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77)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77화(77/184)
77화 A 매치(3)
“몰도바가 이제 공격하네요. 친선 경기에서 저렇게 수비하는 팀들은 참 이해가 되질 않아요.”
“저 팀의 컬러야. 유럽에서는 워낙 약팀이라 전후반 내내 수비하면서 역습을 하고, 점수를 잃으면 그때 반격을 하거든. 물론 저렇게 되면 대량 실점을 하는 게 수순이지만.”
양창명의 이야기처럼 2골을 실점한 몰도바의 강력한 수비 빗장이 풀리긴 하였지만, 그들의 공격은 수비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공격이 활발하게 살아나고 말았다.
강민재는 공격수와의 몸싸움에서 가볍게 승리해서 공을 따낸 다음, 볼을 돌리지 않고 공을 달고 그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센터백 포지션이긴 하지만, 강민재는 굉장히 공격적인 선수였으며 발기술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190cm에 달하는 거구가 엄청난 스피드로 공을 달고 역습을 시도하자 몰도바 선수들은 당황한 듯 수비를 위해 본진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흐트러진 몰도바의 수비진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가장 치명적인 선수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강민재는 최준호가 완전히 프리가 된 것을 보고는 주저함이 없이 패스를 넣었고, 최준호는 성난 듯 빠르게 굴러온 공을 발바닥으로 가볍게 터치해 순한 양처럼 만들었다.
그리고는 무서운 눈매로 골대를 보았다.
골대 상황, 골키퍼 위치, 모든 것을 한 번에 쓱 훑었다.
골대와의 거리는 27m 정도 되었지만, 앞쪽 공간이 완전히 열린 상황.
최준호는 달려드는 수비수가 방어할 틈도 주지 않고, 한 박자 빠르게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때렸다.
– 뻥!
엄청난 속도로 쭉 뻗어나가는 공.
‘맙소사!’
골키퍼가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지만, 쫓아갈 수 없었다.
골키퍼 위치의 반대편 골대의 구석이었기 때문이다.
– 철렁!
골대 그물이 크게 웨이브를 그리며 흔들렸다.
“이얍!”
A 매치 첫 데뷔 무대에서 골을 넣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최준호는 가볍게 두 손을 꾹 움켜쥐며 가볍게 환호의 목소리를 내질렀다.
이번 경기 최준호의 첫 슈팅이자, 첫 골.
“저 문디! 뭐고!”
어시스트를 준 강민재가 커다랗게 소리치며 달려들었고, 다른 선수들 역시 환한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막내 녀석이 오늘 미쳤네.”
“와 시원하다!”
“잘했다. 잘했어!”
정태용은 순식간에 터진 추가 골에 함께 하는 코치진들과 얼싸안았다.
갑작스럽게 맡은 임시 감독직에 첫 경기였다.
전반전과 같은 양상으로 경기가 계속 흘러갔으면 많은 말이 나왔을 것이다.
물만 먹어도 체할 만큼 답답했던 전반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다른 후반전이었다.
그 중심에 최준호가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잔뜩 모여 있는 기자들 역시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11년 가까이 축구를 보러 다녔던 민선아조차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강력한 중거리 슈팅이었다.
어떻게든 점수를 만회해 보려고 애를 쓰던 몰도바 선수들의 고개가 모두 축 처진 것을 본 민선아는 이번 경기가 이대로 끝날 거라는 예측을 하였다.
“영상으로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엄청나네요. 터치하고 바로 때려서 그런지 중거리 슈팅을 때린다는 예측을 하지도 못했어요.”
“계속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최준호 선수는 경기장에서 주저하는 법이 없어. 엄청나게 빠르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정말 놀라운 선수예요. 앞으로 엄청나게 유명해지겠죠?”
“그건 시간이 흘러봐야 알겠지만, 지금과 같은 폼과 생활 태도를 유지한다면 세계 축구 역사를 모두 다시 쓰게 될지도 몰라.”
이후 최준호의 중거리 포를 얻어맞은 몰도바는 다시 수비 중심의 축구로 돌아갔고, 경기는 그렇게 3-0으로 끝이 났다.
경기 MOM은 1골 2어시스트를 한 최준호가 받았고,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최근 활약에 비해 언론에 거의 노출이 되지 않은 선수다 보니 어떻게든 그를 붙잡으려는 기자들이 많았다.
– 기자들이랑 친해져라.
정태용 감독의 언질도 있었지만, 최준호는 이런 상황을 아주 즐길 줄 아는 선수였다.
다만 집까지 찾아오는 실례는 극도로 싫어하지만.
