
“이 새꺄! 잘했다.”
정태용도 아주 기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만 가자. 신욱아!’
“신욱이 형은 왜 골 도우미한테 안 가고, 벤치로 달려든 거야?”
최준호는 자신에게 온 최재성을 보고는 씩 웃었다.
“…지금 아니면 감독한테 언제 어필하겠어요?”
“하하하! 그런가?”
최재성도 밝게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프리킥은 네가 차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