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2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28화(128/300)
128화 망자의 왕 (7)
언데드 던전은 본디 묘소였다. 전사한 영웅들의 안식을 기리기 위한 장소, 카타콤(Catacomb)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앞에선 돌조차도 풍화되어 모래알로 변한다. 그들의 역사도 기억에서 차츰차츰 잊혀 갔다.
…그렇게 다시 수백 년이 흘렀다. 한때 전쟁 영웅들의 묘소였던 카타콤에 마기가 흘러들었다.
영웅의 육체를 탈취하여 종속으로 부리는 마수. 자아를 박탈하고 짓밟는 괴물이 드라우그였다.
하나, 그런 농간에도 시대 정신은 쉽사리 꺾지 못한다. 넝마가 된 몸체에도 영웅은 영혼을 불살라 항거했다.
그 유산이 던전 앞의 석판이었다. 한 자를 새기기 위해 백 명이 영멸했다. 영체가 물리력을 발하기 위한 소모값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망을 담아 석면을 파냈다. 인간의 문자를 남겼다. 언젠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인간을 기다리며.
그리고 어느 날.
검성의 유지를 잇는 남자가 묘소를 두드렸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었다.
* * *
“크러어어어거어어어억!”
사방에서 끔찍한 고성이 터져 댔다. 언데드가 엄청난 속도로 벌떼처럼 군집을 이룬다. 널찍한 공동의 절반이 채워지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쯧.”
강검마가 혀를 찼다. 애초에 불리한 전황이었다. 쉽게 갈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데드 무리의 득세는 예상을 한참을 벗어났다. 토벌이 가장 까다로운 S급이라지만 이게 맞나 싶었다.
찰나의 상념. 그 순간에도 쥐 떼처럼 뭉친 언데드가 다가온다.
그들이 삐걱거리는 팔을 놀렸다. 수십에 가까운 공세가 강검마를 향해 전방위로 쇄도했다.
피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시야의 허점과 사각에서도 이가 나간 쇠붙이가 날아왔다.
언데드의 기세가 짙은 그늘로 강검마의 얼굴에 드리웠다. 생명의 빛을 갉아먹으려는 그림자.
그에 강검마가 칼 손잡이 대신 무라사메의 노끈을 잡았다. 곧바로 사시미를 채찍처럼 휘몰았다.
휘리리리리리릭⎯
사시미가 섬전처럼 휘어 꺾였다.
께/엑- 끄/얽-!
끄레/렉- 끼/게엑-
끄라라/아가아/가악-
칼날이 살점을 찌르고 심장과 내장을 헤집었다. 뭉텅뭉텅 신체 부위가 썰리는 소리가 났다. 길게 그려지는 검로가 독사처럼 언데드를 물었다.
“으아라아다아락아악!”
썰리고 찌그러지는 소음. 와중에 강검마는 다른 손으로 만년서리를 휘둘렀다. 접근하던 언데드 무리가 차가운 쇠붙이에 허물어졌다.
원거리와 근거리를 병용하는 칼질. 쌍수의 묘리를 제대로 활용한 솜씨였다.
샤일이 눈동자만 돌려 학살의 현장을 바라봤다. 그 중심에서 검은 머리가 두드러진다.
“…저건 정말.”
직접 보니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손속이다. 실로 악마가 재림한 것 같았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냥 악마 그 자체였다.
좀 전도 그렇다. 사시미로 언데드 집단을 홍해처럼 갈라 버렸다. 당시엔 격전이 긴박해 잠깐 얼을 탔다만…….
사일은 주변을 스윽 훑어보았다.
부던히 검을 놀리며 분전 중인 아벨. 그녀의 검날과 쇠붙이들이 격돌한다.
쨍- 불 싸라기가 튀기더니 아벨이 목과 다리를 동시에 끊어 냈다. 공격과 회피가 균형 좋게 어우러진 춤사위였다.
‘아가씨도 성장세가 엄청나다.’
한데, 강검마를 보라. 칼끝이 매섭다. 움직임이 난폭했다. 지면을 살과 피로 적신다.
개인이 집단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저건 재능의 영역이 아니야.’
더 이상 기술의 범위가 아니었다. 순수한 폭력.
적을 베고 자르기 위한 관념과도 같은 존재가 강검마였다.
⎯⎯⎯서걱!
동시에 몇십이 죽었다. 사시미가 한순간에 피칠이 되었다.
강검마는 건조한 눈으로 칼날을 털었다. 뻑뻑한 덩어리들이 노면에 철퍽철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재차 도약. 이젠 강검마가 먼저 무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휘릭.