경기에 관련된 자질구레한 질문이 오가고, 인터뷰가 거의 끝날 무렵.
“네. 거기 기자님.”
“혹시 오늘 대한민국 최연소 데뷔 및 골 기록을 세운 것을 아시나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대표팀에 뽑히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발렌시아의 윤강인 선수도 있고 베로나의 박승우 선수도 있지 않습니까?”
가끔 이런 거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이 있긴 했다.
물론 제법 괜찮은 언론사 배지를 달 정도의 기자들이니 멍청하진 않을 거고, 그렇다고 욕을 처먹는 좋아하는 사디즘도 아닐 테고.
아마도 이런 질문을 던져서 나오는 대답을 두고 이슈를 만들려는 쓰레기일 가능성이 컸다.
“저 새끼 미친 거 아니야?”
민선아가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읊조렸다.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최준호는 올해 16살이었다.
저런 구질구질한 질문에 대답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을 못 할 만한 나이였다.
“가만 있어 봐.”
양창명은 일어나서 한마디 하려는 민선아를 잠시 말렸다.
그가 지켜본 최준호는 이런 얄팍한 짓에 넘어갈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기자들도 굉장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질문이라는 걸 인식했지만, 그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대박 기사를 쓸만한 소재만 나온다면 누가 어찌 되던 상관이 없었으니까.
최준호는 손을 들어서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매우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축구를 잘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국가 대표에 뽑힐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강인이 형도 승우 형도 실력이 되면 이제 뽑혀도 이상할 게 없지 않아요?”
우문현답이었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혹한 표정이었고, 양창명은 잡고 있던 민선아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마자 민선아가 벌떡 일어났다.
“야, 이 새끼야! 질문 같은 질문을 던져!”
“아니, 누가 품위도 모르고 사람한테 새끼라는 거야? 너 뭐야?”
최준호는 두 기자가 말싸움을 시작하자, 눈을 민선아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 있는 양창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양창명은 인제 그만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였고, 최준호는 미소를 짓고는 시끄러운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왔다.
**
한 편, 최준호가 전지훈련으로 터키에 가 있는 사이 잘츠부르크는 라피드 빈과 홈게임을 하였고, 2-2로 비기고 말았다.
최준호가 빠지자 공격의 창의성이 사라졌고, 엘링 홀란드의 득점력에 기대어야만 하는 수준의 경기가 나오고 말았다.
개막 경기에서 무력하게 패배한 라피드 빈이 그렇게 약한 팀이 아니라는 것도 증명이 되었고.
“…그 녀석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네.”
르네 마리치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중앙에서 든든하게 골을 소유하며 수비와 공격을 이어주는 가교 구실을 할 수 있는 최준호와 달리 오늘 그 역할을 맡은 크사보는 상당히 불안했다.
“이게 원래 잘츠부르크 팀이야. 그동안의 경기가 압도적이었던 것뿐이지.”
마르코 로제도 경기 결과를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도르트문트와의 1차전이지.”
겨울 이적 시장에 최준호가 도르트문트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예측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 도르트문트는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1군 대표팀으로 충분히 활약을 할 수 있도록 소집 명령에 응하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계약서상 그걸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한국의 전지훈련은 유럽 국가보다 1주 더 길었고, 덕분에 최준호 없이 도르트문트와 홈에서 1차전을 치러야만 했다.
“그쪽이 선수단과 감독간의 불화로 시끄럽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문이야. 몹시 어려운 게임이 되겠지.”
“비기면 잘하는 게임이겠지?”
“비겨도 문제야. 다음은 원정이라고.”
“결국 16강까지일까?”
둘은 말없이 잠시 침묵을 하였다.
“…자네 혹시 이길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도르트문트 프런트 쪽으로부터 인터뷰 제안을 받은 마르코 로제였고, 마르코는 이곳에서 가장 친한 동료인 르네 마리치에게 털어놓았다.
르네 마리치는 더 좋은 구단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말했고, 마르코는 도르트문트의 구단주와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하고 왔다.
물론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르네의 질문에 마르코는 피식 웃었다.
“정말 날 그런 수준의 감독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르네 역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상사가 제정신인지 확인해 본 것뿐이야.”
“앞으로는 그런 질문은 삼가도록. 일단 도르트문트와의 홈 경기에서는 실점을 최소화하는 게 좋겠어. 초이 그 녀석이 돌아왔을 때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게 말이야.”
마르코의 대답에 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파리 생제르맹이 토마스 투헬 감독에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좀 들었는데 말야.”
