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1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14화(114/300)
114화 창성 리차 드 뮈라 (1)
―또각, 또각
고즈넉한 복도에 구둣발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의 발원은 아벨이었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강검마가 머무는 방 쪽을 향해서.
‘돌려주려면 할아버지가 나가신 지금밖에 없을 테니까.’
할아버지는 좀처럼 외출하지 않으신다. 말씀하시기를, 어여쁜 손녀인 자신과 멀어지기 싫다고 하셨지만…….
그냥 귀찮아서 그러시는 거란 걸, 아벨은 알고 있었다.
물론 손녀인 그녀를 사랑하는 건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조금 과할 정도로.
강검마가 캐슬 시구르드에 머무른 지 어느덧 나흘째다. 하지만 그와 대화할 타이밍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손녀딸 바보인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는 ‘남녀칠세부동석’을 강론하셨다. 한국의 오랜 격언이라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짐짓 남자를 멀리하라는 의미로 그녀는 이해했다.
돌연 검제의 첨언이 떠올랐다.
― 아가, 남자를 믿어선 안 된단다. 특히나, 혈기 왕성한 십 대일수록 조심해야 하며, 여자를 밝히는 남자는 더더욱 피해야 한단다.
“에이~, 할아버지도 참 언제까지 저를 아이로 볼 거예요! 제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서요?! 어련히 알아서 한다고요!”
― 허허, 알지 알다마다. 뉘 집 귀한 손녀인데 어련할까! 하지만 아벨, 기억하거라. 가장 위험한 것들은 저런 노골적인 부류가 아니야.
“그럼 어떤……?”
― 의도 없이 선의를 베푸는 남자란다.
“네? 선의를 베푸는 사람이 왜 가장 위험해요?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아요? …아니면, 속에 무슨 생각을 품을지 모르니 경계해라……. 이런 뜻인가요?”
당시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설레설레 고개 저었다.
― 이유 없는 무분별한 선의는 오해를 낳는단다. 그렇게 되면, 주변에 저절로 사람이 꼬이기 마련이야. 개중에는 물론 이성도 포함되지. 그러나 선의를 베푼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른단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소위 ‘넌·씨·눈’이라고 불린다더구나.
“아…….”
할아버지의 입에서 넌씨눈이란 단어가 튀어나올 줄이야. 반문하려 했지만, 그의 뿌듯한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그저 애매하게 터득한 지식의 위험성을, 아벨은 머리에 새겼다.
― 하지만 아가, 걱정하지 말거라. 이 할애비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한, 우리 아벨한테는 남자들이 얼씬도 못 할 테니.
대화의 마무리로, 할아버지는 못 박듯 엄포했다.
― 음- 혹시 네가 이 할애비보다 강한 남자를 데려오면 모를 일이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 싶구나. 알다시피 할애비는 최강이잖니, 하하하!
아벨은 쓰게 웃었다. 자신보다 강한 인물이 아니면 연애는 꿈도 꾸지 말라던 할아버지의 쐐기.
‘연애라……. 뭐, 어차피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얘기지.’
그럴 시간에 칼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낫다. 그리 생각하며 아벨은 토끼 모포를 꼭 끌어안았다.
아발론 섬에서 강검마가 덮어 주고 갔던 모포. 아벨의 섬세한 손질 덕에 모에선 빛이 흘렀다.
아벨은 작게 웃으며 털을 쓸어내렸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피었다.
‘그래도 돌려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아벨은 그리 되뇌며 걸음을 이어 나갔다. …근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가장’ 위험한 부류―
‘의도 없이 선의를 베푸는 남자…….’
―강검마 아니야?
혈기 왕성한 십 대, 사람 구분 없이 선의를 베풀고, 누군가를 몸을 던져 구하며, 주변에 이성이 시도 때도 없이 꼬여 대는 인물.
모든 것이, ‘강검마’라는 한 사람에 딱- 부합한다.
특히나, 눈치가 더럽게 없다는 것도!
아벨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떨구어졌다. 그동안 이불 대용으로 잘 써 왔던 이것 역시. 강검마의 선의의 증거 중 하나다.
“…….”
돌연 그녀의 양 볼이 심통으로 부풀려졌다. 하나, 곧바로 소강되는 감정들. 아벨은 이마를 감싸며 폭 한숨지었다.
“나는 또 왜 이런다니…….”
유치했다.
이런 자잘한 것에 정신 산만해하는 자신이.
강검마와 한 지붕 아래 머문다는 걸로 우월감을 느끼는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강검마가 미웠다.
많이는 아니고… 아주 쪼금?
잡념에 잠겨 계속 걷다 보니.
어느덧 강검마가 투숙하는 방문 앞에 다다랐다.
