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0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09화(109/300)
109화 1학기의 끝 (2)
한밤의 소동이 끝나자마자 나는 바로 별채를 빠져나왔다.
검제와 학원장이 할 말이 있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 왔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그런 내 심중을 읽었는지 그들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뒷수습은 일단 자신들이 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원로 중 한 명이 죽은 대사건인 만큼 후처리가 중요할 것이다. 그래도 별채에 즐비한 빌런들의 수급과 아디토레에서 확보한 증거가 있기에.
큰 파란이 있을지언정, 남은 원로나 귀족들은 쉬이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잘못 이빨을 털었다간 자칫 본인들의 목도 위태로울 테니까.
기숙사 건물에 다다른 난 학원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웨폰에게 문자를 남겼다. 골자는 별 탈 없이 끝났다는 내용.
웨폰은 ‘들어가서 푹 쉬어라.’라는 내용으로 짧게 답장했다.
사건의 경위에 관해 궁금한 게 넘쳐 날 테지만 녀석은 그 어떠한 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내가 무사하다는 것만 알면 됐다는 속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여러모로 유약하긴 해도 참 속 깊은 친구다.
나는 설핏 웃으며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온몸이 근질거리고 찝찝했다.
‘들어가자마자 씻자.’
좀 전까지 먼지 밭을 구른 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러 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를 풍기기도 했고.
기숙사 방에 도착한 난 옷매무시를 확인했다.
자각 못 하고 있었는데, 누렇고 빨갛게 염색된 윗옷과 여기저기 찢긴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쯧.”
안 그래도 비싼 교복인데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버렸다. 얼룩 좀 진 거라면 세탁소에 맡기면 되겠지만, 이 정도면 새 옷을 장만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호아킨 아카데미 교복은 중고 매물이 없다. 이 옷을 착의하는 자체가 권위이며 신분의 증명이니까.
실제로 입장이 까다로운 던전들도, 호아킨 아카데미 교복만 입고 있으면 절차가 간소해진다.
찢기고 발겨지니 안 사실이지만 새삼 편리한 옷이긴 했다, 가격이 더럽게 비싸서 그렇지.
여벌로 한 벌이 더 있지만 무더운 여름을 나기엔 어림도 없다. 그래도 타이밍이 좋은 건, 내일이 방학식이라는 점이다.
하물며 학내에 잠입했던 빌런 전부를 척결했다. 그들을 소집한 데미안 교수 본인 등판했으니 아마 전부가 맞을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주축이 사라졌으니 자취를 감추고 도망쳤겠지.
“후우…….”
한숨을 푹 내쉬며, 훌렁훌렁 벗은 옷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이어서 씻기 전,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잡티 하나 없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찌든 피로에 퀭한 눈과 먼젓번보다 더 새어 버린 머리카락.
얼굴선과 인상도 전에 비해 훨씬 날카로워졌다.
너무나도 많이 변해 버린 외모. 날이 갈수록 급변하는 얼굴에 돌연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얼굴 변한 게 문제가 아니지.”
외모가 조숙하고 잘생겨진 게 무슨 상관인가.
그보다 훨씬 크게 변해 버린 건, 나라는 사람 자체인 것을.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칼자루와 맞닿는 부분은 거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전생에도 이랬기에 마냥 낯설진 않았다.
다만, 이 굳은살이 생긴 일련의 과정이 달랐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전생에는 굳은살을 내려다보며 생선을 써는 나 자신의 성장을 확인했다. 손이 거칠어질수록 뿌듯함과 쾌감을 느꼈다. 당시에 난 그것을 일종의 훈장으로서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가. 이 굳은살은 수많은 생명을 해하며 얻은 것이다.
후회는 전혀 없다. 내가 베어 왔던 놈들은 전부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없앴다고 밤잠을 설칠 만큼 심약한 성정도 아니다.
그렇다면 불쾌감이 몰려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순했다. 적을 해하는 칼질을 할 때, 손속에 터럭만큼의 감정도 담지 않았으니까.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아공간 내에서 동년배 상대로 오금을 떨던 나인데.
지금은 그냥 사시미부터 휘두른다. 일말의 머뭇거림도, 망설임도 없이.
처음엔 검신의 가호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오늘 일을 겪고 생각을 고쳤다.
물론 검신의 가호의 영향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이 몸의 본 성정이리라.
상념이 그쪽으로 기울었다. 위화감과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내가 빙의한 몸체인 강검마는 누구인가. 나를 보살펴 주시던 이 세계의 부모님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마당이다.
애초에 한낱 소시민이었던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유는 뭐지? 불가해한 존재의 노략질이겠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며, 전달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도 없이 이어진다.
“…….”
그렇게 한참을 고뇌에 빠져 있자니 씻으러 들어왔다는 걸 까먹었다.
곧 뺨을 짝짝 때리고서 얼굴이 알싸할 정도로 마른세수했다. 전에 말했듯 정신을 차리려 할 때의 습관이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너무 정신없이 달려오기만 했어.”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때마침 방학.
