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3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36화(135/300)
136화 방학 끝 (2)
아벨이 쪼그린 자세로 노파의 말을 경청했다.
“어디 보자, 그 친구 주변에. 하나, 둘, 셋, 넷……. 허, 이것 참. 달라붙는 사람들, 특히나 여자들이 세포처럼 계속 늘어가는 게 보이는군. 이 정도면 걸어 다니는 페로몬이나 다름없구먼, 쯧쯧.”
끄덕끄덕.
“흠. 근데 문제는… 눈치가 더럽게 없어. 남이 보면 부러워 죽을 팔자인데. 정작 본인은 전혀 모르지. 그렇다고 이성을 돌같이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끄덕끄덕.
가려운 부분을 속 시원히 긁어 주는 노파의 말에 아벨이 격하게 끄덕였다.
“한데, 이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여. 그냥 이성 관계에 문외한인 게 아니라, 뭐랄까…….”
노파가 눈꺼풀을 꾹 닫고서 수정 구슬을 어루만졌다. 회백색의 연기가 축구공 크기의 구슬 안에서 감돌았다.
노파는 웅얼웅얼 주문을 외웠다.
“아수라발발타… 아수라발발타!”
노파가 눈을 크게 떴다. 뭔가에 홀린 듯한 그녀의 안광이 유리처럼 투명하게 번들거렸다.
“…이 친구, 점점 인간성이 말라 가고 있었구먼.”
“인간성이 말라 간다는 게 무슨 뜻이죠?”
노파의 낯빛이 심각하게 변하자 아벨도 덩달아 마른침을 삼켰다. 그에 노파가 낮게 입을 열었다.
“추가 비용 5만⎯”
⎯덥석. 노파의 손에 쥐어지는 신사임당. 거래가 성사됐다.
노파가 아주 잠깐 만족스레 웃고선 곧바로 미소를 지웠다.
험험- 헛기침 두세 번. 노파는 고의로 목소리 톤을 낮춘 후, 입을 뗐다.
“말 그대로의 의미야. 이 친구, 감정, 이성, 공감, 도덕 등.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당연한 것들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
“무슨 이유 때문이죠?”
“아쉽지만 이유에 대해선 보이는 게 없어. 나도 돈을 받았으니 술술 털어 내 주고 싶네만. 보이지 않는 걸 말하면 신벌(神罰)을 받아서 말이야. 나로선 그저 이 젊은이가 불쌍할 따름이야. 이대로 가다간 금방 인간의 탈만 쓴 무언가가 될 거야. 기구한 인생이구먼, 기구해.”
노파가 학을 떼듯 끌끌 혀를 찼다.
“…….”
아벨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분명 몇 분 전까지는 이런 길거리 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는 완전히 이 점괘에 몰입한 상태였다.
그에 샤일이 아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가씨, 이제 그만 가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이런 거 원래 안 좋아하시는 아가씨께 보자고 했으니까. 그리고…….”
샤일이 차가운 시선으로 노파를 째려봤다. 괜한 말로 아가씨의 머릿속을 흐트러뜨린 당사자. 깊은 곳에서부터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순전히 사기꾼이었다면 코웃음 치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노파는 영험한 점술가였다.
마치 직접 본 사람처럼 검마 님을 정확하게 묘사해 냈다.
깎여 나가는 인간성, 가뭄인 땅처럼 바싹 마른 감정선, 무기질적인 인상까지.
노파가 줄줄 읊어 대는 말을 전부 취합해 보면 ‘강검마’란 캐릭터로 귀결된다.
샤일이 가늘게 뜬 눈으로 쏘아보아도 노파는 히죽 어깨만 으쓱했다.
서먹해진 분위기 속에서, 토템처럼 웅크려 있던 아벨이 문득 질문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물론이지”
노파는 차분히 아벨을 응시했다. 노쇠한 신체임에도 눈에선 생기가 흘러넘쳤다.
“사람은 사람으로 치료할 수 있네. 자고로 인(人)은 서로를 받치고, 의지하는 법이지. 그것이 우리 인간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식이야.”
노파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아무리 눈치가 더럽게 없더라도 꾸준히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차오를 걸세. 그리하면 친구 그 이상의 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지.”
“친구 이상의 관계?”
노파가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연인 관계. 더 나아가면 반려까지 노려 볼 만할지도? 자네가 원하는 게 그 친구의 옆자리 아니었나?”
도리도리.
아벨이 두 팔을 X자로 교차해 가며 부정했다.
“아니요? 전혀 아닌데요? 그… 그냥 걔한테 너무 큰 빚을 져서 그런 거거든요?! 저는 그렇게 이성이 끊이지 않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고요!”
그 말을 끝으로 아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샤일의 팔짱을 꽉 끼면서 급히 뒤돌았다.
“샤일, 이만 가자.”
샤일이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흠칫해 버린 그녀였다.
