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13)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13화(113/300)
113화 캐슬 시구르드의 일상
스위스에 도착하고 나흘이 흘렀다.
니벨룽가에서의 일과는 이러하다.
새벽 5시 기상.
수탉이 목청을 훑기 전, 냉수마찰로 몸을 헹궈 졸음기를 쫓아낸다. 찬물인 까닭은 낡은 배관 탓에 온수가 안 나온단다.
건물이 오래됐으니, 이해했다.
6시부터는 아침 식사다.
끼니는 호밀빵이나 치즈로 간단히 요기한다.
귀족치곤 단출한 상차림이지만, 그러려니 한다.
모든 귀족이 화사하게 먹는 건 아닐 테고, 얼추 검제는 짠돌이라는 걸 깨달은 참이다.
아침 식사 후, 7시.
땔감으로 쓸 장작을 팬다. 나와 아벨이 격일로 돌아가면서.
혹자는 궁금할 것이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8월에 무슨 땔감이냐고.
그 말엔 나도 동의한다, ‘대한민국’ 한정으로.
그러나 이곳, 캐슬 시구르드의 위치는 알프스산맥 바로 아래다.
늦여름임에도 산맥의 봉우리에는 만년설이 하얀 베일처럼 깔려 있다. 그 말은즉― 사시사철 뼈가 시리도록 춥다는 것이다.
하여 한국의 온돌이 없는 이곳은, 장작으로 화로의 불씨를 돋운다. 옛적, 아궁이에 불 때듯이.
새삼 한국 난방 시스템의 선진성을 말 그대로 피부로 느끼고 있다.
‘가을도 안 왔는데 이렇게 추우면, 여기 사는 사람들은 겨울을 어떻게 나는 거지……?’
덧붙이자면, 니벨룽가에는 고용인이 단 두 명뿐이다.
구성원은 중년의 남집사와 젊은 여성 메이드.
집사의 이름은 카론.
딱 집사다운 인상착의라 해야 하나. 아마, 상상하는 그 모습의 중년 집사일 것이다. 외눈 안경 집사라는 클리셰까지. 완벽했다.
역할은 캐슬 시구르드의 총관리직.
식품 자재, 요리, 정원 관리, 시설 정비, 손님 접대 등. 대부분을 그가 담당한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일을 잘하는 집사. 그런 카론의 첫인상은 묵언 수행 하는 도인 같았다.
최소한의 발언. 질문에 대답은 고갯짓. 과묵한 집사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어 메이드 샤일. 보브컷이 잘 어울리는 대단한 미인으로, 집사 카인이 하는 일 이외의 것들을 도맡는다.
이를테면 청소, 빨래, 들짐승 사냥, 치안, 방범.
특이점이라면 허벅지에 쇠꼬챙이가 엮인 홀스터를 착용하는 것 정도?
그녀의 범상치 않음에, 도착 첫날 아벨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 샤일? 나 어렸을 때부터 돌봐 주던 메이드긴 한데, 나이는 엄청 젊어. 우리보다 네 살 더 많으니까, 스물한 살 정도 됐겠네. …근데 샤일은 왜……? 거, 검마… 너 서, 설마 샤일도?!
라며 아벨은 돌연 역정을 냈다.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반응이 이리 과민하다니.
얼핏 듣기론 서구권에선 사적인 정보를 묻는 건 큰 결례라는 말도 있으니까.
고용주인 아벨로선 불쾌할 만도 하다.
아무튼.
샤일은 태도는 시크했으나, 기실은 친절했다. 말없이 챙겨 줄 거 챙겨 주는 스타일.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기도 전에 문 앞에 대령한 다음.
―똑똑똑, 노크 세 번으로 알린 뒤, 떠났다. 바로 문을 열어도 그녀는 금세 사라졌다.
감사를 표할 말미를 안 주려는 듯 인기척의 잔향만을 남겼다, 마치 유령처럼.
아디토레만큼은 아니지만 샤일의 기척 차단과 발재간도 심상치 않았다.
‘풍기는 아우라가 보통이 아닌 것도 그렇고. 그리고 보통 메이드가 들짐승 사냥이나 치안 방범도 담당했었나……?’
하기야, 니벨룽의 구성원이니 무력은 기본적으로 지녔겠지.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진 모르겠지만.
집사 카론과 메이드 샤일.
나흘 동안 지켜본 두 사람의 일 처리는 기민하고 정확하다.
고작 둘뿐임에도 이 성이 깔끔하게 유지되니 말이다.
하지만 초인에 가깝게 일을 아무리 잘한들, 결국 손은 한 쌍씩이다.
꼴랑 둘로는 손이 미치는 범위에 한계가 있다.
‘명실상부 최고 귀족의 저택 고용인이 이리 적으니, 원.’
짐작건대, 검제 지크프리트 특유의 마이웨이적 히키코모리 성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는 강박적으로 사람 많은 걸 싫어했다.
