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90)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90화(90/184)
90화 출격 준비(1)
2018 러시아 월드컵
한국은 본선 F조였다.
한국과 같은 조에 속한 팀은 2014 우승팀인 독일과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꺾고 올라온 스웨덴, 북중미 최강팀 멕시코였다.
그 어떤 축구 전문가도 한국의 16강 진출을 예상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팀들이었다.
일부는 한국이 전패로 바로 탈락할 것이라고 할 정도로 대진운이 좋지 않았다.
“이런 팀들과 평가전을 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습니까?”
김범근이 위원회에서 화두를 쏘아 올렸다.
“우리는 성공한 사례가 있습니다. 2002년 히딩크는 축구 협회에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할 때 대표팀을 소집할 수 있을 것. 또 하나는 평가전은 강팀들과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성공하였고, 좋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김범근의 이야기에 다른 위원들이 부정적인 코멘트를 달았다.
“결국 돈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강팀들은 한국과 같은 약팀과 평가전을 가지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붙으려면 많은 대진료가 필요하지요. 거스 히딩크는 당시 대진료로 게임당 20억에 가까운 재정을 소모했습니다.”
“맞습니다. 결국 돈 문제지요. 지금 축구 협회는 그만한 자금을 소모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평균 관중 3천 명의 K-리그로는 꿈도 못 꿉니다.”
김범근은 자료를 하나 띄우고는 입을 열었다.
“K-리그 관중을 3천 명으로 만든 것이 누구의 잘못입니까?”
그 말에 축협의 관계자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2002년 4강 신화를 연 뒤 K-리그 관중들은 평균 5천 명에서 1만 2천 명으로 점프를 하였습니다. 물론 그 효과는 1년 밖에 가지 않았지만요. 이번 월드컵에서 8강까지만 간다고 하더라도 2002년 정도의 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분석 보고서입니다.”
김범근이 8강이라는 말을 하자 다들 비웃음을 지었다.
“8강이요?”
“8강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미 정해진 평가전을 어떻게 되돌리자는 겁니까?
물론 지금 되돌리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 대한 계획을 바꾸는 것보다는 다음 월드컵인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생각해보자는 뜻이었다.
“당연히 이번 월드컵에 대한 계획을 바꾸는 건 아닙니다. 다음 월드컵을 준비하자는 것이지요.”
김상식은 말없이 그들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시스템적인 부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가령 1부와 2부에만 적용된 승강제를 5부 리그까지 활성화하는 것이죠. 또 임대제도를 활성화해서 어린 선수들이 기회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부 리그로 가서 경기를 뛸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각 구단에 충분한 보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금 확보도 해야 합니다. 후원자도 많이 확보해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이변이 일어나야 하지요.
김범근과 만나서 그가 구상한 계획들을 들은 김상식은 김범근이 하는 이야기마다 부정적인 언사를 달고 조롱하는 위원들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내 그룹에는 저런 놈들은 발도 못 붙였다! 앞으로 대대적인 인사 쇄신이 필요하군.’
– 8강이 가능합니까?
– 한 선수가 그런 이변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 박홍근이요?
– 최준호 선수입니다.
– 그 녀석이 판도를 바꾼다고?
– 그렇습니다. 최준호 선수의 경기를 분석해 온 결과 충분히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무일푼에서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한 그룹을 만든 김상식.
다 큰 손자도 보고 기력도 쇠할 만큼 쇠해서 그룹 경영 최전선에서 어느 정도 뒤로 물러선 뒷방 늙은이.
이런 부정적이며 회의적인 축협의 분위기를 보던 김상식의 가슴에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다 뜯어고쳐야겠어.’
뜻하지 않게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
한국으로 돌아온 최준호는 파주에서 열리는 대표팀 합숙에 참여하기 전에 밀렸던 일정을 소화했다.
잘츠부르크의 소유주인 레드불 사의 광고, 요새 한창 뜨기 시작한 치킨 업체의 광고.
그리고 대한 그룹 소유의 통신사와의 새로운 광고.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패션 잡지사인 보그와의 광고.
