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3)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3화(13/300)
13화 아디토레 디 시칠리아 (2)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부여받은 이 힘은 신의 축복 혹은 가호 따위가 아니다. 그렇다고 하늘이 점지한 독보적인 재능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저주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검신의 가호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무장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 힘은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쫓아와 몸을 지배했다.
이번에는 격통도 없었다. 아니, 격통은 고사하고 끝없이 도취되는 순수한 쾌락과 느껴 본 적 없는 압도적인 탈력감이 몸을 휘감았다. 그 저주는 실에 구속된 마리오네트처럼 나를 휘둘러 댔다.
반쯤 포기한 채로 검을 휘두르니 귓가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들어 본 적 없는 언어였다.
그것은 감미로운 설득 같기도, 오금 저리는 겁박 같기도 했다. 다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뇌에 각인되듯 새겨졌다. 깊은 곳에서 새카맣게 피어오르는 악념(惡念).
‘더 베고, 더 자르고, 더 파괴해라.’
어리석게도 나는 몸을 맡겼다. 지독한 열락의 심연이 어디까지인지 끝없이 빠져들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어느새 내가 자신이라 인지하고 있는 이름.
새파랗게 물들어 가는 세상 속 붉은 머리의 소녀가 시야에 잡혔다. 그녀가 절규하듯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외침에 잘게 쪼개진 세상이 결합되어 하나로 치환되었다.
모든 것을 끌어 올려 나를 좀 먹고 오염시키려는 그 무언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난 반토막 난 목검을 쏘아 내듯 던졌다. 그 와중에도 검은 살갗처럼 피부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떼어 냈다. 살가죽이 벗겨지더라도 지금 떼어 내지 않으면 영원히 자아를 잃어버릴 것 같았기에.
검을 쏘자, 내 몸도 자석에 이끌리듯 화살처럼 쏘아져 눈앞 소녀의 발치에 닿았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클로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죽이려고 했던 얀데레. 지금은 희미한 내 의식을 깨워 준 소녀. 검을 손에서 완전히 놓았을 때, 비로소 운신의 자유를 얻었다.
나를 깨우려 했던 그녀가 얄미우면서 고마웠다. 애초에 그녀가 내 검을 부러뜨려 원인 제공을 했으니까. 그래서 짓궂지만 꿀밤 한 대로 봐주기로 했다.
꿀밤을 얻어맞은 클로이는 몇 번인가 입을 뻐끔거리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떨떠름한 시선을 마주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튜브로 본 얀데레 조우 시 행동 방침 중 하나였다. 신뢰성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목검으로 반사적으로 손을 뻗게 될까 불안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 보면 일평생 검을 피하면서 살아야만 하겠지. 수명을 맞바꿔서 발현되는 저주에 가까운 재능.
이질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채, 앞으로 달고 살아야 하는 재능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자잘한 해프닝들은 그때그때 무마시켜 나가면 족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내 이성을 삼키려는 무언가가 내 몸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는 길, 혈관을 타고 내달리는 격류를 잠재워 가며 생각했다.
이것은 가호가 아니다. 오롯이 나를 삼키려는 저주, 역천의 기술이다.
* * *
그날 이후, 강검마는 사흘간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원빈 교관과 클로이 둘만이 그의 부재를 눈치챘을 뿐, 교실의 분위기에는 변함이 없었다.
클로이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묻고 싶었다. 전화번호라도 알았다면 연락이라도 해 봤을 텐데,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연락처도 몰랐다.
‘왜 미리 안 물어봤을까.’
강검마의 기숙사 호실로 찾아가 노크도 해 보았다. 그때마다 문 너머에선 쇳소리 섞인 신음만이 새어 나왔다.
클로이는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냈다. 왠지 그러면 검마 군에게 미움을 받을 것 같았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대화도, 아침마다 몸을 푸는 훈련들도 식어 가는 그녀의 가슴을 데워 주지 못했다.
교실에서, 항상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그의 모습이 좋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훔쳐봤는지 모른다. 혹여 기분 나쁜 여자라 생각할까 봐, 말 거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처음에는 자기를 위해 몸을 투신한 모습에 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핑계 섞인 이유가 아닐까. 클로이에게는 그저 강검마가 필요했다.
‘…보고 싶어.’
지금에 와서는 그가 없는 일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초 단위로 감정이 커져만 갔다. 하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그가 곁에 있어 줬으면 했다.
그렇게 어느덧 하루, 이틀이 더 흘러갔다. 강검마가 교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늘에 먹이 낀 아침이었다.
교관 이원빈이 출석부로 교탁을 치며 말했다. 벽력같이 쩌렁쩌렁한 외침이었다. 위압감이 대단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귀족 자제 생도들조차 그의 인상에 꼬리를 말 정도였다.
