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0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07화(107/300)
107화 숙청의 밤 (6)
시간이란 상대적이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말이다.
사실 먹물 냄새와는 거리가 있던 나인지라 속뜻은 잘 모른다.
다만, 꼭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나는 저 말을 체험한 경험이 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대다수의 남자 역시나.
그 왜, 국방부의 시계는 느리게 흐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같은 시간이라도 처한 상황에 따라서 길게도 짧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요컨대, 지금이 딱 그렇지 않을까.
내게 허용된 시간은 대략 8초.
이것도 넉넉히 잡아 저 정도지 8초 아래일 확률이 높다.
뇌 속에 타이머를 심어 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어림잡아 7초에서 8초로 잡아야 한다.’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원래라면 하품 한 번 하고 입까지 두드리면 끝날 찰나 중의 찰나다.
하지만 생과 사를 결정지을 급박한 지금이라면.
코앞에 그토록 죽이고 싶던 두 놈이 있는 지금이라면.
검신의 가호가 발현되는 지금이라면.
짧기 그지없는 8초 안에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터다.
이렇게 사담을 주절거리는 당장에도, 0.000001초도 흐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머리를 차갑게 진정시켰다.
낭비하는 시간을 없애려면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교수가 마법을 시전했던 그 장면을 복기했다.
뭉쳐진 공기 폭탄과 시전자를 잇는 마력으로 엮인 실선.
손가락을 튀기는 것이 기폭의 신호겠지.
물론 저 녀석이 폭탄 마법만 캐스팅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여태까지 꽤 많은 빌런들을 상대하고 느꼈던 위화감이 있다.
마인이었던 머메이드는 같은 수 속성이라도 다채롭게 마법을 구사했던 반면, 빌런들은 한 가지의 마법만 펼쳤었다.
태생 자체는 인간인 빌런이다. 군단장에게 마력을 부여받았다 한들, 마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 하나로 제한되는 게 아닐까.
우연의 일치라 치부할 수 있으나, 만나는 놈들마다 그랬으니. 정황은 확실하다.
나는 교수를 응시했다.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저 녀석은 공기 폭탄만 캐스팅할 것이다.
파훼는 조금 전 해 보였다. 그 여파로 교수가 돌처럼 굳어 있는 것이니.
‘…그래도 골치 아프네.’
녀석이 시전 타이밍에 살짝만 변칙을 줘도 당하고, 반대로 붉은 선을 자르는 게 늦어져도 당한다.
까다롭고 위협적이다.
속도전에 특화된 알’타이르나 녹스. 두 사람조차 피하기 힘들 정도로 캐스팅도 짧고, 광범위하다.
나는 돌연 피식 조소했다.
‘뭔, 쓸데없는 걱정을.’
변칙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베어 버린다.
인지하지 못하게끔 압도적인 신속으로 짓밟는다면 맥을 못 출 것이다.
‘평소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숨을 잘게 끊어 불필요한 호흡을 줄이고, 한 걸음을 넓게 밟아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내린 판단을 바로 행동으로 치환했다.
여기서 더 머리를 굴려 봤자 묘수가 뾰족해지지도 않는다. 그럴 바엔 발을 굴린다. 속으론 숫자를 세면서.
‘8초.’
타닥!
발바닥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멈췄던 시간이 그제야 유동했다.
“……!”
좌우로 요동치는 교수의 동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다리에 부하를 좀 더 걸었을 뿐인데, 한달음에 가까이 도달했다.
교수의 손가락이 한 번 꿈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난 [전이의 가호]를 발현시켰다. 곧바로 [검신의 가호]로 벼려진 감각권을 바닥을 매질 삼아 흩뿌렸다.
일순 주변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기시감이 드는 풍경이다.
입학 첫날에 가호를 발현했을 무렵과 비슷했다.
인위적으로 꿈틀거리는 대기가 측면에서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교수 저 새끼, 얼굴은 잔뜩 쫄아선, 그 와중에 사각에서 허를 찌른다.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다.
‘7초.’
진각을 밟았다. 관성으로 앞으로 쏠리려던 허리에 힘을 주어 세운다.
투두둑.
근육 여기저기가 비명을 내질렀다.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이빨을 깨물어 참았다.
잠깐의 엄살은 죽음과 직결된다.
탁-, 교수가 손가락을 튀겼다. 마력 줄기가 흘러나오더니 반투명한 선을 타고 공기 폭탄을 향해 내달렸다.
‘5초.’
