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78)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78화(78/184)
78화 A 매치(4)
– 형 나랑 내기할래요?
그러니까 그게 시작이었다.
진신욱은 자신보다 한참 작기도 하거니와 자신과 비교하면 몸무게도 20kg이 차이가 나는 최준호의 도발에 별생각 없이 응했다.
– 내가 이기면 형한테 반말 써도 되죠? 형은 이기면 뭘 원해요?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몰도바와의 경기가 끝나고 최준호는 훨씬 더 선수들과 친하게 지냈고, 아무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격 활달하지, 에너지 넘치지, 축구도 잘하지, 깍듯이 선배들에게 잘하지….
– 내가 설마 몸싸움에서 지겠냐? 지면 창피한 거지.
– 그럼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거네요? 힘드니까 단판 어때요?
– 좋아!
몸싸움 내기는 간단했다.
2m의 원안에서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 공을 잡고 최대한 오랫동안 버티는 훈련이었다.
그리고 진신욱은 자신의 피지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해도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등을 진 최준호의 뒤에서 힘을 주는 순간, 마치 거대한 돌덩이를 밀고 있는 느낌에 순간 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진짜 이 악물고 있는 힘껏 밀어야 밀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 도대체 뭔 짓을 하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최준호는 그렇게 12초를 버텼다.
하지만 진신욱의 경우는 아주 달랐다.
각오하고 몸으로 버티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발이 들어와 공을 그대로 뺏어 가버렸으니까.
자신의 발기술이 서툴다는 것을 까먹고 말았다.
그래서 버틴 시간은 기껏 4초!
“어, 이게?”
당황한 진신욱은 이 내기를 물리고 싶었다.
하지만 신이 난 듯한 표정으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최준호를 보고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후 최준호의 입이 열렸다.
“…신욱아! 밥 먹으러 가자.”
**
“야, 그게 도대체 무슨 쪽이냐? 너 올해로 28살이야. 난 또 최준호 녀석이 성격 파탄인 줄 알았는데, 그런 내기를 했다고?”
대표팀의 군기반장인 고남일 코치는 사정을 알고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당장 가서 그 녀석이랑 몸싸움으로 이기고 호칭 원상태로 복구해놔.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왜 그런 내기에 져서 쪽을 팔려! 쪽을!”
훈련, 아침, 훈련, 점심, 훈련, 저녁, 잠자기… 재미없는 일과의 연속이었던 대표팀에는 최준호와 진신욱의 몸싸움 내기 사건은 금방 퍼졌고,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말았다.
“내기? 좋지. 신욱아. 바로 할까?”
상당한 각오를 하고 내기를 하였지만,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매일 세 번이나 애걸복걸하며 내기를 하였지만, 도무지 최준호와의 몸싸움 내기에서 이겨낼 수가 없었다.
진신욱은 동료 선수들과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고는 매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진짜 이게 무슨 경우야!’
결국 진신욱은 고남일 코치를 몰래 찾았다.
“저, 코치님 진짜 무슨 수가 없을까요? 몸싸움 이기는 방법이 없을까요?”
진신욱은 정말 진심으로 방법을 물었고, 고남일은 그제야 최준호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깨달았다.
진신욱.
올해 28살.
K-리그에서 적수가 없는 전북 현대의 핵심 공격수.
더 발전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상황.
그리고 이렇게 진지하게 도와달라는 요청은 처음 받아 보는 것이었다.
‘최준호…그 녀석 정말 이런 의도로?’
어찌 되었든 진신욱은 최준호에게 몸싸움 내기에서 이기고 싶어 했고, 그에게 제대로 된 몸싸움 하는 법을 가르쳐 줄 때가 온 셈이었다.
“저녁 먹고 실내 연습장으로 몰래 나와. 알았지?”
고남일은 2002년 월드컵 4강을 이룬 핵심 수비 미드필더였다.
몸싸움이라면 도가 텄고, 진신욱이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눈을 뜬다면 한국의 공격력은 더 강해지는 것이었으니까.
시간을 희생해서라도 가르쳐 주고 싶었다.
**
그렇게 4일이 흘렀다.
자메이카와의 평가전 전날.
“아이구, 우리 신욱이 오늘도 도전하러 왔어?”
진신욱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최준호의 몸의 나이야 16.5 세를 조금 넘긴 상황이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30대였다.
반말을 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는데, 그 어투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오늘은 내가 반드시 이기고 이 상황을 돌려놓을 거다.”
하지만, 누구에게 무슨 수업이라도 듣는지 진신욱은 무게 중심을 낮추어 몸싸움하는 방법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고, 최준호는 점점 더 버티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어 많은 선수와 스태프들까지 모여서 구경하는 수준의 몸싸움 내기가 시작되었고.
