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2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21화(121/300)
121화 폭풍전야
우리는 금세 제네바 역사에 도착했다.
“오…….”
근세 유럽풍이 물씬 나는 조각상과 시계탑이 조화로이 어우러진 외경. 정문 앞의 분수마저 범상치 않았다.
실내에 들어서자 내 눈이 또 한 번 동그랗게 뜨였다.
21세기 현대임에도 엔틱한 내경에 시대상에 착각이 일 정도이니.
“얼른 와!”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던 내게 아벨이 손짓했다.
아벨은 오늘도 여러 치장 품으로 얼굴을 꽁꽁 싸맨 상태였다. 그녀가 손목시계를 두드리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더 구경하라고 하고 싶은데. 기차 시간이 얼마 없어서. 일단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아벨의 뒤를 따랐다.
앞장서 걷는 샤일은 능숙하게 푯말을 보며, 승강장을 찾아냈다. 시니어(선배)란 말 그대로 그녀의 경험은 요긴했다.
샤일의 인솔 덕에 우리 일행은 늦지 않게 열차에 올랐다.
탑승과 동시에 시선이 반사적으로 들어 올려졌다.
【VVIP 특실】
저가 항공이었던 일전과는 판이한 객실의 수준.
간단한 스낵바와 음주 코너, 구획마다 보장되는 프라이버시. 소파, 침대, TV까지 최고품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열차의 선미 칸은 귀족 전용.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그 화려함에 혀가 내둘러진다.
한편으로는 이 부조리한 사회에 회의감도 밀려왔다.
신분과 계급, 게임상에선 무심결에 지나친 설정을 맞닥뜨리니 영 유쾌하지 않았다. 되레 불만이 솟는 걸 느꼈다.
‘…뭐, 그래도 지금 그 덕을 보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
【3호실】
심홍색과 금색으로 채워진 내부.
시선을 차장 쪽으로 돌렸다. 자갈밭 위에 도열 된 철도와 탁 트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호실에 들어선 난 창가 쪽에 자리 잡았다.
맞은편에 아벨과 샤일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도착까진 6시간 정도 걸릴 테니, 두 분은 주무시고 계시면 제가 깨워 드리겠습니다.”
샤일이 말했다. 그에 아벨은 가볍게 입을 두드렸다.
속눈썹은 이미 동공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럼 부탁할게, 샤일. 잠을 얼마 못 자서 졸리긴 하네.”
곧 눈을 깜빡이던 아벨은 샤일에게 살포시 기댔다.
샤일은 말없이 웃으며 아벨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잠시 뒤, 아벨의 두 눈이 나직이 닫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하긴 밤새도록 검을 휘둘렀으니 안 피곤한 게 비정상이다.
아벨의 달밤 수련은 동녘이 떠올라서야 끝났다.
파공성에 뜨문뜨문 잠에서 깼던지라 나는 알고 있었다.
“…….”
창틀에 팔을 괸 채 지그시 아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병아리처럼 새근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슬쩍 틀자 샤일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술에 맑스그레한 호선이 그려졌다.
“자리 바꿔드릴까요?”
“…….”
나는 고개를 창 쪽으로 휙 비틀었다. 샤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샤일은 무릎에 손을 포개 올렸다. 다소곳한 자세로 그녀도 차경(借景)을 감상했다.
―치이이이익
돌연 기차 엔진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덜그럭- 바퀴와 철근이 천천히 맞물리는 소리.
기차 굴뚝에서 출발을 알리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 * *
열차가 4시간 즈음 달렸을 무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녘부터 빈속인지라 배가 몹시 주렸다.
스낵바에서 간단히 뭐라도 사 올 생각이다. 경비 전반을 니벨룽에서 대 주는지라 구매에 대한 부담도 없었기에.
나는 샤일에게 말했다.
“저 스낵바 좀 다녀올게요.”
가만히 창밖을 보던 샤일의 시선이 내게 넘어왔다.
그녀의 표정이 잠시 흐릿해지더니 이내 자그맣게 입을 뗐다.
“음, 가시는 걸 말릴 생각은 없지만……. 쉽게 추천은 못 드리겠네요.”
“……?”
샤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폭 한숨 흘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VIP 칸이다 보니 손님 전부 귀족들이거든요. 뭐, 검마 님도 아시다시피 그분들의 성정이 참…….”
“쓰레기죠.”
내 뇌까림에 샤일의 눈이 번뜩 뜨였다.
곧이어 샤일의 눈길이 반사적으로 아벨을 향했다. 다행스럽게 아벨은 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흠흠.”
샤일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했다. 그녀는 안색을 정돈하고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러이러하여서 저는 개인적으로 추천해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아니면 아벨 아가씨를 깨워서 같이 가시는 게 어떨까요?”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벨이 잠이 부족한 까닭을 아는 유일한 이로써, 저 꽃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던 개도 깨우면 사람을 문다. 하물며 항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아벨을 불시에 깨운다면?