“파리가?”
“구단 측과 사이가 좋지 않은 투헬이라면, 시즌 끝나고 그쪽으로 갈 수가 있어.”
르네의 물음에 마르코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도르트문트 이겨야겠네, 나 이런 감독이야라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야지.”
르네 역시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전술 구상을 좀 해보도록 하지.”
르네가 나가려고 하자, 마르코가 입을 열었다.
“르네.”
“응?”
“내가 혹시 독일로 간다면 따라올 텐가?”
르네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내 가치를 알아준 사람은 투헬과 자네뿐이야.”
르네가 나가자 마르코도 웃음을 지었다.
그 한마디로 충분히 원하는 대답을 얻었으니까.
**
– 최준호! 대표팀에 엄청난 창의력을 불어넣어!
– 최준호, 과연 정태용 호의 황태자가 될 것인가?
– 1골 2도움! 한국의 최연소 기록을 모두 경신한 최준호는 누구?
– 이것이 진짜 한국 축구다! 정태용 호는 2002년의 전설을 깰 것인가?
몰도바와의 경기가 끝나고서 한국 축구계는 최준호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 16세의 최준호가 이런 활약이라면, 윤강인 선수도 대표팀으로 불러야 한다!
– 베로나의 박승우 선수도 최준호만큼 할 수 있는 선수다!
몇몇 신문은 이런 기사를 내보냈고, 여러 커뮤니티는 <만약 윤강인이 대표팀에 들어간다면?, 만약 박승우가 대표팀에 들어간다면?> 이라는 화두에 매몰되었다.
그간 경험 많은 베테랑이 뛰어야 한다는 관습 아닌 관습이 깨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누구 잘한다, 누구 뽑아라, 얘 한 번 봐라… 라는 식의 메시지가 매일 같이 100통 넘게 오자 정태용은 결국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가 결국 최준호를 뽑은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성적 때문이었다.
‘알만한 인간들이…’
머리 아픈 일에서 잠시 벗어난 정태용은 눈을 돌려 세트피스 상황을 훈련하고 있는 진신욱과 최준호를 보았다.
월드컵에서 최약체 중 하나인 한국이 점수를 뽑기 위해서는 세트피스 상황을 무조건 활용해야만 했다.
진신욱이 피지컬도 좋고, 헤더도 잘하며 몸싸움에도 능하지만, 끊임없이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 오프 볼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그 좋은 피지컬로 상대 수비수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공의 낙하지점을 포착해서 자리를 잡은 후 헤더를 하는데 특화된 선수기 때문에 아주 정교한 크로스를 올려줄 선수가 필요했고, 최준호가 적격이었다.
진신욱이 오프 볼 움직임을 좀 만 더 가져가고, 수비수와 몸싸움을 즐기며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한다면 정말 소원이 없겠지만, 몇 주짜리 훈련으로 바뀌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조직적인 움직임을 가질만한 훈련 시간 자체가 짧아서,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월드컵이니까.
그건 최준호도 진신욱과 함께 훈련하면서 느끼는 것들이었다.
‘이런 피지컬을 내가 가졌다면, EPL도 씹어먹었을 텐데!’
정말 타고난 몸을 가지고 왜 저렇게 밖에 쓸 수 없는지 너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진신욱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최준호의 크로스에 희희낙락하였다.
‘이런 수준의 크로스라면 내 머리가 충분히 파괴력을 발휘할지도!’
훈련이 끝난 뒤 선수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최준호는 정태용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저, 몸싸움 훈련이 좀 필요해서요.”
몰도바 선수들과 경합하는 장면을 보면서 몸싸움을 잘한다고 생각을 한 정태용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몸싸움?”
“네.”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국내에서만 뛰는 선수들은 보통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지, 이런 식으로 요구를 하지는 않으니까.
“신욱이 형이랑 파트너 맺어주세요. 30분 정도만요.”
하지만 진신욱이라는 말에 정태용은 가만히 최준호를 보았다.
최준호가 나이대에 비교하여 제법 단단한 몸을 가지고는 있다지만, 강민재보다 훨씬 더 좋은 피지컬을 가진 진신욱과 몸싸움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슨 꿍꿍이지?’
“신욱이 형 정도는 되어야, 월드컵 무대에서 피지컬 좋은 팀 선수들과 경합하죠.”
“…그런 거야?”
“네. 감독님.”
스스로 개인 훈련을 찾아서 한다니 대견하기도 하고, 뭔가 찜찜하기도 하고.
30분 정도의 시간 정도는 충분히 할애해줄 수 있었다.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