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0)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0화(10/300)
10화 영웅의 등장은 항상 늦다 (1)
오늘 아침, 갑작스레 학원장 메디아가 기숙사 사감을 통해 나를 호출했다. 처음엔 떨떠름했으나, 사감 교관 말로는 입학생 수석과 학원장의 독대는 아카데미의 관례란다.
학원장의 집무실 문 앞.
나는 옷매무시를 한번 정리하고 문을 두드렸다.
똑― 똑―
“학원장님, 저 강검마입니다.”
-어, 들어와.
문 너머로 들려오는 고혹적인 목소리.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책과 두루마리 따위로 여백 없이 채워진 큰 책상. 옆으로도 고서적들이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었다.
책상 뒤로 나 있는 창은 오색 빛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었다. 은은한 조명이 고풍스러우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유하자면 아카데미 도서관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좀 많이 더러운.
“어머, 우리 검마 살이 많이 빠졌네! 이젠 완전히 애티가 다 벗겨졌다, 얘.”
“…….”
“잠시만. 옷 좀 마저 입고 이야기하자.”
메디아는 상박까지 흘러내린 로브를 뒤늦게 걷어 올리고 있었다. 내가 분명 노크도 하고 들어가겠다는 말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참 속이 훤히 내보이는 여자다, 여러 의미로. 겉과 속이 너무 같아 더 대하기 힘든 부류의 인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올까요?”
“아니, 무슨 소리! 나 이래 봬도 바쁜 여자야!”
옷고름도 고의로 헐겁게 맸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께가 보일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내가 시선을 떨구자 메디아는 뭐가 신났는지 이죽거리며 로브의 단추를 끝까지 메웠다. 투명한 살이 옷 사이로 비칠 때마다 어제 도서관에서 본 빨간 잡지가 머릿속을 휘감았다.
“뭐 좀 마실래? 녹차, 커피, 홍차 등등 교내 마트에서 파는 음료류는 거의 다 있어.”
메디아는 기분 좋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서 냉장고 문을 열며 말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교내 마트의 살인적인 물가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수돗물을 마시기 시작한 지 어언 이틀. 염치 따위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줄 때 받아먹는 게 도리일 것이다.
“저, 그럼 녹차 히야시된 걸로 주세요.”
“응, 뭐?”
옛날 입버릇이 나오자 메디아는 빠르게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옅은 당혹감이 빠르게 스쳤다.
“시원한 걸로 달라는 거지?”
“아, 네.”
메디아는 살짝 미소 지으며 녹차 페트병 하나를 던지듯 건네준 후 마주 앉아 다리를 꼬았다. 눌린 허벅지 살이 도발적이었다.
“어린애가 히야시가 뭐니, 히야시가. 검마, 너 알고 보면 알맹이는 아저씨거나 그런 거 아니야?”
“풉―!”
그 말에 사레가 들려 녹차를 그대로 뿜어 버렸다. 메디아의 로브 끝이 살짝 젖었다.
“어휴, 얘도 참. 천천히 마셔, 천천히. 누가 안 뺏어 먹으니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 옆에 와서 앉아 등을 살살 두드리며 옷소매로 입가를 닦아 줬다. 나는 슬쩍 그녀를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나이가 일흔만 아니면 좋았을 텐데.’
나는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볍게 고갯짓했다. 감사의 의미였다.
그러자 메디아의 얼굴에 기분 좋은 호가 그려졌다.
“아카데미 생활은 좀 어때?”
“…음, 뭐… 그럭저럭.”
솔직히 녹록지는 않지만, 쉽지 않은 배려를 베풀어 준 그녀에게 ‘아뇨? 아카데미 개좆같던데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근데 교내 마트 물가는 원래 그렇게 비싼가요? 뭔, 물 한 통이 만원이나…….”
내 말에 자지러지며 깔깔대며 웃는 메디아.
웃어? 서민이 웃겨?
그렇게 한참을 눈물까지 흘리며 배 잡고 웃던 메디아가 진정이 좀 됐는지,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향긋한 홍차 향이 코끝을 스쳤다.
“미안, 미안. 검마 네가 웬 주부 같은 말투로 말하는 게 너무 귀엽고 웃겨서 그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그녀는 차를 한 번 더 후릅거리고서 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치? 교내 마트 더럽게 비싸지? 나도 거기서 뭐 좀 사려고 하면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니까?”
“학원장님이?”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메디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보탰다.
“이 자리, 말만 학원장이지. 박봉에 복지도 별로야. 말 그대로 명예직이지, 뭐. 전대 학원장이 떠넘겨서 역임하고 있긴 한데, 나도 빨리 저 책상에서 탈출 좀 하고 싶어.”
메디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는지 소리가 멎었다.
노을빛이 비쳐 빛무리가 진 그녀의 옆태는 아벨과는 다른 조숙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잠시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에 헤실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왜? 너무 예뻐서, 넋 놓고 보게 돼? 아니면 우리 둘이 같이 확~ 아카데미에서 도망가 버릴까?”
‘개꿀인데?’
메디아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아카데미에서 도망만 갈 수 있다면 앞으로 세워 놓았던 귀찮은 플랜들을 이행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내가 침을 꿀꺽이며 진지한 표정을 짓자 메디아는 싱긋 웃으며 선 고운 검지로 내 이마를 짚었다.
“우리 검마 귀엽네. 근데 아직은 안 돼. 검마 네가 좀 더 크면 모르겠는데, 넌 지금 학생이고 난 선생이잖아. 졸업하고 생각하자.”
메디아는 재밌다는 듯 킥킥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반대로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건넨다.