팔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이대로면 즉사.
그 순간, 팔이 뇌를 거치지 않고 움직였다.
쉬식!
노끈을 붙잡은 오른손이 무라사메를 쏘아 냈다. 무의식이 투척한 것임에도 칼날의 궤적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칼날이 빛을 뿜으며 칠흑을 뚫고 연달아 공기 구체에 그어진 붉은 선을 파고들었다.
-팡!
터지기 일보 직전에 산산이 박살 나 버리는 투명한 구체.
충격파가 일어 기류가 한 차례 꿀렁거렸다.
“이런 제기랄,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교수가 욕지기를 지껄였다. 적잖이 당황했는지 눈빛이 흐릿했다. 어째 등장 당시 포스는 최종 보스면서 반응은 잡졸이다.
그가 허둥지둥 손가락을 연신 튀겼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수많은 투명한 구체들이 떠오른다.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 마법들을 남은 ‘3초’ 안에 전부 베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시선을 적에게 두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재빨리 전방으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무리하게 캐스팅한 건지 교수의 눈구멍에서 핏물이 뚝뚝 흘렀다. 그는 당황에 찬 얼굴로 돌연 눈가를 비볐다.
한 틈의 빈 동작. 그것이 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것임을 직감했다.
무라사메의 노끈을 꽉 움켜잡고 손목을 까딱였다.
휘리리리리릭-
공중을 부유하던 사시미가 채찍처럼 기상천외한 궤적을 그리며 모든 마법을 훑고 지나갔다.
칼의 흔들림이 노끈을 타고 손끝에 또렷이 남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싱싱하고 자유분방한 검로였다. 칼날이 빛을 끌며 허공을 누볐다.
팡, 팡, 팡, 팡, 팡-!
연달아서 폭발성이 울렸다. 장내를 빼곡히 메꾸던 공기 폭탄들이 무정하게 터져 나갔다. 대기 중에 파문이 일고, 열풍이 불었다.
이윽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던 벽과 기둥들이 폭삭 가라앉았다. 돈 냄새가 풀풀 나던 별채가 완전히 폐가가 되는 순간이었다.
““……!””
공방을 지켜보던 알’타이르와 녹스의 표정에 만감이 교차했다.
3초 남짓에 대뜸 아수라장이 연출되니 저들로선 뭐가 뭔지 모를 만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두 사람이 다리를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디토레의 실력이 미덥지 않은 건 아니지만, 괜히 어쭙잖게 손을 보태려 했다간 동선이 꼬인다.
그리고 원래 진정한 멋은 솔플이다.
“…아, 아니 어떻게.”
교수가 목소리를 떨었다. 저자의 눈에 이 현상은 논리를 아득히 벗어난 것일 터.
나는 끊어지고 부서졌던 종아리에 용력을 돋워 냈다. 턱뼈가 후들거리는 화끈한 통증이 발끝부터 치솟았다.
아픔을 토해 내는 대신 바닥을 박차며 뛰어나갔다. 조금 전보다 맹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발이 바닥에서 살짝 붕 뜨더니 몸체가 앞쪽으로, 쇄도했다. 가공할 속도에 공기가 찢기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시식.
나는 교수의 뒤편을 밟았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려는 그.
그러나 체공 시간이 달라진 내겐 너무나 굼떠 보였다.
홀로 다른 세상에 서 있는 느낌이다. 나는 짧게 웃었다.
‘다른 세상.’
그 낱말이 가슴 깊게 와닿았다. 다른 의미긴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 여유를 부릴 수 있을 정도로 난 강해졌다.
팔을 휘두르기 전, 주마등처럼 근래의 일들이 스쳤다.
나를 음해하고 죽이려던 녀석들이 눈앞에 있다.
하물며, 종국에는 나를 믿고 따라 주는 부원들마저 이 개새끼들의 흉계에 엮여 다쳤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눈자위에 핏발이 맺히는 걸 느꼈다.
교수가 고개를 반쯤 돌렸다. 지금까지도 동작 하나하나가 느릿했다.
녀석의 옆얼굴엔 공포를 제외한 감정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축였다. 숨을 깊게 들이켜자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원반 던지는 사람처럼 허리를 시계 방향으로 쭉 말았다. 이내 옆구리가 뻑뻑하게 조여진다.
꾸구극- 근육이 접히는 소리와 동시에 상체를 반시계 방향으로 비틀었다. 두 손에 들린 쌍수의 궤적이 매끈한 만월 형상을 그렸다.
