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the ground RAW novel - Chapter (97)
그라운드를 씹어 먹다-97화(97/184)
097화 전차 군단과 붉은 악마(1)
러시아 카잔.
모스크바에서 800km 떨어진 작은 소도시이다.
이곳은 해로와 육로를 낀 교통 요충지였는데, 18세기에 꽤 많은 독일인이 이주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 중에 이곳에 살던 독일인들은 모든 재산을 뺏기고, 강제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일부 독일인들은 추억을 더듬어 다시 이곳으로 향했다.
카잔에 살고는 있지만,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며 사는 독일인들이 꽤 많았고, 그들은 몸에 독일 국기를 그리고 카잔 아레나를 찾았다.
이곳에 건설된 카잔 아레나는 웸블리 스타디움과 에미리츠 스타디움을 건설한 파퓰러스가 설계를 맡았고, 경기장 외벽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근데, 왜 독일을 응원해야 해?”
토마스는 자신의 볼에 독일 국기를 그려주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우리가 독일 사람이기 때문이지.”
“독일 사람이 왜 러시아에 살아?
“그럼 우리 독일로 갈까?”
“싫어.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어.”
결국 뿌리보다는 함께 지내는 사람들 때문에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빠! 빨리! 족두리! 경기에 늦는단 말이야.”
미나는 자신에게 한복을 입혀주는 어머니를 재촉했다.
“오빠 보러 가야 한단 말이야.”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한국인들은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인과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없는 거친 땅으로 추방을 당하여 대부분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독립 이후 새로 수립된 정부는 살아남은 고려족을 파르티잔(저항군) 한국식으로는 빨치산이라는 오명을 붙이고,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았다.
결국 러시아 영토에 남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은 자신을 고려족이라고 칭하며,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한국이 이겼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니까.”
“독일은 아주 강팀인데?”
“우리한테는 준호 오빠가 있어!”
“어린 여자애가 축구라니.”
“여자가 무슨 상관이야? 축구에는 국경이 없어. 다른 피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뛰잖아.”
“우리 딸? 똑똑하네?”
“헤헤. 늦으면 안 돼.”
사실 이번 경기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 2득점 차이 정도로 패하면 선방한 것이다.
– 독일은 6점 이상 득점을 할 수 있다.
– 한국이 스웨덴과 멕시코를 상대로 선방을 하였지만, 독일은 클래스가 다르다.
– 피지컬에서 밀리는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한국의 방패는 형편없지만, 독일의 창은 예리하다.
피파 랭킹 1위.
더군다나 예선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본선에 올라와서는 단 한 번도 조별 리그에서 떨어진 적이 없는 독일이었다.
**
토마스 뮐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요하임 뢰브를 찾았다.
“몇몇 선수들 상태가 좋지 않아.”
바이에른 유스 출신으로 프로 데뷔 이후 임대 한번 없이 바이에른에서만 뛰고 있는 원 클럽 맨이자 살아있는 레전드.
라움도이터(공간연주자) 라는 새 단어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축구계에서 공간을 활용하는 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한국에서는 토마스 뮐러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서 남성 이름의 대명사인 김철수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였고, 워낙 해괴한 기행을 많이 하고 다녀서 독일 개그맨, 뮐러 미친놈을 합해서 뮐친놈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유럽은 리그가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수들은 짧은 5~6주간의 휴가 동안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어린 선수들은 개인적인 삶에 더 초점을 맞추었고, 요하임 뢰브는 그런 것에 대해서 강압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은 상대하기 힘든 팀이야. 우리보다 동기부여가 확실하다고.”
“그래서 질 거라고 생각해?”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저 망할 놈들은 선발로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아.”
토마스 뮐러가 자신 대신 선발로 기용된 레온 고레츠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요하임 뢰브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선발 기용은 감독의 권한이야. 그걸 넘어서면 곤란해.”
토마스 뮐러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였지만, 감독의 권한을 넘을 수는 없었다.
왜 샬케 04에서 중앙미드필더로 뛰는 녀석을 오른쪽 윙어로 넣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당신 오늘 엿 먹을지도 몰라.”
토마스 뮐러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고, 요하임 뢰브는 큭큭 거리며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서는 토마스 뮐러를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워낙 황당한 짓을 많이 하는 선수라 이제는 아주 익숙해졌으니까.
‘이럴 때 아니면 젊은 선수들의 쓰임새를 알 수가 없지.”