강검마는 칼자루를 역수와 정수로 자유자재로 바꾸었다. 칼이 손바닥 위에서 바람개비처럼 핑그르르 회전했다.
계속되는 파상공세. 강검마가 적을 휩쓸며 괴멸시켜 버린다. 개미 무리처럼 요동치는 군대를 칼질로 잠재웠다.
피 안개가 자욱해지기 시작했다. 시체가 들끓고 비명이 끊이지 않는 참상이다.
강검마가 크게 한 걸음 내뻗었다.
서걱.
사원의 정상을 향해서, 또 한걸음.
서걱.
사방에 널린 망자들을 깔아뭉개며.
서걱.
사시미의 칼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 * *
“아, 젠장.”
절로 욕이 나온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상황이었다. 드라우그까지 남은 거리는 수십 미터.
딱 한 번 도약하면 될 성싶은데, 슬슬 남은 시간이 촉박했다.
‘대략 30초 남짓.’
정말 다행인 건, 전투 직전에 [무통의 가호]의 사용 시간이 조정됐다는 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제한 시간은 바닥이 났을 텐데.’
게다가 가호 발현이 능숙해져 시간 활용이 유연해졌다. 언데드 군대와 공방을 벌인 지 체감상 1분이 넘었음에도 별 지장이 없었다.
[검신의 가호] 발현 조건은 검집을 벗기는 행위. 칼날에 싸여 있을 땐 발현되지 않았다.거기서 착안한 것이 ‘발검’이었다. 전투 중에도 공세에 공백이 있다.
물론 찰나 중의 찰나지만 그 순간에 곧장 납도 한다. 그리고 다시 공세에 돌입하면서 칼날을 뽑아낸다.
이 순환대로면 60초뿐인 시간이 좀 더 늘어난다. 일종의 관성 효과와 비슷했다.
뭐, 기껏해야 20초 정도긴 하나 내겐 감지덕지다.
그런데 문제는 적이 많아도 너무 많다. 드라우그가 있는 위치까지 언데드가 바글바글했다. 으레 좀비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코앞에 연출됐다.
‘이걸 다 뚫고 가는 건 무리야.’
정작 대가리는 건들지도 못했다. 언데드를 시원시원하게 썰어 재껴 봤자, 대가리를 족치기 전엔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
나는 부릅뜬 눈을 들었다. 정상에서 공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 드라우그. 칼자루 끝동을 두 손을 감싼 채 지그시 나를 응시한다.
말라 버린 눈자위 중앙에서 금안이 나직하게 반짝였다. 권좌에서 내려다보는 부동의 자세는 짐짓 ‘왕’의 풍모였다.
“…존나 세 보이네.”
새삼스러운 감상이었다. 그저 물량빨로 밀어붙이는 마수인 줄 알았는데. 전신을 사정없이 찌르는 기백 하며, 분위기 또한 섬뜩했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반사적으로 혀로 축였다.
하긴, 숙주로 삼은 몸체가 아벨의 아버지였지.
검의 수행자인 검성의 후예.
거기다 드라우그가 잠식했으니. 군단장급 마족 조금 아래로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근데 가장 큰 관건은 저 녀석의 힘이 아니었다. [검신의 가호]는 죽창이다. 어떻게든 접근만 하면 베지 못할 것도 자른다.
‘최대한 빨리 가까이 다가가야 해.’
그래야 멱을 따든, 칼침을 쑤시든 할 것 아닌가. 가는 길에서 막혀 버리면 세상 억울할 것 같았다.
‘더 이상 [무통의 가호]를 낭비해선 안 된다.’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면 실패 확정.
계획 정정이다. 일단 저 녀석에게 접근하는 게 우선이었다.
‘가호 능력 중에 날아다니는 능력은 없나? 무협지에선 절정 고수는 허공을 답보하고 그러던데.’
그때 뇌리에 상념 하나가 번뜩였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때린다…….’
그럼, 만약 공중에 디딤돌 삼을 부유물이 있다면? 그걸 밟아 가며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날지는 못해도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닐 순 있잖아.
문득 시선을 내렸다.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언데드와 산처럼 수북하게 쌓인 육편.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찌꺼기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
물론 여기가 무중력 공간도 아니고 한사코 둥둥 떠다니진 않을 테지.
게다가 한 번이라도 스텝이 삐끗하면 바로 추락. 지금까지의 모든 게 수포가 된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발상조차 안 했겠지만, [검신의 가호]의 운동 신경이라면.
더구나 시야의 폭도 엄청나게 넓어졌다. 가능성이 0인 도박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을 마당인데.”
즉시 결행한다. 나는 발로 노면을 동그랗게 휩쓸었다. 인골과 육편이 무릎 높이까지 부상한다.
