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83)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83화(83/184)
83화 샛별들의 전쟁(1)
“오늘은 문책하려고 부른 자리가 아닐세.”
도르트문트 프런트에는 임시 위원회가 열렸고, 토마스 투헬이 소환이 되었다.
“패배의 원인을 듣고 싶다네.”
미하일 초르크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패배의 원인이라.”
토마스 투헬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위원들을 쓱 둘러보았다.
오늘 패배의 원인은 딱 하나였다.
바로 변수를 통제 못 한 것.
회심의 카드라고 생각한 스벤 벤더가 최준호에게 그렇게 농락당하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거기서 모든 계획이 뒤틀어지고 말았다.
마흐무드 다후드를 넣은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최준호의 몸싸움이 예상 밖으로 좋다는 것을 잊어버렸으니까.
그것이 두 번째 변수.
세 번째 변수는 율리안 바이글을 넣어 최준호를 상대했을 때, 교체 카드가 없음을 깨닫고 카운터 전술을 쓴 마르코 로제가 세 번째 변수였다.
“…그런 것을 위원회가 안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나?”
토마스 투헬의 답변에 위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들이 축구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오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를 해고해. 안 그래도 힘들고 어려운 경기를 하느라 너무 지쳤으니까. 집에 가서 아내를 보고 싶군.”
토마스 투헬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정말 자기 맘대로군.”
“그가 왜 한 구단에서 오랫동안 있지 못하는지 보여주는 단면이야. 감독으로서 역량은 뛰어나지만, 지도자라서는 최악이야.”
“역시 그를 해고하는 것이 좋겠어.”
“챔피언스 리그는 끝났지만, 아직 리그 우승과 DFB 포칼컵이 남았으니 그때까지만 참는 건 어떨까?”
이야기는 분분했고, 위원회에서는 토마스 투헬의 해고를 놓고 투표에 들어갔다.
**
“몸은 어때?”
“인대가 좀 늘어났다고 하네.”
마르코 로제는 몇몇 주전 선수들에게 이틀간의 휴가를 주었고, 최준호는 엘링과 함께 주장인 울머의 집에 초대가 되었다.
다른 선수들도 초대가 되었는데, 같이 바비큐 파티를 한 후에 몇몇은 모여서 카드놀이를 했고, 몇몇은 TV에 앉아서 축구를 보았으며, 엘링과 최준호는 게임을 하다가 수영장으로 나왔다.
“벤치에 앉아서 보니까 걔네들 미친개들처럼 달려들던데.”
“장난 아니었어. 막판에 그런 체력들을 어디다 숨겨놨는지.”
“그때 태클에 걸리고서 발목이 안 좋았지?”
“아마도. 당시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었는데.”
축구 선수들은 경기에 몰입하면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도 모르고 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회복까지는 얼마나 걸리는데?”
“2주 정도라고 하는데.”
“아약스전에서는 뛸 수 있겠다.”
“아마도?”
슬라이스 된 얇은 오렌지가 컵에 걸린 타이푼 트로피카 칵테일을 한 입 쪽 빤 엘링이 입을 열었다.
“맛있네? 넌 술도 안 먹으면서 이런 걸 어떻게 만드는 거냐?”
최준호는 유난히 햇살이 좋은 하늘을 바라보며 무가당 음료수를 흡입했다.
“인터넷 보면 다 나와. 따라 하기만 하면 돼.”
에버튼 시절에 스스로 맥주나 막걸리, 칵테일을 만들어서 먹던 최준호였고, 그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그런 식이면 운전도 인터넷 보면서 따라 하겠네?”
운전이라는 이야기에 최준호의 눈빛이 반짝였다.
“운전 같은 건 그냥 핸들 돌리고 브레이크랑 액셀만 밟으면 되는 거 아냐? 아주 쉬운 죽 먹기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면허증을 따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26회의 일반이론 수업과 6회의 특별이론 수업을 들어야 하고, 실기 주행을 18회를 해야 하는데, 1회당 50분이 소요되었다.
그걸 모두 받아야만 면허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시험도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고.
아무리 빨라도 6개월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최준호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18세 이상이어야만 면허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니 지금은 차를 소유할 수도 없는 상황.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 줄 아냐?”
노르웨이 역시 면허증을 따기 어려운 것은 비슷했고.
꽤 어렵게 면허증을 딴 엘링이 콧방귀를 끼었다.
“내기할까?”
“넌 내기를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
“재밌잖아?”
엘링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텅 비어있는 수영장을 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내기에서 지면 너 포르투 경기서 해트트릭하고 받은 축구공 내놔.”
자신의 챔피언스 리그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며칠 만에 갈아치운 최준호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최준호보다 어린 선수가 해트트릭하는 것은 반세기 내에 나오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수집가들에게 그 공의 가치는 분명 상당할 터!
