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86)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86화(86/184)
86화 황소와 늑대(1)
늘 원정을 먼저 떠난 것과는 달리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1차전은 홈에서 벌어졌다.
왼쪽 윙백 울머와 스트라이커 엘링 홀란드가 부상으로 빠진 상황이라 마르코 로제는 오랜만에 미니 게임을 진행하였다.
일찍 리그 우승을 결정지으면서 승부와 상관없이 경기 감각이 부족한 선수들을 자주 기용하면서 경쟁 구도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라이너를 울머의 자리로 놓고, 2 옵션이었던 슈베글러를 오른쪽 윙백으로 쓰면서 울머의 빈자리는 해소되었지만, 엘링 홀란드의 클래스를 채워줄 선수는 보이질 않았다.
– 늘 경기를 보면서 느끼는 건데, 초이는 스트라이커 자리도 잘 어울려.
– 하지만 그 자리에서 뛰어 본 적이 없잖아?
– 득점력이나 침착성, 오프 볼 움직임, 몸싸움, 드리블 능력을 봤을 때는 한 번 테스트 해볼 만해. 아, 헤더 능력은 수준 이하이긴 하지만.
르네 마리치의 제안으로 마르코 로제는 미니 게임을 했다.
일단 1 옵션이라고 생각한 소리아노를 A 팀으로, 최준호를 B 팀의 스트라이커로 놓았다.
‘이 자리 오랜만이네.’
미드필더로 있을 때는 전방에 눈을 돌리면 팀 동료들이 언제나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리 압박을 가해도 어찌 되었든 그 선수들에게 패스하면 역할을 잘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스트라이커는 성난 표정을 짓고 있는 수비수들만 보고 움직여야 했다.
돌격 대장처럼 달려들어 저들을 부수고 골을 넣지 못하면 누군가로 갈아치움을 당하고.
“아무래도 감독도 내 편인 거 같은데?”
중앙에서 공을 앞에 두고 소리아노가 말을 걸었다.
– 챔피언스 리그 4강 경기야. 이 세상에서 이 경기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그래서 스태프진은 스트라이커 기용에 매우 신중해지고 있지. 네가 그 자리에 어울릴지 가능성을 한 번 테스트해 보고 싶은데?
르네 마리치가 자신을 불러서 한 이야기였다.
미드필더는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진행하면서 잠재력이 나타난 아이다라, 크사보, 베리샤가 맡아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 스트라이커로서 어떤 역할을 원하는데?
– 폴스나인(false 9)
폴스나인은 직역하면 가짜 9번이라는 뜻이다. 축구에서 9번은 주 득점원에게 주는 번호인데, 중앙 공격수 자리에 배치되지만, 득점을 노리기보다는 중원으로 내려가서 연계 플레이, 드리블 돌파, 기회 창출을 우선하는 롤이었다.
– AS 로마는 중원에 많은 무게를 두고 운영되는 팀이야. 측면에서 콜라로프와 플로렌치의 오버래핑도 골치 아픈 문제인데 중원에서 수적으로 밀리면 몹시 어려운 게임이 될 수 있거든.
잠시 르네 마리치와의 이야기를 떠올린 최준호는 비웃음을 짓고 있는 소리아노를 보았다.
180cm 정도의 키에 적당한 몸집.
높은 골 결정력과 준수한 프리킥 능력.
하지만 지금의 자신보다 별로인 피지컬과 운동 능력.
‘딱 과거의 나 정도 수준이야. 물론 중거리 슈팅 능력은 한참 아래지만.’
최준호는 그런 소리아노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착각은 자유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소리아노가 얼굴을 붉혔다.
“넌 내 밑에서 어시스트나 해.”
“글쎄. 두고 보자고.”
최전방 공격수의 롤을 부여받은 이상 이제부터는 연계 플레이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어찌 보면 공격의 고삐가 풀렸다고 해야 하나?
2개의 팀으로 나뉜 잘츠부르크의 연습 경기가 시작되었고, 주전 선수들로 이루어진 A 팀이 경기를 압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경기 시작 2분도 안 돼서 베리샤가 빠른 발로 돌파하였고, 페널티 에어리어로 침투하는 양희찬은 베리샤의 스루패스를 받아 가볍게 골을 넣었다.
‘왜 저 녀석들이 우리 팀 공격수야?’
B팀의 선수들 대부분은 소리아노처럼 후보군이었고, 최근 들어 경기 경험을 쌓은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소리아노를 지지하며 팀 내 동양인 선수들을 압박하였는데, 하필이면 최준호랑 미나미노랑 같이 뛰어야 했으니까.
“패스! 패스!”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 소리아노는 활발하게 뛰어다니며 소리를 쳤다.
경기를 가만히 보던 마르코가 르네에게 물었다.
“저런 방법이 통할까?”
그들은 AS 로마와의 경기에서 최준호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한편, 어그러진 팀 분위기를 다시 살리려고 애를 썼다.