돌연 멀어지는 아벨의 등에 대고 노파가 흐릿하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받은 돈값을 좀 하자면, 자네가 걱정해야 할 건 크게 한 사람이야. 하늘색 머리, 그 친구가 가장 위험해. 그러니 그 처자만 견제하면 될 걸세.”
순간, 멈칫하는 아벨.
“…….”
그대로 가만히 서 있길 몇 초, 아벨은 재차 다리를 움직였다. 주먹을 옹골차게 말아 쥔 모습.
“껄껄.”
노파가 탁하게 소리 내며 웃었다.
* * *
…노파는 여전히 양탄자 위에 앉아 아벨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하아, 하아. 여기 계셨습니까!”
빈혈 환자처럼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 노파에게 다가왔다. 그는 턱 끝에 고인 땀방울을 훔치며 말했다.
“그새를 못 참고 사라지십니까? 한참을 찾았습니다. 아니, 제가 이런 짓 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그 꼴은 뭡니까!? 그런 거 하나하나가 전부 신성 모독입니다.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청년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끊임없이 잔소리했다. 그에 노파의 얼굴에 따분함이 떠올랐다.
‘알겠다, 알겠어.’ 노파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제 얼굴 거죽을 꽉 움켜잡았다.
부우욱- 살갗이 뜯기는 소리. 덜렁덜렁한 인피가 떨어지고 나서야 얼굴에 반전이 드러났다.
은발에 검은 눈의 소녀. 짐짓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소녀였다. 그녀가 머리를 휘휘 흔들어 땀을 흩뿌렸다.
지켜보던 청년이 질색했다.
“그 인피면구(人皮面具)라는 그거, 그만 좀 하면 안 됩니까? 그거 때문에 도망가시면 도통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의도가 그건데? 음, 전보다 웰터가 날 찾아낸 시간이 10분 늦었으니까. 좀만 더 연구하면 30분 넘게 숨어 있을 수 있을 듯?”
“아니… 대체 저한테 왜 그러시는 겁니까.”
“에이~ 그래도 나 웰터 없는 동안 10만 원이나 벌었음!”
여인이 능청을 떨며 키득키득 웃었다. 웰터는 질렸다는 기색으로 이마를 감쌌다. 찌든 한숨을 흘리면서.
“…하아. 제발 다른 건 몰라도, 그 점쟁이 행세 좀 하지 마십쇼, 진짜. 신성 모독으로 재판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성녀님.”
“성녀의 뜻, 성스러운 여인. 그게 곧 나잖아. 그럼 웰터의 말대로라면 내가 날 모독하는 셈인데, 난 셀프 고해성사하면 됨. ‘나 스스로의 죄를 사하노라~.’ 어때, 봤지?”
“아, 신이시여! 어찌 이 어린 양에게 이런 시련을!”
호위 사제 웰터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저런 인물이 성녀라니. 아무리 신화가 종말을 맞이 한 시대라도, 저 자체가 걸어 다니는 신에 대한 모독이다.
웰터는 눈을 감았다. 성호를 연신 그어 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후우.’
열심히 쌓아 왔던 신앙심 덕에 금세 번뇌를 다스렸다. 울긋불긋하던 심상도 백지장처럼 깨끗해지는 걸 느꼈다. 좋아.
웰터는 눈을 떴다.
“헤헤.”
“…….”
그러든지 말든지 성녀는 신사임당 두 장을 침을 발라 가며 만지작거렸다. 웰터의 관자놀이에 핏발이 튀었다.
“성녀님!”
“깜짝이야. 왜 소리치고 난리임!”
“당신의 그 신비를 그깟 푼돈에 쓰시다니요!”
“어디 땅을 파 보셈, 10만 원이 나오나. 그리고 외신교청 수뇌들은 뒷돈 싹싹 긁어모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럼! 그것도 내가 노동해서 번 돈을!”
웰터의 얼굴이 한순간에 아연해졌다. 그는 신앙심이 싹 달아날 뻔할 걸 끝끝내 붙잡았다.
‘아니, 아무리 열일곱이라도 그렇지, 성녀란 인간이 어찌 저리 경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웰터는 뭐라 거세게 반문할 수 없었다.
성녀 유세인. 인류 중 세계 바깥의 신, 외신(外神)과 소통이 허락된 유일무이한 여인이다.
한데 말투는 음슴체, 취미는 모바일 게임과 장르 소설 읽기, 일상의 태반이 빈둥빈둥.
일이 있어 외출할 때면 다섯 명으로 이뤄진 호위 사제단의 눈을 뚫고서 어디서 돈을 벌어 온다.
하물며 짬짬이 모은 돈은 게임에 과금하거나 장르 소설로 소비했다.
외신교청의 교무금으로는 그런 것들에 지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헌금이 모바일 게임 과금이나 장르 소설에 쓰인다 생각해 보라.