요하임 뢰브는 약팀 한국을 상대로 실험적인 전술들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젊은 얼굴들을 발굴해 내야 2022년 월드컵에서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한 편, 정태용은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 축구협회에서 공식 전문이 왔다. 모든 국민이 염원하는 월드컵 8강에 간다면 정부에서 군 면제 카드를 꺼낼 거라고 하는군.”
스웨덴과 멕시코를 만나서 좋은 경기를 펼친지라 자신감은 이미 충분했고, 그 자신감을 넘어선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강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16강을 통과하면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과는 달랐지만,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선수들은 손을 꾹 움켜쥐었다.
스포츠나 예술, 연구 같은 분야는 신체의 모든 기능이 가장 활발한 젊은 시절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 중요한 시기에 군대에 가서 2~3년을 썩는 것은 천재를 평범하게, 평범함을 멍청함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군 면제를 받고 싶어 했다.
“독일은 세계 최강 팀이다. 하지만 선발 명단을 보니 그들이 매우 방심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독일은 베스트 멤버가 아니었다.
6명을 로테이션으로 돌렸는데, 그건 한국을 그만큼 얕잡아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태용은 고심 끝에 3-5-2 전술을 들고 나왔다.
멕시코 전에서 나와 막판 만세를 부르다가 페널티 킥을 준 김현수를 빼고 송영선을 투입했다.
K 리그에서 <제너럴>이라는 별칭이 붙은 선수인데, 대인 방어와 공중볼 경합을 잘하였고, 스피드와 위치 선정이 좋았다.
독일은 공격하는 순간 4명의 선수가 최전방에서 밀고 들어오기 때문에 진성용 대신 장우영을 투입해서 수비에 좀 더 공을 기울였다.
여기에 공수 양면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최준호를 메수트 외질에게 붙일 생각이었다.
외질은 자로 잰 듯한 정교한 패스 실력과 인간계를 초월한 듯한 초월적인 시야를 가진 선수였지만, 여기저기 다니면 영향력을 발휘하는 플레이 메이커라기보다는 받은 공을 찬스로 연결하는 찬스메이커였기 때문이었다.
‘활동량이 많고 영리한 플레이를 하는 준호라면, 어시스트 줄을 끊을 수 있을 거 같아.’
물론 다른 선수에게도 그런 역할을 맡길 수는 있지만, 메수트 외질을 압박하면서도 독일의 강력한 압박을 뚫고 전방으로 볼을 연결할 수 있는 선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최준호뿐이었다.
“우리는 그 틈을 파고들어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
“헤이. 초이!”
긴장감과 어수선함이 가득한 통로에서 최준호는 독일 진영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11번을 달고 있는 마르코 로이스였다.
독일 스쿼드에서 유일하게 도르트문트 클럽 소속이었고.
당대의 축구 선수 중에서 기술, 스피드, 지능 모든 것을 갖춘 선수를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마르코 로이스를 꼽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축구를 정말 잘하는 선수였다.
최준호도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한다.”
“저도요.”
마르코 로이스는 꽤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선수인데 무척 친근하였고, 최근 들어 10개의 축구 뉴스 중에서 1개는 반드시 차지할 정도로 정말 놀라운 활약을 보이는 선수인데 자신의 클럽이라는 것도 그렇고.
처음 대면인데 16강을 두고 사투를 벌여야 했다.
물론 포지션 상 마주칠 일은 많지 않겠지만.
어떤 유형의 선수라고 단정 짓기 힘들 정도로 아주 독특한 플레이를 하는지라, 다음 시즌 도르트문트에서 그와 호흡을 맞출 생각을 하니 재밌을 것 같기도 하였다.
“다음 시즌 같이 뛸 수 있을까?”
“글쎄요. 구단주에게 물어보세요.”
최준호의 대답에 마르코 로이스는 피식 웃었고, 옆에 있던 골키퍼 노이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건 반칙인데?”
“뭐가?”
“이 녀석 독일어를 엄청나게 잘하잖아? 우리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면 곤란한대?”
토마스 뮐러와 함께 독일팀 미친놈으로 통하는 마누엘 노이어.
“좀 들으면 어때요? 어차피 그쪽이 이길 거라 생각하잖아요?”
“···뭐? 허허헛!”
자신들이 이긴다는 말에 마누엘 노이어가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친구분은 어디에 있어요?”
“친구 누구?”
“토마스 뮐러요.”
“아, 경기 승리 세레머니 준비 때문에 바쁠걸?”