최준호는 뒤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진신욱의 압박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버티는 건 오늘까진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피지컬 차이였다.
다만 몸을 쓰는 기술이 최준호가 압도적이었을 뿐.
제법 빠른 속도로 진신욱이 그걸 습득한 셈이었다.
3초도 안 돼서 2미터짜리 작은 원 밖으로 최준호는 밀려나 버렸고, 진신욱은 최준호를 상대로 3초 이상을 버텼다.
“이얍!”
그간의 마음고생이 담긴 진신욱의 격한 고함이 울렸고, 모여 있는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모두 손뼉을 쳤다.
진신욱은 머리를 긁적이는 최준호를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아이고, 죄송했습니다. 선배님. 제가 장난이 좀 심했죠?”
“그래! 이 자식아!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모르지?”
“하하하.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존경을 마다치 않는 선배님!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아주 빠르며 능글맞은 태세 전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정작 왜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은 진신욱 뿐이었다.
다만 자메이카와의 평가전에서 진신욱도 드디어 알게 되었다.
거멓고 무섭게 생긴데다가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운동 능력이 뛰어난 자메이카 수비수가 달라붙을 때만 해도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지만, 뒤에서 가하는 압박은 최준호만큼은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몸싸움을 벌였더니 당황한 모습으로 밀려나는 상대 센터백.
‘아!’
최준호와의 내기에 이기기 위해서 고남일에게 쌍욕을 먹어가며 남몰래 2시간 이상씩 연습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진신욱은 피지컬이 고만고만한 한국 선수들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몸싸움을 보여주었지만, A 매치에서 만나는 외국 덩치들 앞에서는 부끄러운 소녀처럼 움직였다.
그들과 부딪히면 다치고, 어딘가 부서질 것 같다는 막역한 느낌 때문이었는데, 자메이카를 상대로 그런 선입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한두 번의 몸싸움에서 계속 승리하자, 이제는 완전한 자신감을 가진 진신욱은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런 움직임은 대표팀의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오늘 진신욱 선수가 엄청 좋은데요? 자메이카의 센터백들이 진신욱 선수에게 묶여 있어요.”
“그러게.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몸싸움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걸로 보여. 이렇게 되면 2선에서 침투하는 선수에게 좋은 기회가 나지.”
그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진신욱이 두 명의 수비수와 몸싸움을 버티고 날아온 공을 헤더로 떨궈놓았고, 마치 그걸 예측하였다는 듯 침투하던 최준호가 공을 받아 페널티 에어리어로 진입했다.
전형적인 4-4-2.
그리고 타겟형 스트라이커와 쉐도우 스트라이커가 같이 배치되었을 때 나올 수 있는 전술이었다.
– 뻥!
최준호의 전매특허 같은 중거리 슈팅이 이내 자메이카 골문을 출렁였다.
후반전 시작하고 나서 터진 세 번째 골.
2-2 동점이었던 상황을 바꿔놓은 역전 골이었다.
한국보다 피파 순위가 훨씬 높은 자메이카 선수들은 당황한 눈빛으로 하이 파이브를 하는 최준호와 진신욱을 바라보았다.
‘저 조합은 도무지 막을 수가 없어.’
‘한국이 이렇게 잘하는 팀이었어?’
‘박홍민도 안 왔는데, 도대체 이 압도적인 느낌은 뭐지?’
결국 한국은 자메이카 전에서 4골을 몰아치며 4-2로 승리를 하였고, 진신욱은 이 게임에서 자신의 A매치 커리어 최초로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다.
최준호는 역시 1골 1도움.
이후 마지막 친선 경기인 라트비아와의 경기.
대표팀은 극단적인 수비적 전술로 일관한 라트비아를 상대로 5골을 폭격하며 5-0 대승을 거두었다.
A 매치 38경기에서 고작 2골밖에 넣지 못했던 진신욱은 이번 3연전 동안 6골을 뽑아내며 부활의 신호탄을 날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A 매치 3경기에서 3골 5도움을 하며 대표팀의 수준 자체를 끌어올려 버린 최준호는 <그라운드의 어린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더해갔다.
**
“…여긴?”
김동현을 따라온 최현식은 판교에 있는 저택 앞에서 물음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형 화물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곳을 좀 찾아봤는데, 아파트는 안되더군요. 그래서 준호랑 이야기를 나눠서 여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준호가?”
“한국에 오면 푹 쉴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 있었으면 하더라고요.”
대지 250평.
연면적 400평.