속눈썹이 열림과 동시에 대뜸 날붙이가 날아올 것이다.
‘인제 와서 귀족 새끼들한테 쪼는 것도 우습지.’
애당초 신분 갖고 무어라 지껄이는 귀족들이 병신이다.
길바닥에 똥이 있으면 내가 피할 이유는 하등 없다.
똥이 절로 피하든가 치우고 지나간다. 청결의 첨단인 주방에 있던 내 성미상, 더러운 건 못 참는다.
다만 무턱대고 계도를 칼침으로 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람이 생선도 아니고.
‘그렇다기엔 여태껏 너무 많이 베어 넘겼지만.’
나는 목덜미를 긁고서 문고리를 쥐었다.
―끼이익.
문을 밀면서 샤일에게 물었다.
“뭐, 마실 거라도 사다 드릴까요?”
* * *
“…휴.”
황망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샤일이 이내 관자놀이를 짚었다.
만류에도 스낵바로 향한 강검마. 샤일은 그런 그가 염려스러웠다.
당연히 신변의 걱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를 걱정하는 게 맞지 싶었다.
‘아무도 검마 님을 건드리면 안 될 텐데…….’
그는 작은 하마다. 평소엔 점잖지만, 건드리면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는 야수의 심장이다.
그를 도발했던 자들의 끝을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안다.
‘패악의 쌍둥이, 아디토레의 천재, 철각…….’
하나같이 쟁쟁한 이름. 한때 천재라고 불렸던 대단한 재능들이다.
그러나 결국엔 강검마의 회칼에 전부 토막이 났다.
‘궤를 달리하는 천재라…….’
근데 그런 걸 전부 차치하더라도, 어떻게 귀족에게 그리 거침없을 수 있는 거지?
샤일의 상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행보였다.
물론 그 점에 샤일도 후련함을 느꼈지만, 이해와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컸다.
강검마는 계급적 존중이 희미한 소년이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떨어진 사람처럼.
귀족이 아닌 빈곤한 이들에게 사이다를 선사하는 생도. 작금에 검마 님은 일약 스타였다.
그의 평은 나날이 치솟고 있었다. 거기다 흑발에 흑채라는 독보적인 아이덴티티까지.
포털 등지에선 강검마에게 「지니어스 킬러」, 「천외천(天外天)」, 「말보다 빠른 사시미」 등의 관용어를 덧붙였다.
일각에선 「사시미단」을 자처하는 시류도 일 정도로.
기자들이 강검마의 귀추에 눈을 부라리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특히 미국 에이전시에서 강검마를 호시탐탐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상식인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시비 걸 일은 없겠지만…….’
귀족의 태반은 그 속이 썩어 문드러진 작자들이다. 샤일 역시 특진생이었기에 여실히 통감했다.
그들의 선민사상은 이따금 상식을 벗어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같잖은 자존심을 내세워 자신의 입지를 확인코자 한다.
구태여 호랑이 아가리에 손을 넣어 보려는 우둔한 계층.
그런 치들이 귀족이다. 그리고 검마 님은 그 후진적인 원숭이 소굴로 제 발로 걸어갔다.
까딱하면 폭력 사태로 번질진대…….
샤일은 골몰했다. 그저 여기서 아무 일 없기를 빌든가, 아니면 검마 님을 쫓든가.
후자를 선택하면 당연히 샤일에게 의탁한 아가씨께서 깨신다. 검마 님은 굳이 그 점을 염두에 두고서 혼자 가셨는데.
머릿속에서 좌우로 휘청거리는 천칭. 짧은 상념 끝에 샤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결심으로 굳어졌다.
‘늦었지만 가 봐야 해.’
이 파티에서 샤일의 역할은 인솔자다.
무탈하게 던전을 클리어한 뒤, 복귀한다. 그게 그녀의 책무였다.
부디 이 걱정이 기우이길 바라며 샤일은 아벨의 어깨를 살포시 붙잡았다.
그녀는 미약하게 죄책감을 느꼈다. 하나, 위기감이 그 감정을 뒤덮었다. 그렇게 아가씨를 깨우려던 때였다.
벌컥.
3호실의 문이 열렸다. 한순간 샤일의 시선이 멍해졌다.
“……?”
강검마가 육포를 씹으며 들어왔다.
옆구리에 과자나 껌 같은 여러 부식을 한가득 품은 채. 그의 표정은 한없이 차분했다.
우르르.
강검마가 소파에 짐을 쏟아 냈다.
샤일은 몇 분 동안 했던 염려가 거품처럼 터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안도와 의아함을 동시에 느끼며 물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강검마는 엄지로 눈썹을 긁적였다.
“생각보다 별거 없었습니다.”