따라서 카론과 샤일의 담당 업무 외의 나머지 일에는 나, 아벨 할 거 없이 손을 보탠다.
이를테면, 장작 패기나 이따금 장보기가 그러하다.
여기까지는 다 괜찮다. 어차피 밥값은 할 생각이었기에, 머슴짓 정돈 각오하고 왔다.
눈칫밥이란 게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축내면 그게 더 가시방석이다.
‘사람이 염치가 있지.’
게다가 나만이 아니라, 아벨과 검제도 함께하니 억울함도 불만도 없다.
이런 것쯤이야 열일곱부터 사회에서 구른 나로선, 허드렛일 축에도 끼지 않는다.
지금까진, 만족스러운 나날이었다.
찌든 미세 먼지에서 벗어나 청명한 공기로 호흡하니 폐도 세척됐다.
무엇보다 눈이 즐겁다. 눈동자만 굴리면 이곳저곳이 절경이다. 일견 스위스가 왜 살기 좋은 국가로 꼽히는지 알만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과가 있는데―
* * *
성채 지하, 검제의 개인 훈련실.
으슥한 분위기와 질식할 것 같은 적막이 맞물려 내려앉았다.
“…….”
너무 조용해 귓구멍에 이명이 맴돌 지경이다.
이곳에서 뭘 하냐고? 검제랑 사이좋게 가부좌를 틀고 명상 중이다.
그것도― 이 짓거리를 아침 먹고, 네 시간째 하고 있다.
무릎은 저리다 못해 감각이 마비됐고, 등허리가 잘게 경련한다.
오른 눈을 가늘게 떠 옆을 힐긋 했다.
준엄하게 명상 중인 검제. 그는 네 시간 전과 같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였다.
나는 가만히 검제를 바라보다 곧 작게 한숨 지었다.
숨 막히는 고요 속에 숨소리가 메아리를 만들었다.
‘스위스까지 와서 하는 게 고작 명상이라니.’
내가 이러고 있는,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검제가 나를 스위스에 데려온 첫 번째 이유에 있다.
‘칠성 승계를 위해 훈련과 수양을 지도해 준다 했지.’
몇십 년을 인류 최강 타이틀에 군림한 검제의 개인 지도다.
남이 들으면 입이 떡 벌어질 파격적인 특전이다.
그리고 같은 칼잡이로서, 나보다 칼 밥을 더 먹은 선배로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내심 기대했다.
훌륭한 스승이 주는 가르침의 값짐은, 첫 스승님에게 배웠으니까.
하여, 그 내용들을 내심 기대했었는데…….
실상은 날마다 검제와 정좌한 채, 명상을 하는 것이다.
점심 먹기 전까지, 무려 네 시간을.
이 점에 대한 검제의 말은 이러하다.
― 자네 가호의 근간 자체는 완성된 상태일 걸세. 다만, 그 힘이 너무 강대하고 원초적이라 쉬이 다룰 수 없지. 이 상황에 무력의 증대는 쓸모없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가호를 본인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 우선이지. 이곳에서 지내는 첫 주는 그것을 위해 보낼 걸세.
설명을 요약하자면, 날것에 가까운 ‘검신의 가호’를 「명상」으로 깎고 다듬는 것.
취지 자체는 좋다. 아니, 옳다고 할 수 있다.
내재한 잠재성은 충분하니, 그걸 명상으로 조절한다는 것이니. 다만…….
“으―”
잇새로 절로 신음이 새었다. 검제가 눈을 다문 채 일축해 버렸다.
“엄살 부리지 말게. 오늘내일하는 나도 이런데, 젊은이가 그래서야 쓰겠나.”
“…예.”
“조금만 참게. 삼십 분만 더 하면 되네.”
“…….”
‘삼십 분을 더 해야 한다고?’
속으로 탄식했다. 너무 고통스럽다.
가부좌를 몇 시간씩 틀고 있으니, 도가니가 마모되는 게 느껴진다.
삭신이 쑤시고, 골반도 달달 떨려 차가운 돌바닥에 맞닿은 엉덩이가 달싹인다.
‘아, 미친. 쥐 왔어.’
스스로와의 대화는커녕, 이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기엔, 검제가 옆에서 너무 굳게 버티고 있다.
일흔의 노인이 미동 없이 있으니, 어린 내가 투정 부릴 수 있겠는가.
똑―똑―
두 번의 노크 소리가 훈련실의 적막을 일깨웠다.
검제의 두 눈이 나직이 뜨였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문 쪽을 향했다.
나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검제의 싸늘한 눈총에 도로 가부좌를 유지했다.
거짓 좀 보태서, 검신의 가호 첫 발현 때만큼 괴롭다.
검제가 문을 열어 주었다.