지하에 대형 주차장, 지상 3층 건물.
방 11개, 욕조가 8개.
상당히 잘 꾸며진 정원과 고급스러운 외관을 가진 저택.
최현식은 잠시 눈을 비비고는 다시 한번 저택을 보았다.
13평형 남짓한 빌라에서 결혼 후 지금까지 계속 살아왔던 최현식은 살면서 꿈조차 꾸지 못했던 형태의 집이었다.
“여기저기 정보를 알아보니 여기가 집값이 많이 올라갈 수도 있다고 하고,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는 도로도 옆에 있고, 신분당선 지하철까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 골랐습니다. 지하 주차장은 대형 트럭을 세 대 정도 주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요.”
김동현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저 멍하게 뒤를 따르는 최현식.
“형님. 괜찮으세요?”
“음. 이거 현실이지?”
“이거 가지고 그러시면 안 되죠. 유럽 5대 리그에 뛰는 선수들이라면 보통은 이것보다 5배 이상은 큰 곳에서 살고 있는데요.”
“이런 집을 어떻게 관리하지?”
“형님 혼자서는 불가능하고요 사람을 고용해야죠.”
내부도 모두 인테리어가 새로 되었고, 새 집기들도 전부 다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사람을?”
“네. 그건 따로 계약된 곳이 있어서 알아서 해줄 겁니다. 형님은 여기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되고요.”
“…이것 참.”
“불편한 거 아니시죠?”
“불편하긴. 좋지. 너무 좋지. 그런데 준호 녀석에게 너무 미안하네.’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좋은 것만 받는 게 정말 미안하기만 했다.
“차라리 현지에 집을 얻는 건?”
“저도 그렇게 이야기는 해봤는데, 클럽 합숙소가 편하다고 하더군요. 여러모로요.”
“……”
“여긴 이미 계약까지 하고 잔금까지 다 치른 거라 물리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준호가 형님을 많이 생각하더군요.”
그 말에 최현식은 다시 한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바쁘실 테니, 이사는 제가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죠?”
“에이전트가 그런 일도 하나?”
“물론 안 하는 게 정상인데, 이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형님.”
최현식은 얼마 후 휴대폰을 들었다.
– 네, 아버지!
– 어디니?
– 공항으로 이동 중이에요.
– 오스트리아로?
– 네.
– 고생이 많네.
– 고생은요. 즐거워서 하는 건데요. 아버지는 어디세요? 트럭 안은 아닌 것 같은데?
– 여기 네가 산 집에 있다.
– 아!
– 이 집 나 주려고?
– 아니 내 돈 안 받으시는 분이 집은 받을 생각이에요?
– 하하하.
최현식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 이렇게 좋은 집에 그냥은 못 들어가겠고, 네가 올 때까지 잘 관리해두마.
– 고마워요.
– 내가 고맙지.
최현식은 연락을 끊고는 김동현과 함께 다시 한번 집을 둘러보았다.
“좋네. 너무 좋네.”
**
– 대표팀 1월 전지훈련 평가.
이번 1월 전지훈련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최준호라는 걸출한 카드를 발굴한 것과 더불어 진신욱의 플레이에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예선에서 항상 문제가 되었던 득점력 부문에서는 최준호의 합류로 인하여 다양한 공격 루트가 만들어졌으며, 세 경기에서 12골을 넣는 쾌거를 이루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합류하지 못한 해외파들과 최준호, 진신욱의 조합을 맞춰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강민재 선수와 파트너를 이룰 센터백의 존재를 찾아야 하며,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사라진 장영표, 윤종국의 계보를 잇는 윙백들을 발굴해야 하는 점이다.
……
비행기 안에서 한국의 스포츠 신문을 쭉 훑어보던 최준호는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고는 휴대폰을 열었다.
통신은 되지 않지만, 이전에 받은 메시지 기록은 남아 있었다.
– 방금 홈에서 도르트문트에게 1-3으로 깨졌다. 엄청나게 빡친다. 빨리 와라.
엘링 홀란드가 보낸 메시지를 읽은 최준호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려 창가를 통해 검은색 바다를 보았다.
내내 흐렸던 구름이 어느새 걷힌 모양이었다.
도르트문트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졌으며, 월드클래스 선수가 즐비한 팀이었다.
신흥 강자인 잘츠부르크엔 매우 벅찬 상대였고.
‘원정 경기에서 3점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건가?’
시즌 시작하고 거의 쉬지도 못하며 클럽, 국가 대표를 오가며 경기를 치른 최준호는 피곤한지 금세 잠이 들었다.
코를 살짝 골면서 그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 절대 질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