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2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27화(127/300)
127화 망자의 왕 (6)
아벨은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화려한 갑옷으로 몸을 칭칭 두른 데 비해, 피골은 거무죽죽하다.
본연의 색이 완전히 바랜 머리칼은 백지처럼 하얗다.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자(死者)의 얼굴이다.
하지만 왕관 아래에서 금빛 눈동자가 고요히 이채를 발한다.
아버지, 오리온 폰 니벨룽.
애당초 살아 있을 거란 기대는 접은 지 오래였다. 이미 10년이 지났다. 숨이 붙어 있었다면 분명히 생환하셨을 것이다.
8년 전까진 그래도 한편에 가능성을 품었다. 필시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 늦는 거라고. 합리화와 자기 위안도 했었다.
그러나, 소망과 현실이 겹치는 건 매우 드문 법이다.
아버지가 실종된 지 5년이 지났을 때.
아벨은 어리광을 털어 냈으며, 부모님을 마음에 묻었다. 그녀는 유약하게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검을 잡으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새겼다. 언젠가 꼭 부모님을 발견할 그날을 기다리며.
…한데,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아버지의 겉모습을 한 저자가 사악한 마력을 뿜어낸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니라기엔 금안이 선명히 빛난다. 유독 눈에만 광채가 맴돌고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호흡이 엇박자다. 심장은 망가진 것처럼 덜컹거린다.
덥석.
사색이 된 아벨의 어깨를 샤일이 붙잡아 주었다. 아벨은 망연한 시선으로 샤일을 바라보았다.
“샤, 샤일. 이게 대체 뭐야? 저거 아빠 아니지? 그렇지? 아빠가 저럴 리가 없잖아.”
“…아가씨.”
샤일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가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 지금이 혼란스럽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샤일은 눈동자만 틀어 사원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도 아벨의 절규를 부정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저 눈을 보라. 생명이 저물었어도 이채를 띄고 있다.
검성의 후예들에게만 허용되는 눈이었다. 저 홍채를 지닌 이상, 저 괴물의 육신은 아는 이름이었다.
‘오리온 님…….’
샤일에게도 오리온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를 거두어 주고, 보듬어 줬으며, 학비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
선민사상이 팽배한 귀족 사회에 그 같은 인물은 몇 없었다.
심지어 귀족의 품위를 어그러뜨린다고 뒤에서 힐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리온은 가림막이 되어 주었다. 꿋꿋한 자신의 소신을 관철했다. 어른이란 무엇인지 몸소 보였다.
이 사회의 어둠을 사람의 온기로 밀어내 주었다.
샤일은 드라우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삼라만상을 낮잡아 보듯 가라앉은 동공. 살이라도 엘 것처럼 차가운 양안이었다.
껍질만 사람이었다. 알맹이는 이미 몸을 돌처럼 굳혀 버리는, 망자를 속박하는, 지옥도를 거느리는 뒤틀린 괴물이 되어 있다.
샤일에게 새 삶을 부여했던 인간은 죽고, 그 공백을 괴물이 차지한 것이다.
부아가 치밀었다. 마음 같아선 아가씨를 데리고 피하려 했다. 하나, 샤일의 눈엔 이미 전의가 들끓었다.
‘오리온 님을 저대로 둘 순 없어.’
비석의 내용이 맞는다면 오리온도 이 산지옥에 묶인 것일 터. 더욱이 육신을 뺏겨 괴물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절그럭.
황금이 맞물리는 소음. 드라우그가 삐걱삐걱 몸을 일으켰다. 목각 인형처럼 인위적인 움직임이었다.
지독히 느린 몸짓인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체 모를 압력이 전신을 저민다. 바람이 불 리 없는 밀실임에도 기류가 일었다.
까드득- 강검마의 어금니가 갈렸다. 형세가 예상을 한참을 벗어났다.
‘제기랄.’
이런 개같은 반전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드라우그가 알고 보니 아벨의 부친이었다.
물론 그의 정신은 깔끔히 말소된 상태였다. 감응력이 남다른 강검마였다. 저건 영락없는 마수다. 그것도 자연재해라 일컫는 S급.
심지어 아고르 때와 달리 이 장소는 드라우그의 본진. 게다가 어째서인지 ‘사신의 지팡이’도 안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아벨은 패닉에 휩싸였다. 그나마 샤일은 정신을 차린 것 같은데.