성도들의 신앙심이 한순간에 잿더미처럼 사그라들 것이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유세인은 성녀로서 주어진 일은 완벽히 수행했다. 기도와 묵상, 미사 집전, 외신교의 업무, 뭐 하나 빠짐없이.
그러나 남는 시간을 저딴 요상한 인피면구나 만들면서 보내는 게 문제다.
저 빼어난 재능을 종교에 할애한다면 교인들은 환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진대, 그들의 고해성사는 못 들어 줄지언정…….
웰터가 속으로 한참을 탄식하던 와중, 세인이 누리끼리한 지폐 두 장을 주머니에 슥 찔러 넣었다.
“그건 어떻게 됐음? 호아킨 아카데미 2학기 편입.”
“아, 그거라면 방금 위장 신분 생성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신분은 변방 소귀족의 삼녀쯤으로 해 두었습니다. 아무래도 성녀님 신원이 신원이신지라, 꼬박 반년이 걸렸군요.”
“게임은 닉변이 쉬운데. 현실엔 귀찮은 절차가 넘 많음.”
“근데 이것도 성녀님이 갑자기 1년 반쯤 전부터 내리 조르셔서, 성하(聖下)께서 겨우 허락해 주신 것 아닙니까. 그것도 이유가…….”
롤린~
세인의 주머니가 낮게 진동했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웰터가 물었다.
“…또 그 같이 게임을 한다던 친구입니까?”
“응, 조금 전에 레벨 업 했다고 알람 와서 답장 좀 해 줘야겠음.”
가라앉은 세인의 흑채가 유심히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톡톡- 유리 액정을 건드리는 손가락.
잠시 후, 세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나 초밥 먹고 싶어졌음.”
“예? 갑자기요?”
“응, 이 친구 소식 들으면 회나 초밥이 당김.”
“대체 어떤 자이길래… 그것도 호아킨 아카데미까지 입학하시면서까지… 저로선 정말…….”
“웰터, 이 세계에서 성녀의 역할이 뭐지?”
“예. 호위 사제 웰터, 여기 있습니다.”
교리 이야기에 웰터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신화시대가 끝난 작금에 세계 밖에 있으신 외신과 교류하시며, 교리를 내려 주시는 성스러운 역할. 그것이 성녀님의 성업(聖業)과 소임이지요.”
“잘 아네. 그래서 가는 거임. 그 성업과 소임을 하러.”
“…예?”
“뭐, 그것도 그건데, 이 친구. 레벨 업 속도가 너무 느려서 내가 가서 쩔 좀 해 줘야 함. 안 그러면 앞날이 좀 캄캄할지도.”
“캄캄하다니요. 그 모바일 게임 이야기입니까?”
대답 대신 세인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행동거지와 맞지 않는 정말 천사 같은 미소였다.
“어차피 말해도 웰터는 이해도 못 함. 암튼 됐고, 마침 맛있는 제네바 초밥집 찾아놨음!”
“아, 아. 예, 알겠습니다.”
세인이 신이 난 얼굴로 씩씩하게 앞장섰다.
“앞날이 캄캄하다…….”
웰터는 홀로 멀뚱히 서 그녀의 말을 몇 번 곱씹고서야 발을 뗐다.
* * *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캐슬 시구르드의 일상에 적응하던 차였는데, 금세 스위스에서 떠날 날이 도래했다.
떠나기 전,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 달 동안 머물렀던 방을 둘러보았다. 그간의 정취가 가구와 내부에 스며 있다.
“…….”
끼이익―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성채 바깥으로 나오자 당주인 검제와 집사 카론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나와 아벨을 배웅해 주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검제도 우리와 함께 가려 했지만,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어 조금 늦는다고 말했다.
하여, 아카데미로 향하는 건 나와 아벨 둘. 공항까지는 샤일이 차를 몰아 바래다 준다.
검제가 내게 말했다.
“스위스에 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군. 한데 생각해 보니 그동안 굵직한 일이 참 많았군. 수고 많았네, 생도 강검마.”
“아닙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많은 걸 배웠습니다.”
검제가 툭툭 가볍게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어 나는 집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카론 님. 덕분에 편하고 즐겁게 지내다 갑니다.”
“다음에 오시면 더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꼭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카론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도 같은 자세로 예를 표했다.
어느 정도 배웅이 끝나자 샤일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가는 동안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차체에 발만 디딘 채로 샤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샤일 씨의 운전이면 안심입니다.”
그녀가 방긋 미소로 화답했다.
“할아버지, 카론. 저희 이만 갈게요!”
차창을 열고 빼꼼 손을 흔드는 아벨. 그다음 순간, 차가 투창처럼 앞으로 쏠렸다.
창 너머에 휙휙 스쳐 지나가는 알프스산맥. 험난했던 방학 한 달이 저 험준한 산등성이와 닮은 것 같았다.
나는 창 너머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아 둔 뒤, 시트에 등을 기댔다.
이제는 내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