물론 최준호의 패션 감각은 젬병이었지만, 그의 옷걸이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편이었다
동양인답지 않게 다리도 매우 길었고, 축구 선수답지 않게 굉장히 유려한 마스크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를 꽉 물고 한 곳을 응시하는 최준호의 옆 모습은 촬영에 임하는 모든 스태프를 빠져들게 할 만큼의 매력이 있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 찍을 때도 한동안 그의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는데, 이 아이도 그렇네.’
아델린 아드리누는 이 업계에서 20년간 일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수많은 스타와 화보를 찍고 인터뷰를 했었다.
아주 매력적인 사람도 있지만,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발정 난 개처럼 헐떡이는 쓰레기들도 많았다.
그들을 다 ‘매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작은 잡지에 담아 전 세계에 출간하는 것이 그녀의 주 업무였는데, 이번 작업은 너무나 즐거웠다.
16살 아니 이제 곧 17살.
그 어린 나이에 세계 축구계의 이목이 쏠릴 만큼 놀라운 활약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스타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거만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협찬받은 의상을 바꿔 입을 때마다 자기 모습이 이상했는지, 그 불안한 표정부터가 귀여웠고, 여러 언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터라 인터뷰 자체가 아주 쉽게 흘러갔다.
– 다음 시즌에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들고 싶다.
– 보그의 독자들을 위해서 한마디?
– 만나서 반가워요.
딱 기대한 정도로만 답변을 해주었고, 이것을 포장하는 것은 이제 에디터의 몫이었다.
**
유럽 5대 리그의 시즌이 모두 끝나자, 이적과 관련된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레드불 잘츠부르크 마르코 로제 감독. 도르트문트의 제안에 계약서 사인!
결국 마르코 로제는 자신의 소원대로 대형 클럽인 도르트문트로 향했다.
17/18 챔피언스 리그가 쏘아 올린 새로운 스타들.
그리고 준결승 문턱에서 AS 로마에게 잡혔지만, 득점왕이 된 신성 엘링 홀란드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커졌다.
바이킹 후손 다운 놀라운 피지컬.
엄청난 득점력, 머리 발 모두 다 사용 가능한 완전체 9번 스트라이커.
현대 축구에서 구하기 어려운 매물이었으니까.
– 도르트문트! 엘링 홀란드 영입에 심혈을 기울일 것.
– 잘츠부르크의 돌풍의 주역 엘링 홀란드! 세계 빅 클럽이 주시!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 리빌딩에 엘링 홀란드가 필요하다!
– FC 바르셀로나. 엘링 홀란드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오라!
…
그렇게 환대받는 엘링 홀란드 만큼이나 최준호의 위상도 이적 시장에서 엄청나게 높아져 있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월드컵에서 초이의 성장을 지켜볼 것.
– 레알 마드리드. 루카 모드리치의 후계자로 심각하게 고려하는 중.
– 첼시. 우리는 초이가 필요하다.
– FC 바르셀로나. 그를 위해서 용병 자리를 반드시 비울 것!
– 파리 생제르맹. 티아고 모타의 대체자로 초이를 낙점!
– 바이에른 뮌헨. 프랑크 리베리의 빈 자리에 초이가 최선.
…
빅 클럽뿐만이 아니라 유럽 5대 리그의 웬만한 팀들은 두 선수에 대해 큰 관심이 있다는 견해를 밝히었다.
미하일 초르크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프리 시즌 전 이적 시장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최준호의 계약서를 보았다.
– 1군 로테이션.
– 계약 기간 : 4년
– 주급 : 2만 9천 유로. 세후 주급 1만 6천 유로
– 로열티 보너스 : 75만 유로
– 출장 수당 : 6000 유로
– 득점 보너스 : 4000 유로
– 교체 미출전 수당 : 2000 유로
– 매년 급여 인상 20%
그리고 밑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바이아웃 금액 4,500만 유로.
“…도대체 왜 바이아웃이 4,500만 유로인 거지?”
최준호를 엄청난 포텐을 가진 유망주 정도로 생각했었던 미하일 초르크였다.
16세의 플레이어를 누가 4,500만 유로를 주고 데려갈까 싶었는데.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미친 활약을 하며 모 팀인 도르트문트를 박살 내고 팀을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까지 견인할 줄은 계약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으니까.
세계 빅 클럽들에겐 4,500만 유로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지출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눈 뜨고 최준호를 뺏기게 생겼다.
“이적 시즌에 오기 전에 재계약을 해야 해.”