계획도 수틀리고 방도를 모색하기 힘들었다. 최선은 도망임이 분명했다.
“…….”
하지만 그럴 맘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강검마는 순수한 분노를 느꼈다.
10년간 꿈꿔 왔을 한 소녀의 염원을 더럽힌, 리치의 왕 드라우그에게.
강검마는 본디 정의감과는 먼 성정이다. 그를 이 장소로 유도한 것 역시 마석이었다. 목적을 위해선 불필요한 감정은 배제했다.
그렇다고 눈앞의 불의를 참지도 않는다.
강검마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벨을 떠올렸다. 아련했으며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런 당사자를 앞에 두고 고인을 능욕하고 있다. 아마 숙주에 기생하는 유형의 마수겠지. 게임의 보스 몹 중 몇몇이 그런 부류였다.
‘하필 드라우그가 그런 유형의 마수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벨이 오는 걸 한사코 말렸을 것이다.
비브라늄 멘탈이어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터. 아벨의 반응이 되레 강건함의 방증이다. 보통은 이마를 감싸며 혼절했을 테니까.
분위기가 절망에 젖어 드는 가운데, 미켈란이 소리쳤다.
“다들 정신 차리십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언데드라고는 믿기지 않는 쩌렁쩌렁한 성량이었다. 미켈란이 바들바들 떠는 아벨과 시선을 맞추면서 말했다.
“비록 제가 육신은 이러하나 마음만큼은 인간입니다. 아벨 님의 마음, 전부 이해합니다. 하지만 검성의 후예시라면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셔야 하는 법입니다. 저건 더 이상 부친이 아니십니다.”
그 말에 아벨이 고개를 들었다. 미켈란이 흐릿하게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어쩜… 초대 검성님과 똑 닮으신 얼굴이십니다. 그분이 보셨다면 분명 뿌듯해하셨을 겁니다.”
“…아저씨.”
“‘혼란할 때면 손마디에 검 자루의 감촉을 새기면서 용기를 돋운다.’ 초대 검성님께서 제게 종종 하셨던 말입니다. 그러니 검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분명 부친께서도 그걸 바라실 겁니다.”
미켈란의 표정에 관록이 맴돌았다.
“…….”
아벨의 시선이 제 오른손으로 넘어갔다. 굳은살이 빼곡한 손바닥. 이날을 위해 해 온 노력이 고스란히 손에 남아 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미 기류는 격동하고 위기가 덮쳐 오기 일보 직전이다.
그때, 옥좌에서 일어난 드라우그가 칼끝을 노면에 심었다. 이어 칼날에 입혀진 시커먼 기운이 대지에 스며들었다.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쩌적.
사방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인골로 쌓인 사원에서 언데드가 기어 나온다.
“끄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얽!”
언데드들은 날이 상한 날붙이를 꼬나 쥔 채 포효를 터뜨렸다. 그 수는 100 남짓. 하지만 삽시간에 세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것이다.
망령들이 터벅터벅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뻥 뚫린 눈구멍에선 검은 귀화가 피었다.
이윽고 아벨이 눈을 떴다. 눈길이 닿는 어느 곳이든 죽음만이 그득했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는 안타까운 영혼들. 그 가운데에는 아버지도 있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그녀가 손아귀에 결의를 세차게 불어넣었다. 칼자루 마디마디의 감촉을 느꼈다.
아벨이 강검마에게 말했다.
“원래 계획대로 드라우그는 검마 네게 맡길게. 뒤는 나랑 샤일이 어떻게든 해 줄게.”
“…괜찮겠어?”
강검마의 물음에 아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힘으론 드라우그와 대적할 수 없었다.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강검마뿐.
물론 본인이 아버지를 구제하고픈 마음은 굴뚝같다. 그러나 괜한 감정에 휘둘리면 일을 그르치고, 죽는다.
지금은 의지를 굽히고 강검마를 믿어야 한다. 아벨은 생각을 굳히곤 다시 입을 뗐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꼭 아버지를…….”
“알았어.”
끝말을 잇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강검마가 무라사메의 노끈을 풀었다. 삐져나온 칼날이 숫제 검광을 뿜어낸다.
와중에도 비명을 내지르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언데드. 볼품없는 전열이나, 죽음을 불사한 기세가 흉흉했다.