“초이가 후보군 녀석들이랑 같이 뛴 경기가 별로 없잖아? 같이 뛰다 보면 초이에 대해서 알게 될 거야.”
르네는 확신하며 대답했고, 마르코는 턱을 쓰다듬으며 미니 게임으로 시선을 돌렸다.
**
A 팀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B 팀도 악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소리아노는 슈팅이 번번이 빗나가자 자신을 마크하고 있던 선수들을 향해 욕설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이 새끼야, 좀 적당히 하란 말이야.”
“너만 잘 나고 싶냐? 나도 잘 나고 싶다!”
B팀의 선수들이 소리아노를 지지하는 건 동질감이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실력이 있으면서도 더 뛰어난 선수들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소리아노가 흥분해서 과격하게 플레이하고 욕설을 퍼붓자 그런 동질감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내가 왜 저런 더러운 새끼를 지지한 거지? 어차피 똑같은 새끼였네.’
최전방 공격수인 최준호와 미나미노는 따돌림을 당하듯 거의 공을 만지질 못했는데, 소리아노의 욕설에 열받은 쉴래거가 최준호에게 적극적으로 패스하기 시작하면서 양상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최전방 공격수 롤을 받았지만 거의 중원까지 내려와 있는 최준호는 쉴래거의 공을 받자마자 전방을 향해 스루패스를 강하게 넣었다.
압도적인 기량으로 B팀을 압박하는데 정신을 쏟던 A팀은 최준호가 어떤 선수인지 잠시 잊어버렸다.
많은 공간을 줬을 때, 최준호의 패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 공은 발이 빠른 미나미노에게 연결이 되었고, 미나미노는 침착하게 단독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대 골문에 공을 꽂아 넣어 버렸다.
미나미노는 최준호를 보며 엄지를 척 쳐들었다.
“쓰고이!”
동점 골이 터진 후에 B팀은 적극적으로 두 동양인 선수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베리샤가 골을 넣어 더 달아나 버렸다.
소리아노는 가장 많은 슈팅을 때렸지만, 이상하게 들어가지 않았는데, B팀 선수들이 악에 받친 표정으로 끝까지 달라붙어서였을 것이다.
미니 게임이 거의 끝날 무렵.
소리아노와 경합 끝에 볼을 뺏어낸 수비수가 찬 롱볼이 최준호에게 연결이 되었다.
최준호의 앞에는 아이다라를 비롯해 세 명의 주전 센터백이 앞을 지키고 있었고, 아군 선수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야 최전방 공격수인 게 실감 나네.’
연습게임이라지만 1-2로 지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최준호는 마지막 공격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볼 생각이었다.
오랑우탄을 닮은 아이다라가 달려들었고, 최준호는 그의 수비에서 굉장한 익숙함을 느꼈다.
아마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서이지 않을까?
평소에는 작용하지 않던 어떤 힘이 자신을 이끄는 것 같았다.
– 툭, 툭.
아이다라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최준호를 놓쳤다는 사실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의 팬텀 드리블은 한다는 기미조차 없이 펼쳐졌으니까.
아이다라가 급하게 최준호를 뒤따라 달렸고, 세 명의 센터백들은 최준호를 둘러싸서 그가 갈 수 있는 방향을 모두 막아버렸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최준호가 구스타보를 등지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미나미노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 아이다라는 방해하기 위해서 패스 경로에 다리를 쑥 넣었다.
하지만 최준호는 패스하는 대신 공을 공중으로 살짝 띄웠고, 다른 발로 툭 차서 구스타보의 머리 위로 넘겨버렸다.
동시에 두 수비수 사이 공간으로 민첩하게 어깨를 들이밀었고.
이 상황에서 돌파할 거라 예상을 못 한 구스타보가 다리를 넣었지만, 점프하며 피해버렸고, 최준호는 4명을 순식간에 돌파해서 페널티 에어리어로 향했다.
“젠장!”
왈케가 당황해서 앞으로 튀어나왔고, 네 명의 선수들이 잡아먹을 듯이 최준호를 뒤쫓았다.
최준호는 지금쯤 슈팅을 때려야 한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왈케가 튀어나온 방향을 확인한 최준호가 왼발로 공을 강하게 감아 찼다.
– 뻥!
코스를 읽은 왈케가 몸을 띄웠지만, 공은 각도 큰 커브를 그리며 왈케의 손을 피해 골문 안으로 안착했다.
골을 넣은 최준호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한참 동안 자신의 다리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굉장히 놀라운 느낌이었고,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르코 로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던 그의 개인기에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거기서 또 성장한 건가?’
르네 마리치가 휘파람을 불었다.
“방금 플레이는 마치 리오넬 메시의 그것을 본 거 같아.”
둘은 시선을 마주쳤다.
지금 시점에 가장 필요한 선수.
주력 선수들이 빠진 이 어려운 경기에 변수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선수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였다.