원래라면 방학 동안 부지런히 던전을 돌아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조금 선회하기로 했다.
계속해서 자신을 내몬다면 같은 상황의 반복일 것이다.
나타나는 적을 베고, 자르고, 또 썰고.
그랬다간 정말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 같았기에 한 박자 쉬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부원들도 본향으로 돌아갈 것이고, 나 혼자서 던전을 돌기란 무리였다.
짧게 숨을 끊어 내쉬자 복잡한 속도 차분해지고, 상념도 추슬러졌다.
샤워 물을 틀었다. 높은 수압의 물줄기들이 얼굴을 때렸다.
개운함을 느끼며 오물을 닦아 냈다. 피와 땀, 피로가 뒤엉켜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클래스는 웅성거리는 소리로 꽉 채워졌다.
“넌 방학 때 어디로 가기로 했어?”
“글쎄, 파파 마마랑 집에서 보낼 거 같은데. 너는?”
“나는 가족들이랑 하와이에 있는 별장에서 휴가 보내기로 했지롱~ 시간 나면 너도 놀러 와!”
“오, 진짜? 갈래, 갈래!”
한껏 들떠 있는 클래스의 분위기. 그럴 만한 게, 내일부터 방학이다.
한 학기 동안 빡빡하기 그지없는 학업 과정을 이수하고, 비로소 주어진 휴식이다. 저토록 맑고 밝은 얼굴들을 하는 게 당연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도 좀 붕 뜨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생엔 며칠 이상 쉬어 본 기억이 없었다. 열일곱에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장기간의 휴식이 내겐 생경하면서 설렜다. 뭐… 그렇다고 해도 기숙사 방에 처박혀 있겠지만.
이곳 부모님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마당에, 본가를 어떻게 방문하겠나. 짐작건대 그 주소는 말소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면 다른 가족이 살고 있든가.
괜한 불상사를 만들 바엔 그냥 아늑한 기숙사에서 뒹굴뒹굴하자. 내키면 틈틈이 신체 단련도 하고, 도서관에서 정보 수집도 하면서.
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침울함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클로이. 떠들썩한 교실 안에서 홀로 침울한 기색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려다 말았다. 생각해 보니 어젯밤 아디토레의 일원들 다수가 전사했다.
클로이가 아무리 가문을 싫어한다 해도, 피붙이의 죽음은 당연히 슬플 터다.
괜히 말을 꺼내기보단 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내는 게 맞겠지.
그때 클로이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학 동안 검마 군이랑 떨어져 있기 싫은데…….”
“…….”
곧바로 보내려던 위로를 철회했다. 닭살이 돋는 섬찟함이 솟아올랐다.
가족의 죽음보다 나랑 떨어져 있는 게 싫다니. 저 정도면 뇌 회로가 잘못되다 한참 잘못된 게 아닐까.
역시 얀데레 소녀의 사고방식은 나 같은 일반인이 감히 이해할 수준이 아니다.
‘클로이는 진짜다.’
나는 시선을 왼 방향으로 틀었다.
료조가 입술을 댓발 내민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팔자로 잔뜩 좁혀진 눈썹이 도드라져 보였다.
‘…얜 또 왜 이래?’
클로이와 다른 의미로 근심이 가득 서린 얼굴이다. 어째 내 양옆에 앉은 두 사람만이 달떠 잇는 장내와 정반대의 기운을 뿜고 있다.
료조, 얘도 클로이에 못지않게 안색이 어둡다. 정확히는, 표정이 썩어 가고 있었다. 방학을 맞이하는 청춘이라곤 도저히 안 보일 정도로.
그것도 맨날 낮잠을 청하는 료조가 말이다. 얘가 가장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방학이 그렇게 싫나?’
참고로, 료조는 어제부로 아카데미 부속 병원을 퇴원했다.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기도 했고, 추가적 치료는 본국에 가서 받기로 했다나.
‘하긴, 그만한 검상을 입었는데 며칠 입원했다고 나을 린 없지.’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며 보고 있자 료조와 시선이 마주쳤다.
료조의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고개를 홱 돌려 버린다. 그리곤 시선을 저 멀리에 두고서 툭 말을 뱉었다.
“너, 너는 방학 동안 뭐 할 거야?”
“…딱히 계획은 없는데. 그냥 아카데미 안에나 있으려고.”
“뭐!? 한 달 동안 내리 아카데미에만 있는다고?”
그 말에 료조는 퍼뜩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겹치자 민망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눈동자만 살짝 들어 나를 쳐다봤다.
옹알옹알하는 료조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갈 데도 없어.”
“…그, 렇구나.”
대꾸에 당혹감이 뚝뚝 묻어났다. 무어라 해야 할지 반응을 고르는 것 같았다. 눈치가 빠른 그녀다.
내 가정사가 평범치 않은 것이라 짐짓 추측한 것이겠지. 근데 실제로 범상친 않았다.