“상당히 비싼 내기네?”
최준호는 손가락을 코를 파다가 엘링의 애장품을 가만히 상상해보았다.
자동차를 제외하고는 거의 돈을 쓰지 않는 녀석이었다.
‘이번에 포르쉐 911 신형을 구매한 거 같은데.’
정작 클럽 주차장에 박아 놓은 G 클래스 V8은 먼지만 가득 쌓여 있는 중이었다.
최준호는 엘링 홀란드가 구단을 옮길 때마다 사두었던 차량을 그냥 방치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럼 G-클래스 V8 줄 거야?”
“뭐엇?”
“나중에 경매장에서 불려질 가치를 생각하면 공이 그것보다는 비쌀 거 같은데?”
최준호가 정확하게 공의 가치를 알고 있자, 엘링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콜!”
**
둘은 파티가 끝난 후 포르쉐를 타고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한적한 교외에 차를 끌고 나왔다.
이곳은 15km 구간 정도 양 끝단 공사로 텅 빈 도로인데, 엘링이 가끔 와서 운전 연습을 하는 곳이었다.
내기는 간단했다.
시동을 꺼트리지 않고 사고 없이 15km를 운전하면 되는 내기였다.
‘자동차 수집은 열심히 하는데, 정작 운전은 할아버지 운전이네?’
차량 중간에 있는 엔진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최준호는 침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속도광이라던 줄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혀를 두를 만큼 스피드를 즐기던 최준호였으니까.
속도위반 딱지도 줄라탄보다 훨씬 많이 끊기도 하였고.
그에게 악동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유 중 하나였다.
“사고 나면 수리비는 네가 내.”
“물론이지.”
엘링 홀란드는 최준호와의 승부욕에 내기를 하였지만, 정작 조수석에 올라타니 엄청나게 망설여졌다.
운전 초보에게 포르쉐를 주는 건….
더군다나 수동 차량이었다.
클러치를 잡고 기어를 넣을 수나 있을지….
“자…잠깐만!”
– 드르륵.
엘링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최준호는 아주 익숙하게 기어를 넣었다.
“내기 무르게?”
“아…아니! 그게 아니고.”
최준호는 가볍게 액셀을 밟았다.
언제든지 튀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신호를 주는 자동차.
“V8이다.”
정말 오랜만에….
언제 운전했는지도 기억 안 날 만큼 오랜만에.
최준호는 액셀을 강하게 눌렀다.
2.4초 만에 100 km/h에 도달하는 엄청난 엔진을 가진 차는 굉음을 내며 앞으로 튀어 나갔고, 엘링 홀란드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천장의 손잡이를 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하지만, 최준호는 엘링의 비명소리는 귓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도로의 광경.
“히히히히! 신난다!!!”
순식간에 시속 200km를 돌파했지만, 최준호는 브레이크를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를 거의 보기 힘든 교외 지역의 4차선 도로.
그리고 산이나 구릉이 거의 없는 평지의 지중해 나라!
도로마저 잘 닦여 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268km/h 가 도달한 사이 아무리 액셀을 밟아도 차는 더 나가지 않았고, 최준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락이라도 걸렸나?’
하지만 입에 게거품을 물고 거의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엘링의 표정을 보고는 최준호는 스피드를 줄이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주체를 못 했네. 자제를 좀 해야지.’
그날 밤.
최준호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로고가 새겨진 키 2개가 달린 열쇠고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숙소로 들어갔다.
만 18세가 되는 걸 기다리기보다는 도르트문트로 돌아가서 바로 면허증을 따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
잘츠부르크 vs 아약스 1차전은 2018년 4월 2일에 아약스의 홈구장인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잘츠부르크 선수단은 그 전날에 도착해서 구장 적응 훈련을 잠시 하였다.
아약스는 네덜란드의 항구 도시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하는 팀이었다.
에릭 텐하흐 감독을 선임한 후 아약스는 젊은 선수들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레알 마드리드를 꺾으며 챔피언스 리그 8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잘츠부르크가 도르트문트를 꺾고 올라오긴 했지만, 아약스만큼의 충격은 아니었고.
아약스는 유대인 거주지역에 스타디움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유대인 구단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 번 형성된 이 이미지 때문에 가끔 그들을 상대하는 구단들은 독일 나치 기를 가지고 오거나, 팔레스타인 깃발을 가지고 와서 모욕을 주곤 하였다.
특히 아약스의 홈팬들은 굉장히 소문난 극성 관중이었는데, 상대 팀 선수가 골을 넣으면 뻑큐를 날리는 건 다반사고, 똥오줌이 든 오물을 투척하기도 했다.
“외출 안 나갈래?”
“네덜란드 음식은 정말 쉣이야. 그냥 쉴래.”
“노르웨이도 만만치 않던데?”