소리아노는 강력한 잘츠부르크의 수비를 상대로 놀라운 골을 터트린 후 멍하게 땅 밑을 보고 있는 최준호를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팀 내 정치력도 비등비등한 실력이어야 통하는 거지, 저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를 상대로 뭘 할 수 있을까?
사실 얼마 전 에이전트를 통해서 중국에서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중국? 미쳤어?
– 연봉을 지금의 2배로 쳐준다는데?
– 축구는 유럽의 것이야. 그런 노랑 원숭이 같은 나라에서 무슨 축구! 다른 유럽 구단은 없어?
– 아직.
괴물 같은 공격수인 엘링이 다쳤을 때 기회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 기회마저 요원해져 버렸다.
다른 선수들이 최준호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 소리아노는 몸을 돌려 경기장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사실 그는 감독이 왜 최준호를 B팀에 넣었는지 알고 있었다.
스트라이커로서의 가능성을 테스트했고,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다음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 역시나 기회가 없음을 확신하였다.
**
잘츠부르크가 핵심 선수 이탈로 삐걱거리고 있을 때, AS 로마는 에우제비오 디프란체스코 감독 밑에서 점점 더 좋은 분위기를 가져갔다.
디프란체스코는 2011년도 사수올로에 부임하여, 팀을 세리아 A로 승격시킨 후 UEFA 유로컵까지 보내면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고, 이후 AS 로마에 와서 첫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초기에는 AS 로마의 팀 특징을 살리지 못해 승점을 챙기지 못했고, 언론의 뭇매를 엄청나게 맞았다. 하지만 점점 안정세를 취해가더니 챔피언스 리그에서 리오넬 메시가 있는 세계 최고의 클럽 바르셀로나를 격파하는 <로마의 기적>을 일으켰다.
로테이션을 상당히 많이 돌리는 감독이었기에, 오히려 시즌 후반에 핵심 선수의 이탈이 거의 없었고, 세리라 A에서도 유벤투스와 우승 경쟁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4-3-3의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하길 좋아했는데, 바르셀로나를 불러들여서는 3-5-2 시스템으로 전환해서 기적을 일으켰다.
“분명 잘츠부르크는 바르셀로나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팀이지만…”
디프란체스코의 생각은 그랬다.
바르셀로나는 팀 색깔이 분명한 클럽이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피지컬이 좋은 에딘 제코와 쉬크를 이용하여 상대 골문을 폭격했지만, 잘츠부르크는 어떤 전술로 나올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팀이었다.
“팀 내 득점 절반을 넣고 있던 괴물이 사라졌으니, 그들의 공격력도 반으로 감소한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잘츠부르크가 수비력이 좋은 팀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비의 핵심이었던 윙백 울머가 이탈을 했으니 어지간해서는 질 수가 없다고 보는 디프란체스코였다.
‘하늘이 돕네. 준결승에서 잘츠부르크라니!’
바르셀로나를 상대한 전술이 눈에 아른거렸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서로 맞붙어도 절대로 꿀릴 게 없다고 생각한 디프란체스코는 자신에게 익숙한 4-3-3 전술을 선택하였다.
디프란체스코는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수단을 보며 말했다.
“내일은 놈들의 홈구장에서 경기를 끝낸다. 확실히 밀어붙여서 많은 득점을 따낸다.”
**
“AS 로마는 바르셀로나를 꺾고 사기가 바짝 올랐을 것이다. 엘링과 울머가 빠진 우리 팀을 꽤 만만하게 보겠지.”
마르코는 전술 판을 보면서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고, 선수들은 집중하면서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놈들은 바르셀로나를 꺾었던 수비적인 3-5-2 전술을 가지고 나오지 않을 거다. 사기가 바짝 올랐으니 가장 공격적인 전술로 나오겠지.”
마르코는 비어 있던 최전방 스트라이커 자리에 최준호의 이름이 적힌 카드를 붙였다.
“하지만 레드불 아레나는 우리 안방이다.”
마르코 역시 공격적인 4-3-3 전술을 선택했다.
“안방에서 늑대 새끼들이 어슬렁거리게 둘 수는 없지. 한두 명이 빠졌다고 해서 잘츠부르크는 전력이 약해지는 그런 팀이 아니다. 그렇지?”
마르코의 어법은 꽤 진중했고, 선수들은 감독이 자신들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내일 늑대 새끼들을 짓밟아 뭉개 버린다. 다음 경기에서 이빨을 드러내지도 못할 만큼!”
최종 선발라인을 완성 시킨 마르코는 탁자에 손을 대고 창문을 보았다.
“2018년 5월 2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있는 NSC 올림피스키 스타디움에서 우리는 잘츠부르크의 모든 역사를 새로 쓰게 될 것이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상황을 잠시 떠올린 선수들은 모두 전의를 불태웠다.
“수고했다. 오늘 저녁은 푹 쉬고 내일 전장에서 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