사라라라락
회전력이 실린 칼이 경쾌한 소리를 끌며 살점에 닿았다.
서―걱―!
새파란 날붙이가 광대뼈를 부드럽게 지나 반대로 빠져나왔다. 측면의 시야로 바라보던 교수의 동공이 동그랗게 열린다.
베였다는 사실이 아직 뇌로 전달되지 않은 모양.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1초.”
툭.
데미안은 죽는 순간까지 눈꺼풀을 닫지 못했다.
* * *
“…허.”
한참을 침묵하던 알’타이르가 이내 헛숨을 뱉었다.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생각을 골라 봤지만, 옅은 신음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등골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뿜어내 옷을 축축이 적셨다.
노인은 문득 옆을 힐긋 쳐다봤다.
생각보다 담담한 녹스의 얼굴. 물론 놀람도 번져 있었지만 크게 당황한 자신보단 기색이 차분했다.
“…녹스, 넌 생각보다 태연하구나.”
“아, 아닙니다, 당주님.”
칭찬에 녹스는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그리곤 작게 한숨지으며 눈을 도로 앞으로 돌렸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엔 강검마가 있었다.
녹스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잣말하듯 당주에게 말을 뱉었다.
“당주님이 놀라셨는데, 제가 안 놀랐을까요. 그저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을 뿐입니다.”
“…익숙해졌다니, 뭐가 말이냐?”
녹스가 말을 잠깐 끊고는, 전투의 흔적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아수라장에 틈틈이 새겨진 검상들과 자욱한 피비린내.
잊고 싶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녹스는 옅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어 말했다.
“들으셨겠지만 학기 초에 저는 저 녀석의 칼질을 몸소 받아 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괜한 치기에 제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천한 놈이라며 녀석을 도발했었습니다.”
“…….”
“가문에선 천재라 불렸던 저인데, 저 녀석에 티끌만큼의 상처 하나 못 입혔습니다. 대련 후에도 너무 분해 몇 날 며칠을 이를 갈았는지 모릅니다.”
가문의 일원 중에서도 유독 흉금을 터놓지 않는 녹스. 그에 알’타이르는 내심 놀랐지만, 묵묵히 손주의 말을 받아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겠더군요. 클로이가 왜 저 녀석에게 꼭 붙어 있는지. 물론… 당장이라도 떼어 놓고 싶긴 합니다. 그렇지만 클로이, 그 녀석 워낙 고집이 센 녀석이지 않습니까. 좀 독특한 면도 있고요. 그 점이 귀엽지만.”
귀엽다는 말에 알’타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금 공허한 눈으로 칼부림하던 손녀의 모습이 스쳤다. 암살자로서 참으로 기껍고 어여쁠 수밖에. 돌잡이 때 단도를 쥐었던 클로이였다.
알’타이르는 옛 기억에 잠기려다 이내 퍼뜩 정신을 깨웠다. 공방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고, 손자와 진지한 대화 중이었다.
알’타이르는 다시 녹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 이해한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인자한 반응에 녹스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었다.
“…클로이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강검마 저 녀석 하나가 아디토레 가문 전체보다 강하다고. 처음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치부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검마는 제가 봐 왔던 그 누구보다 현격히 강하며 뛰어납니다.”
녹스의 동공에 총기가 스쳐 지나갔다. 깜깜하고 탁했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그 강함을 옳게 쓰는 법을 아는 것. 그게 클로이가 저 자식에게 감화된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녹스.”
알’타이르는 다음 말을 가늠했다. 녹스는 그런 당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주님께서 제게 누차 강조하셨던 말이 있습니다. 가문의 업을 중시하되, 신념이 확고하다면 그것을 따르라.”
“…….”
“저는 강검마 저 자식의 그림자가 되려 합니다.”
알’타이르는 녹스를 쳐다봤다. 어느덧 애티가 벗겨지고 신념이 깃든 손자의 얼굴. 돌연 노인이 손자에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
녹스는 즉답했다. 알’타이르는 허허 웃으면서 턱수염을 쓸어 만졌다. 손자의 성장을 기껍지 않아 할 할아버지는 없으니까.
대화가 끝나자 앞쪽에서 신음 비슷한 옅은 절규가 들려왔다.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푹 떨군 채, 클라디가 어깨를 달달 떨고 있었다.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일더니.
스릉- 스릉-!
각자의 무장을 빼 들었다.
암살과 더불어 고문 역시 아디토레의 가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