당연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에이전트가 우리 오퍼를 씹고 있어. 초이는 바쁘다는 핑계로 에이전트와 이야기하라고 하고.”
“…돌아버리겠네!”
“이번 월드컵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그에게 관심 많은 구단이 적극적으로 구애할 거야. 시간이 없어.”
“그를 놓치면 팬들이 정말 실망할 거야. 초르크 꺼지라는 피켓을 들고 매일 클럽 앞에서 시위할지도 몰라.”
수석 스카우트의 말에 회의장에는 잠시 피식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이내 고요해졌다.
“…내가 직접 가야겠군.”
미하일 초르크가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파주 훈련소에 합류하기 전 최준호는 아무도 몰라보도록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에 마스크와 모자 하나를 쓰고 집을 나섰다.
가볍게 산책을 하며 주변의 공기를 느끼던 최준호는 어디선가 공을 차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끌려서 발걸음을 돌렸다.
<꿈나무 축구단> VS <판교 드래곤스>
이라고 적힌 간판을 슬쩍 보던 그는 공개되어있는 경기장 안을 슬며시 보았다.
학부모로 보이는 여인들이 한쪽에서 응원하고 있었고, 축구장에는 10살 즈음 되었을 만한 아이들이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었다.
아무런 고민 없이 공만 쫓는 순수한 아이들의 눈빛을 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최준호였다.
최준호도 자리를 찾아 앉아서 경기를 가만히 보았는데, 유독 한 어린아이가 눈에 걸렸다.
기본기는 제법 탄탄한데, 체구가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작았다.
몸싸움에 밀려서 제대로 공을 못 차자, 팀 아이들이 그에게 공을 주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꼭… 내 어릴 적이 생각난단 말이야.’
마침 공이 이쪽으로 흘렀고, 서너 명이 근처에 있었지만, 몸이 가장 작은 아이만 부지런하게 달려왔다.
최준호는 굴러오는 공을 잡아 들자 똘망똘망하게 생긴 아이가 다가왔다.
“공 좀 주세요.”
“이름이 뭐야?”
“…정도윤이요.”
최준호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눈높이를 맞췄다.
“축구 재밌어?”
“응. 엄청요.”
“네가 상대하는 8번 말이야. 덤벼들면 공을 오른쪽으로 차면서 드리블해 봐.”
정도윤은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최준호는 아이에게 공을 주었다.
얼마 후 아이는 정말로 오른쪽으로 공을 차면서 드리블을 하였고, 몸싸움하던 덩치 큰 8번은 아이의 드리블에 속아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상대의 약점을 잘 파악해서 공략하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지. 모든 것에 완벽한 선수란 없으니까.’
최준호는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에 완벽한 선수도 없듯이 모든 것에 완벽한 팀도 없는 법이니까.
“초이.”
강한 독일인의 강세에 최준호는 얼빠진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키에 풍채가 좋은 미하일 초르크가 서 있었다.
“……”
“날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기억하죠. 작년 이맘때에 계약 때문에 봤으니까요.”
“어린아이의 경기를 뭘 그렇게 넋 놓고 보나?”
“저런 경기에서도 배울 것들이 있거든요.”
최준호의 말에 미하일 초르크는 잠시 멍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런 곳에서 뭘 배운다는 거지?’
최준호는 미하일이 무슨 표정을 짓든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자네를 찾아다니느라.”
도르트문트의 전설이자, 아주 오랫동안 구단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초르크 단장이 이렇게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바이아웃이 문제가 되었나요?”
최준호가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자, 초르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녀석을 나이 숫자로만 상대하면 안 돼. 아주 영리한 녀석이야. 자네가 그렇게 가면 그 녀석에게 끌려다닐 수 있어.’
수석 스카우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르크는 담판을 지을 생각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
최준호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하는 초르크를 보고는 빙긋 웃었다.
“그런 이야기는 에이전트를 통해서 하면 좋겠는데. 뭐 여기까지 오셨으니 집에서 커피 한 잔은 대접해 드릴게요.”
최준호는 말을 끝내고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초르크는 손가락으로 경기장 밖을 가리켰다.
“파파라치들이 꽤 집요한 법이거든.”
최준호는 눈을 돌려 카메라를 잡은 기자를 보고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