아벨 본인의 집이다. 그런데 낯설었다.
노크하기가 머뭇거려진다.
‘그냥 돌아갈까?’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집을 비우는 게 예삿날은 아니기에.
“후우-.”
아벨은 기나긴 숨을 토해 낸 뒤.
똑― 똑― 똑―
세 번 문을 두드렸다.
“…….”
돌아온 반응은 무시였다. 누군지 궁금해서 열어 줄 법도 한데, 깔끔한 무시였다.
잠깐 얼을 타는 아벨. 이어 곧 머리를 흔들었다.
‘나를 샤일이라고 생각하나 보네.’
아벨은 흠흠-, 헛기침하며 다시 노크했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쿵쿵, 노면을 밟는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그 짧은 찰나에, 아벨은 옷매무시를 훑었다.
윗옷에 잡힌 주름 한 줄, 바로 다듬었다.
―벌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아벨은 팟, 몸이 굳었다.
그녀는 눈만 빼꼼 들어, 강검마를 올려다보았다.
나흘 만에 가까이서 보는 얼굴에 크나큰 반가움을 느꼈다.
그를 빤히 쳐다봤다. 눈치 없는 심장이 안에서 갈비뼈를 두드렸다.
잠깐의 적막. 강검마가 입을 열었다.
“…뭐야? 네가 왜 왔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아벨이 흠칫했다.
‘그래, 이불 전해 주러 왔잖아. 이것만 넘기고 가면 돼.’
그런 내면의 목소리를 입안에 머금고서, 이윽고 입술을 뗐다.
“도, 돌려줄 것도 있고.”
“……?”
“할 이야기도 좀 있어서…….”
입이 다짐과 달리 멋대로 움직였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 * *
갑작스러운 아벨의 노크에 놀라기도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길래 일단은 안에 들였다. …근데.
“…….”
비유가 아니라, 정말 숨 막힐 듯 어색한 공기다. 검제와 명상할 때 그 이상으로.
아벨은 침대에 살포시 걸터앉은 채, 천장 귀퉁이에 눈을 고정했다.
그렇게 30초.
그녀는 맞물린 손가락을 꼬물거리기만 했다.
멀뚱멀뚱. 이대로라면 이 적막이 끝날 기미가 안 보여, 내가 먼저 입을 뗐다.
“돌려줄 거라는 게 뭐야?”
아벨의 머리 위에 떠 오르는 느낌표.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이, 이거. 돌려주려고 왔어.”
“아- 그거.”
아벨의 품 안에 갈무리된 도톰한 모포.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무인도 생존 훈련 때, 내가 손수 무두질한 토끼 모포였다. 존재 자체를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리 보니 꽤 반가웠다.
털도 반질반질하게 관리를 잘해 준 모양이다. 나는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까먹고 있었는데, 고맙다.”
“으, 응.”
“그건 그렇고, 뭐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에 아벨의 어깨가 떨렸다. 이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굴렸다. 무언가 말을 고르는 듯한 기색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내일 오후에 시간 괜찮으면, 나랑 어디 좀 같이 가 줄래?”
“어디?”
갸웃거리며 되묻자 아벨이 발끈했다.
“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내일 시간 돼, 안 돼?!”
“…오전에만 명상하고, 오후에는 원래 일정 없었어.”
아벨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목덜미를 긁으며 이어 말했다.
“시간 돼.”
“……!”
순금빛 동공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시간 된다는 게 그리 놀랄 일인가? 하기야, 그녀는 내가 종일 검제랑 치고받고 훈련하는 줄 알 터. 지하 방에 틀어박혀 명상한다곤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 명상만 하다간 하반신 마비가 올 테니까, 좀 걸어야지.’
그녀가 물었다.
“그럼 내일 몇 시에 나갈래?”
“모처럼인데 네 시쯤 가서 저녁도 먹고 오는 게 어때? 스위스까지 왔는데, 외식 한 번은 해 보고 싶은데.”
아벨의 얼굴이 환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 그러자 그럼. 마침, 제네바시에 유명한 초밥집이 생겼다더라고.”
스위스까지 와서 초밥집은 좀……. 이왕 왔는데, 현지 음식을 먹어 보고 가야지.
“초밥집 말고 스위스 맛집 이런 곳은 없어?”
“응? 왜? 초밥 싫어해?”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동아리 부원들이랑 먹은 지 얼마 안 됐거든. 안 그래도 물가도 비싼데, 먹을 거면 다양하게 먹고 싶어서.”
“부원들이면… 사. 키?”
아벨은 료조의 성씨를 토막 내 말했다. 잔뜩 좁혀진 눈썹과 싸늘한 어조로.
‘…둘이 사이 안 좋나?’