독일 선수들은 그 말에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고,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아는 공자철과 박홍민을 제외한 한국 선수들은 멀뚱멀뚱 보기만 했다.
“그렇군요. 그거 저희가 좀 있다가 빌려 써도 될까요?”
그러자 킥킥거리던 독일 선수들의 입이 순식간에 닫혔다.
다들 굳은 표정으로 최준호를 노려보았고, 최준호는 싸늘한 시선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게 웃음을 지었다.
“저 자식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최준호 옆에 있던 강민재가 물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박홍민이 입을 열었다.
“준호가 재미없는 녀석들에게 한 방 먹였어요.”
강민재가 준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잘했어!”
레온 고레츠카는 벌건 눈으로 최준호를 보면서 가볍게 하품을 했다.
‘그 녀석 말이 맞네.’
사실 그가 밤새도록 엘링 홀란드와 게임을 한 것은··· 게임을 즐기는 차원도 있지만,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할 만큼 조용한 영입 전쟁을 위해서 친분을 쌓기 위함이었다.
‘엘링이 겜돌이 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그리고 그와 대화하면서 최준호에 대한 약점을 얻어낼 수도 있었다.
– 네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오고, 그 녀석이 도르트문트에 남으면 어차피 앙숙 관계잖아? 이참에 적당히 밟아놔야 기어오르지 않는다고.
바이에른 뮌헨 구단에서는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후계자로 엘링 홀란드를 낙점한 상황이었고, 언제든지 최고 연봉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데 티모 베르너 이 자식도 겜돌이 인 줄은 몰랐네.’
레온 고레츠카는 오늘 경기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만큼 전력 차가 확실한 게임이었으니까.
최준호의 말 한마디에 독일 선수들이 싸늘하게 쳐다보자, 한국 선수들도 눈을 부라리며 전투력을 키웠다.
실력이 안 되면 깡이라도 있어야 하는 법.
“형.”
최준호는 박홍민을 불렀다.
“왜?”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뭐···계획 같은 거죠.”
**
‘신기한 일이네.’
최준호는 통로에서 나와 그라운드에 걸어가다가 독일기를 몸에 두르고 있는 어린 소년과 한복을 입은 어린 소녀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적이다!”
“아니야, 우리 팀이야!”
“못해라!”
“죽을래”
하지만 둘이 투닥투닥거리는 모습은 귀엽기만 했다.
최준호는 다시 눈을 돌려 독일의 선수들을 보았다.
여기에 서 있는 한 명 한 명 모두 월드클래스의 선수들이었고, 최고의 클럽에서 핵심 선수였다.
선수의 실력이 어느 정도 이르면, 그때부터 클래스의 수준은 한 발 더 딛을 수 있느냐, 한 번 더 볼 수 있냐, 한 번 더 속일 수 있느냐 작은 차이에서 결정되는 법이었다.
이들은 분명 한국 선수보다 한 발 더 뛸 수 있고, 반 박자 빠르게 패스를 줄 수 있으며,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신들이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신기하게 강팀과 붙을수록 한국 선수들은 한 발자국 더 디딜 수 있고, 반 박자 빠르게 패스를 줄 수 있으며, 몸을 던지는 혼신의 플레이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몸에 밴 DNA인지 문화적인 건지는 모르지만.
‘···당신들은 원래도 졌는데, 오늘도 지게 될 거야. 내가 있으니까 좀 더 많은 점수로 패배하는 게 좋겠어.’
최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기분 좋게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눈을 뜨고는 공 앞에 서 있는 박홍민과 시선을 교류했다.
‘준비됐죠?’
‘물론.’
– 삑!
심판의 휘슬이 올리고 진신이 박홍민에게 공을 전달했다.
독일은 세계 최고의 팀답게 촘촘하게 그물망을 펼치며 라인을 죽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공을 잡고 버틴 박홍민은 독일 선수들이 3명이 달려들자 뒤에 처져 있는 최준호에게 공을 패스했다.
그리고는 한국 진영으로 돌아오는 척하다가 몸을 돌려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박홍민이 최종 수비수를 돌아 뛸 찰나 최준호는 사방에서 덮쳐오는 독일 선수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발끝에만 집중했다.
– 뻥!
메수트 외질이 점프를 뛰었지만, 그의 머리를 넘긴 공이 독일 진영 최종 수비수 뒷공간에 뚝 떨어졌고, 그 공을 향해서 박홍민이 미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라인 브레이킹!’
마누엘 노이어가 깜짝 놀라 뛰어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