‘가족이 있었는데 없어졌으니까.’
료조의 눈알이 빙글빙글 굴러다녔다.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할지 숙고 중인 모습에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료조, 너도 방학 잘 보내고 와.”
“……!”
그러자 료조의 얼굴이 가일층 달아올랐다.
…얘 상태가 왜 이래? 웨폰 말대로 진짜 PTSD라도 온 건가? 그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료조가 이런다고?
내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찰나, 이원빈과 검제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급작스러운 검제의 출두에 생도들의 면면에 흥분감이 퍼졌다. 칠성 영웅을 은퇴한 이래 처음으로 출석한 것이었다.
짐작건대, 은퇴 건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이다. 그의 등장에 클래스는 웅성거림을 넘어 시끌벅적해졌다.
“조용! 조용!”
이원빈이 손바닥으로 교탁을 내리쳤다. 방학 직전의 생도들은 고삐가 풀렸는지 좀처럼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에 한 학기를 같이 지지고 볶았다. 생도들은 이원빈을 학기 초에 비해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원빈이 오 분가량 호통성을 친 후에야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는 진이 쭉 빠진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들뜬 건 알겠지만, 너희들은 호아킨 아카데미의 생도다. 제발 부탁이니까, 밖에선 품위를 좀 지켜라. 너희들의 행동거지에 따라 아카데미의 평판이 결정지어지니 말이다.”
“네에-!”
입을 모아 우렁차게 답하는 생도들. 그제야 이원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휴, 대답 하나만큼은 호아킨 아카데미의 생도들 같구나. 아무튼, 지침 요령은 이메일로 보내 놨으니 길게 말하진 않으마. 언제나 행동거지와 마음가짐 조심하고, 어엿해진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라. 이상이다.”
말을 끝마친 이원빈이 물러나며 검제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방금까지 열띠던 분위기가 일순 가라앉았다. 짐짓 긴장한 기색들.
검제의 등장도 등장이겠지만, 혹여 교장 선생님의 훈시처럼 길어지진 않을까, 그런 걱정들이 엿보였다. 왜냐하면 다들 얼른 집에 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으니까.
꼰대로 유명한 검제다.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지루한 훈시가 시작될 것이다. 누군가 침을 꼴깍 삼켰다.
검제는 면면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이 잠깐 내 쪽에서 멈추다 곧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꼰대들이나 혀가 긴 법이니 짧게 말하겠다. 다음 학기에는 성장한 그대들을 보기를 고대하며, 마치겠다.”
절도 있게 말을 끊어 내는 검제. 그의 탈꼰대적인 말에 생도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나도 잘못 놀랐다. 꼰대의 표상인 검제다. 그런 그가, 이토록 담백한 훈화를 한다니. 혀가 내둘러졌다.
생도들이 빠릿빠릿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다.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우르르 빠져나갔다.
전부 나가는 걸 확인할 심산인지 이원빈과 검제는 자리를 지켰다.
한순간에 휑해진 클래스. 이윽고 클로이가 핼쑥한 얼굴로 말했다.
“…검마 군도 방학 잘 보내세요.”
“클로이, 너도.”
“…네에.”
클로이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애써 무시할까 했지만, 그래도 방학인데 힘을 북돋아 주기로 했다.
“더 성장한 네 모습 기대하고 있을게. 그러니까 방학 잘 보내고 와.”
그리 말하자 클로이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료조는 아직도 신통치 못한 표정이었다. 뭐라 말해 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정신 상담은 의사가 할 일이지 내 영역이 아니니까.
클로이는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료조는 터덜터덜 문 쪽을 향했다.
‘나도 돌아가서 좀 쉬자.’
짐을 챙겨 일어나려던 순간, 돌연 검제가 다가왔다.
‘…아, 맞다.’
어제 이 양반 내게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 그럼 설마 생도들이 다 나가길 기다린 것도 이 때문인가?
바투 가까워진 검제가 나를 쳐다보다 이내 입을 뗐다.
“방학 동안 따로 세워 둔 계획은 있나?”
“……?”
잠깐 귀를 의심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별안간에 방학 계획을 묻는다고?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운을 떼는 건가?
뇌리에 여러 의문이 어려 가는 가운데, 검제가 빤히 나를 응시했다. 저 눈빛 어째 익숙하다.
횟집에서 일하면서 종종 본, 대답을 종용하는 꼰대의 눈이었다. 탈꼰대 발언을 한 지 십 분도 안 되지 않았나?
나는 잡념을 꾹꾹 눌러 담으며 대답했다.
“그냥 아카데미에서 훈련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군.”
간결한 말이 돌아오고 잠시 찬 바람이 둘 사이에 불었다.
어색해 죽을 것 같은 적막이 스몄다.
슬쩍 발을 떼려고 하자 검제가 툭 내뱉듯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
“……?”
뜬금없는 제안에 벙쪄 버렸다.
되묻기도 전, 검제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