이원빈은 눈을 돌려 생도들의 면면을 살폈다. 역시나 오늘도 강검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성실하고 겸손했던 생도가 어느 날부터 자취를 감추듯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교관들이었으면 본 생도를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원빈은 학생 개인의 자유 의지를 존중했기에, 강검마를 믿어 보기로 했다. 필시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
“오늘은 오전부터 강수 예보가 있는 관계로, 아침 훈련은 없다. 대신 각자 자습하도록.”
그리 말한 이원빈은 의자를 쭉 빼 털썩 앉았다. 자습해야 할 생도들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떠들었지만, 교관은 그저 웃어넘겼다.
피 끓는 청춘이다.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고, 옆에 친구가 있으면 입이 간지럽겠지. 이원빈은 품 안에서 포켓북을 꺼내 읽었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한순간에 모든 이목이 문 쪽에 집중됐다.
평상시였다면 그의 등장으로 이목이 쏠릴 리 만무했다.
“어……?”
이원빈 교관은 갑작스러운 강검마의 출석에 당황했다.
한 꺼풀 감정이 깎여 나간 눈동자였다. 머리카락의 끝부분 몇 센티 정도가 희끗희끗하게 새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의 소년티가 벗겨지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청년이 있었다.
“검마 군!?”
클로이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희미한 불안감이 그녀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팔뚝에 돋은 소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늦게 출석해서 죄송합니다, 교관님.”
“어, 어. 아니다.”
교실에 들어선 강검마는 이원빈에게 가벼운 목인사 한 후, 평상시에 앉던 자리를 찾아갔다. 그를 흘긋거리며 쳐다보는 시선들.
-쟤, 특진생 아니야? 원래 저런 외모였나?
-그러게……? 근데 좀 잘생겨지지 않았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그런 눈초리들을 무시한 채로 강검마는 창밖을 응시했다.
짙은 피로가 깔린 눈동자는 마치 생도들 전원을 깔보듯 미동조차 없었다.
* * *
점심시간이 되자 클로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거, 검마 군.”
“응, 클로이.”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별일 없었어.”
“…그게.”
클로이는 말을 고르듯 살짝살짝 눈치만 살피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간 출석을 안 하셔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 혹시 그때 대련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녀가 순망한 눈망울로 울먹거렸다. 나는 그런 클로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몸살을 좀 심하게 앓았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렇다면 다행인데…….”
의념이 풀리지 않는지 클로이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저 괜찮다는 말로 그녀를 재차 안심시켰다. 사실 몸살을 앓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지난 사흘간 나는 격통이 아닌, 극심한 금단증상 비슷한 것에 정신이 피폐해질 때까지 시달려야만 했다.
대련 이후로 방 안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침대에 몸을 파묻고 경련에 가까운 떨림이 가시기만을 기도했다.
파손된 무장을 쥐고 힘을 쓴 대가는 일전에 겪어 오던 압축된 격통을 아득히 초월했다.
이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울로 본 내 모습. 골조 자체는 그대로였으나, 인상이 너무 차갑게 변해 버려서 나 자신조차 놀랄 정도였으니까.
얼굴을 몇 번을 매만졌는지 모른다. 심지어 머리칼 끝부분마저 희끗희끗하게 새어 있었다.
그 좆같은 가호의 페널티가 분명했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클로이는 입을 다물고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로서는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지막으로 날 만난 사람도 클로이였고, 격전에 가까운 훈련의 상대도 그녀였으니까.
나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풀어 주기 위해 말을 돌렸다.
“전에 먹자고 했던 저녁, 오늘 먹을래?”
“네? 정말요!?”
그리 말하니 반색하며 눈을 반짝이는 클로이. 폴짝폴짝 뛰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다.
“대신 오늘은 클로이가 해 준 요리 먹고 싶은데.”
“다, 당연하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클로이는 자그마한 손을 가슴에 모으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공복이었던지라 뱃가죽이 등허리에 달라붙어 있던 참이다. 뭐라도 위장에 집어넣고 싶었다.
“오늘 그럼 검마 군 먹고 싶은 거로 다 해 드릴게요! 뭐 좋아하세요!?”
“음, 오랜만에 생선이 먹고 싶은데. 클로이네 기숙사에서 먹고 나서, 너무 비싸서 한 번도 못 먹었거든.”
우리가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따갑게 느껴지는 음습하고 기분 나쁜 기척.
내 눈이 사방을 훑었다. 그 며칠을 겪고 확장된 감각에 시선의 출처를 빠르게 찾아냈다.
문 앞에서 적발의 남학생이 비소를 흘리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대화를 끊고 문 쪽을 쳐다보자, 클로이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에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는 사람이야?”
클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서 미약하게 감정이 느껴졌다, 기피와 공포 비슷한. 나 또한 왠지 녀석이 흘리는 비소에 뭔가 좆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쯧, 하고 혀를 짧게 찬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학생에게 성큼 걸어갔다.
“저기요.”
“…….”
“할 말 있으면 주먹으로 하시죠, 남자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