사라락.
이윽고 무라사메가 날을 완연히 드러낸다.
[검신(劍神)의 가호가 발현됩니다.]파앗-!
[▷NEW! 무통의 가호 발현 횟수를 충족하여 발동 시간이 다음처럼 재조정되었습니다.] [※ 발동 시간 : (50►60) 초.]강검마가 눈을 치떴다. 정상에 군림하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서 있다.
죽음을 다스리는 군주, 드라우그.
“불사의 왕이니 뭐니 해도.”
황금 갑주에 그어진 붉은 선이 망막에 맺혔다. 그것을 바라보며 강검마가 짧게 웃었다.
“잘리면 뒈지기 마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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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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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언데드의 세는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 처음엔 백가량이었는데, 몇 초 지난 현재는 그 수가 천에 육박했다.
사원 전체가 시체 더미였다. 드라우그가 칼을 바닥에 박으면 떠도는 영혼이 썩은 살점에 깃드는 원리.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무한의 군대였다.
하지만.
―서걱!
뾰족한 빛살이 언데드의 목을 끊었다.
툭투드드득.
노면에 머리통이 부딪치는 걸 뒤로, 강검마가 재차 도약했다.
팡- 하고 응집된 공기가 터지더니,
곧 신형이 쭉- 길게 늘어지면서 진형을 헤집었다.
“끄어어어어러억―”
툭.
외마디의 비명. 그리고 떨어지는 머리통. 무기를 쥔 팔들이 허공에 붕붕 떠올랐다.
미켈란의 눈알이 360도로 역동적으로 굴러다녔다.
그러는 순간에도 사시미는 또 하나의 만종을 고했다.
사원에 발을 디딘 직후 느껴졌던.
쿠후우으으후우쿠후으으우쿠꾸루후으으후우쿠구우후으으후
이런 소리는 어느새―
스겅, 푹, 서걱!
―이런 피륙음으로 대체되었다.
강검마를 뒤에서 보조하는 아벨과 샤일의 솜씨도 훌륭했다.
샤일은 쇠꼬챙이로 정확히 오금만을 찔러 적을 무력화시켰다. 심장, 급소, 명치를 찌른다고 상대는 죽지 않는다.
그럴 바엔 다리를 공격해 전열을 흐트러뜨린다. 삽시간에 파훼법을 찾아내고 즉시 실행한다.
짧은 고민, 판단의 생략, 즉시 행동.
체조 선수처럼 유연하고 매끄러운 몸동작으로 적진을 누빈다. 뻣뻣한 언데드는 그 움직임에 픽픽- 쓰러져 나갔다.
미켈란은 시선을 살짝 돌렸다. 제자리에 선 아벨이 오는 족족 언데드를 베어 넘겼다.
한 번 그려지는 호선이 적을 우르르 휘어 감았다. 언데드의 목이 옥수수처럼 우수수 털렸다.
언뜻 수수하기까지 한 단순한 참격이다. 하나, 그 안에 담긴 요체는 잡기 없이 완벽했다.
과연 초대 검성님의 흔적이 남은 검무. 그녀가 만개한다면 필시 검리에 한없이 가까워지리라.
‘…하지만.’
미켈란의 시선이 도로 전방을 향했다.
시체로 이루어진 엄청난 높이의 파도가 철렁거렸다. 증식되는 기세가 누그러질 기미가 안 보였다.
“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어어억!”
그 한복판에 강검마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가 사시미를 들어 올렸다.
칼날에 드리우는 빛무리. 오라가 그의 팔뚝 전체를 타고 흘렀다.
저 나이에 오라를 피우다니, 검의 묘리와 요체를 체득해야지만 가능할 터인데.
대체 700년 동안 밖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하.”
강검마가 짧게 숨을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가만히 해일을 응시했다.
“검마 님!”
미켈란이 기함했다. 그에 맞춰 강검마가 오라가 휘감긴 사시미를 내리찍었다.
―――――――서걱!
“세상에.”
미켈란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외치려던 말이 목 아래에서 맴돌았다.
쩍- 벌어진 언데드의 전열. 반으로 갈라진 파도의 틈에는 핏물이 끈적하게 엉겨 있었다.
미켈란은 팔뚝의 잔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어쩌면 살면서 봤던 장면 중 가장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