“…….”
샤일의 뚱한 표정에 강검마가 부연했다.
“눈 좀 사납게 뜨는 애들은 있었는데 한번 흘기니까 시선 돌리던데요.”
강검마는 그렇게 말하며 과자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직원한테 서비스로 받았어요. 가장 비싼 거라던데 샤일 씨가 드십쇼.”
“아아, 네. 감사합니다.”
얼결에 건네받는 샤일. 그 찰나에 그녀의 망막에 맺히는 시퍼런 빛.
강검마의 외투 속주머니에는 날을 빛내는 사시미가 꽂혀 있었다.
“…아.”
샤일이 옅게 침음했다. 그녀는 어째서 귀족들이 합죽이가 됐는지 납득했다.
샤일은 강검마에 대한 감상을 속으로 정정했다.
야수의 심장? 아니었다. 그는―
‘광마(狂魔)’
―정제된 광기.
그것도, 스스로 자각조차 없는 진정한 광인이었다.
* * *
열차는 6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암-”
아벨도 잘 잤는지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프랑스의 제2의 도시, 리옹.
제네바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거리마다 스며 있었다.
우리는 대기 중이던 리무진 택시에 올랐다.
‘이번 일정 예약은 샤일이 전부 맡았다더니… 돈 냄새가 풀풀 나네.’
검소한 고용주와 정반대의 사용인. 나로선 운이 좋았다.
기사님은 부드럽게 가도를 내달렸다.
규범을 지키는 안전 운전이다. 다만 조수석에 탄 샤일은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이 시속이 그녀의 성에 영 차진 못하겠지.
평소에 200을 밟는 그녀니까.
…근데 나도 그 쾌속에 적응해서인지 솔직히 굼뜨게 느껴지긴 했다.
‘나도 슬슬 맛이 가는군.’
이윽고 리무진은 숙소 앞에 멈추었다.
운전사가 친절히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도착했습니다.”
“아, 예.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사치가 무엇인 보여 주는 듯한 건물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 일행은 캐리어를 끌며 새빨간 융단을 밟았다.
‘이게 돈인가.’
…그렇게 사소한 절차가 마무리되고, 나는 배정받은 방 문 앞에 섰다.
【502호】
끼이이익―
“…미쳤네.”
호텔 방에 내 음성으로 메아리가 울렸다.
드넓은 면적. 내 기숙사 방은 이에 비하면 닭장 수준이었다.
나는 한 차례 침을 삼켰다.
이런 방에서 홀로 1박을 한다니 설렘이 팽창했다.
침대보에 얼굴을 묻었다. 섬유 유연제를 뭘 쓰는지 묻고 싶은 향기가 은은하게 돌았다.
나는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
돈 냄새가 좔좔 흐르던 오늘 하루.
어쩌면 내가 칠성의 자리에 등극하면 절로 따라오는 금력일 것이다.
―다만
생각하고 있자니 살짝 언짢았다.
이 또한 결국 신분제의 산유물이다. 그에 적응해 버리면 나도 그 귀족들처럼 변하는 게 아닐까.
나는 뜬눈으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벌떡 침대를 벗어났다.
“…그럴 일은 절대 없지.”
내가 바라는 건 이런 안락한 삶이 아니다.
3년 후에 발발하는 인마 대전, 그 지옥도에서 확실하게 살아남는 것.
전쟁 앞에서 사치스러운 보석들이 제 색을 발할 수 있겠나. 그저 굴러다니는 돌덩이 취급일 것이다. 차라리 잘 벼려진 쇠붙이가 훨씬 가치 있을 터다.
나는 어렴풋하나마 새카만 미래를 안다. 이딴 허울뿐인 황금은 훗날이나 지금이나 내게 무용하다.
그리고 귀족들의 지배 방식에도 진절머리가 나 버렸다.
왕이든, 귀족이든, 특권을 누리려면 상응하는 소임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부모 잘 만난 복으로 무시하고, 멸시하고, 괄시하는 치들이 지도층이라니.
그들과 같은 속이 된다 생각하니 속이 메스껍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3년 후의 인마 대전은 나름대로 물갈이도 될 수 있겠네.’
기억하기론 2차 인마 대전은 무조건 발발한다.
주인공 레온이 그에 차근차근 대비해 나가는 게 ‘기적의 가호 M’의 핵심 줄기니까.
하지만 서사가 비틀린 종국엔 나 또한 준비해야 한다.
게다가 [검신의 가호]가 내게 정보의 단말마를 제공한다.
그 종착지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아니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기치를 가슴에 새기며 창밖을 보았다.
누렇게 노을로 물들어 가는 하늘.
폭풍전야처럼 분홍빛 구름이 느긋이 부유한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폭풍 전야네.”
바로 내일 자연재해라 여기는 마수를 코앞에 볼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