아카데미 생활 어언 4개월이다. 여생도들 사이에서 간혹 친하다가도 틀어진 관계를 더러 봐 왔다.
어쩌면 료조가 랑 클래스로 재배정을 신청한 건, 그런 까닭이 아닐까. 꽤 아다리가 맞는 추론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걔랑 만은 아니고. 스피드 웨폰이랑 클로이도 같이 갔었어.”
“…클로이라면 그 빨간 머리 여자애?”
“어, 맞아. 클로이나 나나 생선 좋아하는 식성이 비슷하기도 해서, 초밥집을 갔던 거거든.”
“…….”
아벨의 표정이 가일층 딱딱해졌다. 무언가 심기를 건드린 모양인데……. 모태 솔로인 나로선 소녀의 심리를 알 리가 없었다.
“흥.”
새초롬한 콧소리. 아벨이 모포를 내게 건네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던졌다.
성큼 문 쪽으로 걸어간 그녀는 고개를 반만 돌렸다.
“아무튼, 내일 시간 맞춰서 정문으로 나와.”
아벨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누그러지긴 했지만, 언성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쾅!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문짝. 나는 그 방향을 멀거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아직도 쟤랑은 좀 어색하네. 첫 만남이 그래서 그런가……”
한숨을 내쉬었다. 토해진 숨결에 토끼털이 윤기를 흘렸다.
재차 느끼는 거지만, 관리를 참 잘해 준 모양이다.
피식- 웃음이 새었다.
* * *
같은 시각, 스위스 대통령의 관저.
“으… 언제쯤 오시려나.”
한 사내가 집무실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의 이름은 알레인, 비서실장이자 대통령 게인즈의 최측근이었다.
알레인은 손톱으로 손목시계를 연신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조바심이 맺혀 있었다.
저벅, 저벅.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알레인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검제님! 와 주셨군요.”
“인사치레는 됐고, 상황 설명부터.”
“…보고 받으신 그대로입니다. 별안간 그분이 오셔서, 검제님이 데려오신 분이 누구냐며 대통령님께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검제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 반응에 알레인은 손사래를 치며 냉큼 말을 덧붙였다.
“하, 하지만 대통령님께선 함구하셨습니다. 멱살을 잡히셔도, 셔츠 단추가 뜯기셔도, 웃으시며 절대 입을 안 여셨죠. 그러자 그분께서 ‘니벨룽은 두렵고, 뮈라는 만만한 것이냐!’라면서 역정을 내시고 그다음이…….”
알레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검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설명은 그 정도면 충분하네. 다음은 내가 맡지.”
“이런 일에 연루되는 걸 싫어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사람아, 자네들이 내 편의를 얼마나 봐주었는데 어찌 그리 섭하게 말하나? 내가 왔으니 걱정 말게.”
알레인이 작게 흐느꼈다. 한번 흘깃한 검제는 표정을 굳힌 뒤,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경첩이 맞물리는 소음. 곧바로 문틈 새에서 투기(鬪氣)가 해일처럼 덮친다. 일대 자체를 깔아뭉개는 듯한 어마무시한 압력이었다.
“허-.”
안쪽은 더 장관이었다.
타원형의 원탁을 중앙에 두고서, 양옆으로 주르륵 도열한 장정들.
연방 총리, 각처의 장관들, 상원 의원장, 하원 의원장. 그들 자체만으로 정치 수반이었다. 한데…….
“끄으으으윽.”
그들은 바닥에 정수리를 심고 엉덩이를 쳐올려, 몸으로 세모꼴을 그렸다. 이른바, ‘원산 폭격’이라 불리는 행위였다.
“…….”
검제는 눈을 치떠 원탁의 끝을 직시했다.
턱을 괸 채, 창대를 움켜잡고 있는 대장부.
한없이 거만하다. 하나, 그 점이 저놈의 상징성이니.
창성, 리차 드 뮈라.
백수의 왕과도 같은 얼굴과 우악스러운 근육을 몸에 둘렀다.
창성이 이를 드러내며 검제를 반겼다.
“오랜만이군, 니벨룽. 거의 십 년만 아닌가.”
검제는 칼자루를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이 무슨 작태지. 그리고 우리가 언제부터 살갑게 인사나 주고받던 사이었나?”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돌연 광소를 터뜨리는 창성. 그가 입매를 귀밑까지 끌어 올렸다.
“팔 하나 잃고 오더니 화끈해졌군. 예전에는 하도 점잔 빼서 계집애 같았는데 말이야.”
“…….”
검제의 관자놀이에 용오름이 일었다.
저벅.
검제가 집무실로 발을 내디뎠다.
“나이를 처먹더니 리차, 네놈이야말로 아낙네들처럼 혀가 길어졌구나.”
기이이잉.
이어 칼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