“자, 이거 검마 너 써.”
“이게 뭡니까?”
“교직원 할인 카드인데, 어차피 난 장 잘 안 봐서 별로 쓸모가 없거든. 할인가로 비교해 보면 학원 외부 물가랑 얼추 비슷할 거야.”
“이런 거 학생한테 함부로 주셔도 되나요?”
“학생이 배를 곯는다는데, 교육자로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원래 수석 특혜란 게 있어.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오히려 너무 늦게 준 거 같아서 내가 다 미안하네.”
나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평소라면 앙큼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사랑스러웠다. 나이쯤은 허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기쁜 기색으로 입술을 파르르 떨자, 메디아는 미소를 유지한 채 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일정이 좀 잡혀 있어서 말이야. 일요일인데 시간 내 줘서 고마워! 언제든지 상담할 거 있으면 바로 찾아왕!”
그렇게 내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 문 앞에 선 순간, 메디아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아, 맞다. 잡지는 재밌었어?”
“…….”
“흐흐, 우리 검마도 남자더라? 실물로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렴?”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현자 메디아.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여자였다.
* * *
생각했던 것보다 아카데미 생활은 평온하고 잔잔하게 흘러갔다.
교실 내에서 클로이와 마주치는 게 두려워 일부러 시선을 피했었는데, 어느새 친구를 사귀었는지 그녀는 반에 잘 녹아들었다. 가끔 나와 눈을 마주칠 때도 있었는데, 특유의 ‘히익’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마다 클로이가 새로 사귄 친구들은 내 쪽을 차갑게 흘겨봤다.
뭐, 나야 특진생이다 보니 무시 섞인 무감정한 시선들도 이제 그러려니 한다.
클래스 내에 특진생이 나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수가 원체 적기도 하고, 뭐 때문인지 서로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일종의 특진생으로서의 자격지심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상위 클래스를 택하지 않고 랑 클래스를 고집한 과거의 내가 대견했다. 지금쯤이면 성(星)과 용(龍) 클래스에서는 학생들이 서로를 재단해 파벌을 형성하고, 정치적 암투를 잔뜩 벌이고 있을 시즌이니까.
기적의 가호 플레이 당시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하게 물어뜯는데, 이곳의 현지인이 된 지금 그 반에 편성됐다면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려서 고독한 아싸 생활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은근 살 만하단 말이지.’
메디아가 준 교직원용 할인 카드 덕분에 전반적인 삶의 질도 올라갔다. 비록 풍족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균형이 잡힌 식사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하루에 세 번 학원장 집무실 방향으로 절을 해도 모자랄 정도의 보은이었다.
또한 신체 구석구석까지 영양이 돌다 보니 단련의 성과가 날이 갈수록 눈에 띄었다. 성장기라 그런지 먹는 대로 근육이 붙고, 자는 대로 키가 커 가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기분만은 아닌지, 교복 바지 품이 입학 전과 비교해 봐도 확연히 짧아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자각은 없었는데 나는 학생으로서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아침 조례 구보와 훈련도 나름 꾸준히 참여하고, 이론 수업도 꾸역꾸역 좇으려 노력했다.
지금까지는 좋았다. 짧은 기간이나마 메인 시나리오에 악영향을 끼칠 만한 거취를 남기지도, 눈에 띄지도 않았다. 교관들도 암묵적으로 내가 수석 입학생이라는 걸 모르는 척해 주는 눈치였고.
이 상태를 3년간 꾸준히 유지만 한다면 내가 그리던 고무적인 미래에 도달할 것만 같아 고취됐다.
“아직은 말이지…….”
내가 턱을 괸 채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클래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하더니 학생들이 두세 명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물론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기에 짧은 쉬는 시간 동안 낮잠을 청하기로 했다. 피로가 몰려올 때마다 쪽잠으로 해소해 줘야 강의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오후에 있을 이론 수업은 아카데미의 설립 과정에 얽힌 역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지만, 대략적인 서사를 알고 있는 내겐 덧없는 과목이었다.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단잠의 동반자로 삼을 교과서를 신중하게 선별했다.
‘역사서는 각이 져서 너무 딱딱하고, 이 책은 표지에 낙서를 너무 해서 얼굴에 자국 남을 것 같고…….’
그때.
– ‘와, 쟤가 걔야?’
– ‘대박, 진짜 잘생겼다.’
– ‘우리 클래스에는 안 오겠지?’
– ‘에이, 빼박 성(星) 클래스지.’
복도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일층 커졌다. 어쩐지 학생들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듯했다. 굳이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베개 선별 작업을 하던 중. 원인 모를 위화감이 가슴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오늘이 며칠이지?’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2034년 5월 5일」
‘설마?’
나는 다급하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미 나와 있던 학생들의 이목이 쏠린 곳을 찾았다.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나는 인파의 틈바구니를 헤치며 앞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스치기라도 하면 경멸 어린 시선이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괘념치 않았다.
그렇게 인파를 한참이나 헤집고서야 맨 앞 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고른 후,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껄렁한 인상착의의 여학생한테 물었다.
“혹시 오늘 누구 왔어?”
“기분 나쁘니까 말 걸지 말아줄래?”
내 명찰 색을 흘기고서 말도 섞기 싫다는 듯한 표정으로 맹금 같은 눈빛을 보낸다.
“뒤지기 싫으면, 대답해.”
눈을 치켜떠 살짝 겁박하자, 흠칫 놀란 표정으로 눈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곧이어 내 고개도 저절로 자석에 이끌리듯 그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멍한 표정으로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왔구나.”
이 세계의 주인공.
레온 반 라인하르트.
그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