―끼익
낡슨 경첩이 맞물리는 소음의 틈새엔 집사 카론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엔 적잖은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평상시 무표정과는 명백히 달랐다.
“저, 검제님. 귀 좀 빌리겠습니다.”
카론이 검제에게 자그맣게 속닥였다. 무슨 일인지 의문이 어렸지만, 시선을 거두었다.
저리 작게 말하는 이유는 필시 사적인 이야기일 터. 외부인인 내가 관심을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장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하반신에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단전 아래가 허하다. 마비감이 완전히 하체를 장악해 버렸다. 어떻게 일어나지……? 힘이 안 들어가는데?
―그 순간.
“뭐?! 리차, 그 미친 자식이!?”
이맛살을 구긴 검제가 버럭 고함쳤다. 지엄한 모습만 봐 왔던 나로선,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저- 당주님. 뒤편에 강검마 님께서 계십니다.”
“아, 흠흠. 잠시 흥분했군.”
검제는 헛기침하며 어조를 누그러트렸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멀거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곧 검제가 뱉었던 이름을 곱씹었다.
‘…리차.’
성(姓)은 빠뜨렸지만, 그자가 누군지 쉽게 짐작했다.
이 세계에서 그 이름을 쓰는 인물. 검제를 저리 노하게 하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으니.
레이첼의 큰아버지이자 칠성의 한 석을 꿰차고 있는 거인.
창성(槍聖) 리차 드 뮈라.
위상은 검제에게 다소 밀리나, 완력 하나는 견줄 자가 없다는 평이 돌았다. 부족한 기술을 힘으로 커버 친다는 논리였다.
정권 한 번에 B급 마수 정돈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진단다.
소문만 들으면 인간의 탈을 쓴 사자라던데. 게임상으로도 본 적 없는 인물인지라, 진위 여부는 잘 모른다.
다만, 저런 소문이 돌만큼 육체적인 완성도는 칠성 영웅 중 제일일 것이다.
‘근데 창성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검제가 카론에게 말했다.
“난 잠시 급한 용무가 생겨 다녀오지. 저녁, 혹은 조금 더 늦게 들어올 수도 있네. 그러니 식사는 애들 먼저 시키도록.”
“네, 당주님.”
그리 말하곤 검제는 급히 훈련실을 떠났다.
지하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무렵,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카론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게슴츠레한 눈이 더 낮게 깔렸다.
“아직 15분 남았습니다.”
“…….”
“검마 님.”
피식- 나는 자약하게 웃었다.
이어 곧바로 등을 곧게 세웠다. 완연한 정좌 자세.
그제야 카론은 고개를 끄덕인다.
융통성 없는 건, 고용인이나 집사나 똑 닮았다.
…젠장.
* * *
“끄응…….”
이빨 사이로 앓는 소리가 절로 흘렀다. 무려, 나흘간 다리를 꼬아 대니 장기마저 꼬이는 느낌이다.
점심도 걸렀다. 배는 고픈데 공복감 이상으로 다리가 저리고 아팠다.
침대보에 풀썩 등을 묻었다. 눈에 보이는 건 낯선 천장이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자니, 불현듯 뇌리가 번뜩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스위스면 그 던전이랑 가깝잖아.”
상체가 벌떡 튀어 올랐다. 곧이어 캐리어를 열어젖힌 뒤, 무라사메를 꺼내 잡았다.
반쯤 벗겨진 칼날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미소가 걸린다.
“마침 운이 좋네.”
그냥저냥 훈련만 하다 보냈을 방학에 목적이 깃들었다.
다만, 그 던전에 입장하기 위해선 사전 준비와 파티원이 필수 불가결하다.
“최소 세 명이 입장 조건이었지…….”
입장 조건뿐 아니라 방비도 확실해야 한다.
가는 길목도 험준하고, 무엇보다 숨은 공간에 있을 그 마수…….
마음 같아선 발도 딛고 싶지 않다만, 어쩌겠는가.
무장 강화를 최우선으로 두었으니, 울며 겨자를 먹어야지.
‘세계관에 몇 개 없는 마석 중 하나가 있는 곳이니…….’
근심 섞인 침음성을 흘리고 있을 때.
똑― 똑― 똑―
늘 그렇듯, 세 번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가 보네.”
메이드 샤일인가 싶어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해 봤자 돌아오는 대답도 없었다.
똑― 똑― 똑―
그러나 또다시 노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뜻하지 못한 사람이 쭈뼛쭈뼛 서 있었다.
“…뭐야? 네가 왜 왔어?”
아벨이었다. 그녀는 품 안에 윤기가 흐르는 모포를 안고 있었다.
“도, 돌려줄 것도 있고.”
“……?”
아벨은 눈동자만 살짝 들어 올렸다. 눈썹 사이에서 금안이 찬연히 반짝였다.
“할 이야기도 좀 있어서…….”
아벨이 옆머리를 귓바퀴 뒤로 넘기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