“죽을래?”
거의 단짝 같은 엘링이 침대에 부비적거리자, 최준호는 양희찬의 방문을 두드렸다.
“형, 안 나갈래요?”
“칭챙총 소리 듣기 싫어서 안 나가련다.”
“칭챙총!”
“야!”
최준호는 슬그머니 호텔을 빠져나와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의 햇볕을 쬐며 걸었다.
양희찬이 코디해주었던 옷을 입고 모자를 깊숙하게 쓰고 돌아다녔는데, 복잡한 거리에서 네덜란드의 젊은 남자들과 부딪힐 때면 칭챙총이라고 말하고는 쓱 지나갔다.
중국인들을 비하하는 단어인데, 동양인만 보면 구분 없이 쓰는 단어였다.
유럽의 인종 차별을 엄청나게 겪었던 최준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도시를 구경하러 다녔다.
2시간 정도 암스테르담 번화가를 걷는데 칭챙총 소리만 100번이 넘게 들은 것 같았다.
그들이 쓰는 네덜란드어의 기원은 독일어였다.
관계를 따지자면 독일어의 사투리 버전?
그래서 그런지 익숙한 단어들이 많았고, 대화하는 데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 음식점의 탁자에 앉아서 간단한 음식을 즐기고 있었는데 최준호의 눈에 묘한 상황이 들어왔다.
– 얘 엄마가 없는 멍청이야.
라는 식으로 적힌 노트 종이가 붙어 있는 가방을 들고 배회하는 어린 여자아이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을 하였는데, 다들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없으면 멍청이냐?’
최준호도 어머니 없이 성장하였고, 소녀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메고 있는 배낭에 붙은 종이를 떼어줄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보며 비웃음을 짓곤 했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최준호와 시선이 마주쳤고, 상당히 주춤거리는 모양새를 취했다.
“난 괴물이 아니다. 칭챙총은 더욱 아니고.”
오히려 최준호가 먼저 말을 걸어주자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난 그레이시야.”
“무슨 일이야?”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돈을 잃어버렸어.”
“얼마가 필요한데?”
“5유로.”
최준호는 바로 5유로를 그녀에게 쥐여주었다.
“…고마워. 이름이 뭐야?”
“초이.”
“초이!”
“잠깐 돌아서 봐.”
그레이시가 왜 그런지 궁금한 표정을 짓다가 돌아섰고, 최준호는 그녀의 배낭에 붙은 종이를 떼어냈다.
“그게 뭐야?”
“누군가 장난을 친 거야.”
그녀는 종이를 보고는 시무룩해졌다.
최준호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엄마가 없어.”
“진짜?”
“응. 하지만 멋진 축구 선수가 되었지.”
“진짜?”
“그레이시도 크면 멋진 사람이 될 거야. 이제 얼른 집에 돌아가.”
“우리 아버지도 축구 좋아해. 내일 경기 보러 갈 거거든.”
“그래? 그럼 내일 볼 수 있겠네?”
“진짜?”
“내일 꼭 응원해줘.”
“응! 알았어! 초이!”
몇 마디 나눈 그레이시는 연신 손을 흔들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고, 좀 있다가 종업원이 무언가를 가지고는 최준호에게 다가왔다.
“이건, 지배인님이 고맙다는 의미로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
작은 쿠키 하나와 비터볼렌(소고기를 말아서 동그랗게 튀긴 네덜란드 전통 스낵), 그리고 맑고 따뜻한 홍차였다.
“아, 고마워요.”
종업원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고, 최준호는 고개를 돌려 가게 안쪽을 보았다.
안경을 쓰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나이 든 노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최준호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인종 차별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어딜 가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피부 색깔과 상관없이.
**
“…초이라고?”
암스테르담의 패션가에 종사하는 프랭크는 딸 그레이시와 함께 암스테르담 아레나에 좌석을 잡았다.
“응!”
“아약스에는 그런 선수가 없는데?”
“진짜?”
축구장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레이시가 갑자기 따라간다고 하니 프랭크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딸이 말하는 초이라는 동양인 선수는 확실히 아약스에 없었다.
‘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격수는 있었어도.
그런 프랭크의 눈에 전광판에 뜬 잘츠부르크의 선수 명단이 들어왔다.
거기에는 초이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떠 있었다.
’21번…’
프랭크는 번호를 보고서야, 딸에게 도움을 준 선수가 요새 축구계에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 선수라는 걸 깨달았다.
“와, 우리 딸이 엄청 유명한 사람을 만났었네?”
“진짜?”
“그럼!”
“그 오빠도 엄마가 없다고 했어.”
“…그래?”
프랭크는 놀란 눈빛으로 경기장에 입장하는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잘츠부르크 VS 아약스.
이번 챔피언스에 떠오른 새별들의 전쟁이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