이어서 찌꺼기들을 퍽퍽- 올려 찼다. 그간의 단련 덕에 다릿심이 좋아져 거세게 용오름 치며 솟아올랐다.
곧장 발검. 검신의 가호를 발현시킨 뒤, 지면을 박찼다.
――――――――――――――콰앙!
…펄쩍 뛰어오른 강검마의 발이 첫 조각에 닿았다. 뒤이어 검은 동공과 두뇌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무의식은 한시에 최적의 동선을 구성한다.
설계를 마친 강검마가 곧장 몸을 쏘아 냈다. 시위에 메겨진 화살처럼 탕-! 폭음을 터뜨리며 이동한다.
떠오른 조각들을 밟을 때마다 강검마는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체공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가속이 잇따라 붙었다. 탄력과 순발력도 초인의 경지였다.
허공답보. 낱말 뜻 그대로 강검마는 허공을 자유로이 누볐다.
흡사 제비가 된 것 같은 기분. 끈적끈적한 탁류 속에서 꺼끌꺼끌한 바람이 뺨을 훑었다.
파바바바바밧!
순식간에 마지막 발판에 다다랐다. 그제야 망막에 맺히는 드라우그. 자신을 향해 날아들어 오는 강검마를 올려다보았다.
“허.”
드라우그의 동공이 진동했다. 생기 없이 탁했던 눈에 이채가 올랐다.
몸에 내재된 인간 오리온의 상념이 차오른다. 마수의 눈동자에 예기가 서렸다. 얇디얇았던 의식이 한순간이나마 돌아온 것이다.
오리온은 눈을 감았다 떴다. 발아래 망자의 군대가 득세한다. 죽음을 갈망하는 불쌍한 자들이다.
10년 전, 오리온은 우연히 언데드 던전의 진상을 들었다. 성웅들의 묘소인 카타콤이 마수의 소굴로 전락했다는 이야기.
사실 확인을 위해 아내와 함께 조사차 던전에 방문했다.
그들은 입구 앞에 있던 비석의 글귀를 보았다. 룬어였지만 꼼꼼히 준비했던 오리온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예언이었다.
『망자는 바란다. 이 저주를 끊어 내 줄 인간이 나타나기를. 불사의 속박을 베어 줄 검의 성인이 강림키를.』
의문이 확신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저주를 끊어 내 줄 인간.
‘검의 성인.’
오리온은 그 어구가 자신일 거라 생각했다. 타고난 기린아인 그였다.
항상 겸손한 오리온이었지만, 아버지 ‘검제’를 뛰어넘고 싶었다. 검사로서의 치기였을지도 모른다. 하나 딸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비이고픈 마음이 더 컸다.
하여 오리온과 아내는 망자의 소굴로 들어섰고.
한 가정이 비극을 맞이했다.
같이 온 아내는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오리온은 그 육신을 탐낸 마수에 의해 왕관이 씌워졌다.
자아는 빠르게 말라 갔다. 그럼에도 뇌리 한편에 문득문득 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딸.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더없이 소중한 존재.
10년의 세월 동안, 실낱같은 자아를 붙들어 준 하나뿐인 딸아이.
오리온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한 소녀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저 소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깨달았다.
‘많이 컸구나.’
집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그리 작았던 아이가 저토록 무럭무럭 성장했을 줄이야.
오리온은 도로 눈을 올렸다. 어둠을 본뜬 듯한 소년이 다가온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선명한 검명이 귓가에 맴돌았다.
마수에게 영혼이 좀 먹혔을지언정, 그의 본질은 검사다. 차가운 날붙이에 되레 뜨겁게 달아오르는 족속. 한 가닥의 의식이 이내 손을 움직이게 했다.
오리온이 검을 치들었다. 제대로 쥔 건 10년 만이었다.
키이이잉.
어스름한 검 울림이 퍼졌다. 보기 드문 보검이었다.
이윽고, 마지막 발을 떼는 강검마. 거룩한 순백의 빛이 허공에서 화한다.
화르르륵!
강검마의 팔 전체를 타고 오라가 날개처럼 피어났다. 시야 전체를 메우는 거대한 크기였다.
드라우그가 강검마를 응시하며 읊조렸다.
“망자에게 안식을 안기는 자.”
리치 킹, 드라우그 또한 다른 망자와 차이가 없는 인형에 불과했다.
허실뿐인 옥좌였다. 진정한 군주란 우리에게 만종을 언도하는 존재다.
“그자가 곧 망자의 왕이니.”
드라우그가 칼끝을 강검마를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망자를 대표해 빌었다.
“부디 자비를 보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