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4화(14/300)
14화 아디토레 디 시칠리아 (3)
나는 앞으로 걸었다. 남학생은 가만히 서 있었다.
“…….”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무거운 침묵이 교실 벽에 스며든다.
핏물로 염색한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붉고 탁한 빛깔의 눈. 직감이 맹렬하게 경고음을 울려 댄다. 녀석은 위험하다고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할 말 있으면 하시죠.”
내 말에 녀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퀭하고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다. 나도 가만히 서서 녀석과 눈을 마주했다. 서늘하게 벼려진 적의가 전신을 찔러온다.
‘이 새끼, 눈깔이 왜 이래.’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신 줄을 놓은 클로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 세계에서도 흔치 않은 적발과 적안이다. 짐작건대, 아마 그녀와 혈연관계이지 싶었다.
몇 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 따위는 없었다. 그러자 클로이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막아섰다.
“검마 군, 이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돼요.”
클로이는 그 녀석을 애써 무시하라는 투로 말했다. 못 봤다면 모를까, 이렇게 흉흉한 기운을 뿜어 대는데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 그녀는 등을 돌려 녀석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내,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클로이의 적의 깃든 음색. 분명, 그녀 나름대로 쏘아붙이려는 말투였겠지만, 애당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던 만큼 효과는 미미해 보였다.
마주하는 상대는 대답 없이 입가에 비릿한 호를 그렸다. 그러자 클로이는 파리한 안색으로 바르르 몸을 떨며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 모습에 나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천성이 소심한 클로이의 성격을 감안해도, 내가 봤을 때 클로이는 명백하게 눈앞의 녀석을 격하게 꺼리고 있다. 그 순간,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별로 강해 보이진 않는군. 아디토레의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이런 녀석과 같이 있고 싶었나, 클로이.”
클로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대꾸했다.
“아디토레든 뭐든,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이미 손을 적신 피는 닦아 낼 수 없다. 출생이 아디토레면 영원히 아디토레의 종속인 법이지.”
녹스라는 남학생이 못 박듯 그녀에게 말했다. 뭔 어린놈의 말투가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말투였다.
“이 천출을 버리고 다시 아디토레로 돌아와라, 클로이.”
“검마 군을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천출이란 말에 처음으로 클로이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갈무리한 살기를 녹스를 향해 발산했다. 붉고 매서운 살기가 흉흉한 기세로 교실을 채워 나갔다.
다행히 점심시간이라 학생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지금에야 어느 정도 이런 비일상적인 상황에 익숙해졌다지만, 아마 불과 몇 주 전의 나였다면 숨 막힐 듯한 이 공기의 하중에 못 이겨 이마부터 붙잡고 비틀댔을 것 같다.
‘……아디토레라.’
나는 속으로 그 단어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자세하진 않지만, 그 가문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잠입과 암살을 주로 하는 그림자 집단.
게임 플레이 당시, 초반에는 일체 등장이 없고 중반쯤 가서야 슬슬 언급 정도 되는 이름이었고, 후반 에피소드에선 단편적인 조력자 포지션이었다.
신비주의로 점철된 여러 가문 중에서도 유독 정보가 부족한 영웅 집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가문 구성원 전원이 터무니없이 강하다는 것. 비록 전면전은 여타 영웅 집안들에 밀린다는 평이 있었지만.
암습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알고 있다.
철이 들기 전부터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반복해, 자식들을 암살 도구로 키워 낸다지.
그렇게 본다면 감정이 한껏 거세된 저 녹스라는 남자의 얼굴이 아디토레로선 정상이고, 수줍은 소녀에 가까운 얼굴을 한 클로이가 이질적인 게 아닐까.
어쩌면 클로이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부여받은 검신의 가호 때문에, 클로이는 어쌔신 가문이라는 환경에 때문에 말이다. 도망치고 싶었겠지. 그녀의 비틀린 이면도 가혹한 교육관의 산물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가 주륵 흐를 정도로 조그마한 입술을 꽉 깨물며 녹스에게 적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는 것처럼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어기제로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녹스를 응시했다.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를 것 같은 서늘함이 짙게 깔린 눈동자였다. 아니, 이미 살인이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디토레는 질서의 가문을 위시하여 내부의 적을 색출하고 숙청하는 걸로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필요에 의한 살인에 거부감은 없다. 오히려 나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예의 마오 쌍둥이 같은 녀석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고일 대로 고인 귀족 사회에서 죽여야 할 대가리의 수는 한둘이 아닐 테지.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묵살당하고, 감정 없는 살인을 지속해야 하는 기계로서의 삶이라……. 출신 성분이 암살자라는 이유만으로 선택지 없는 운명을 강요하는 건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나는 생각했다. 영웅은 고결한 사명감으로 세상을 구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될 수도,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도 세상은 못 구할지언정, 한 소녀의 삶을 도와줄 수는 있지 않을까.
입에서 피식 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상황에 맞지 않는 조소였다. 나는 클로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저 자식이랑 이야기 좀 할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분명 저주에 가깝지만, 그 힘은 나를 패배하게 두지 않을 터다. 결국은 원점이었다. 검신의 가호에서 도망치려 해 봤지만, 도망칠 수 없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차피 내 이름은 강검마. 검 검(劍)자에 마귀 마(魔)자를 써서 검마. 지랄맞은 콘셉을 견지하기 딱 좋은 이름. 허세라면 인류 최강 검제 양반한테도 부려봤다.
“이름이 녹스였나.”
“…….”
녹스는 말 없이 눈을 깜빡였다.
“따라와라.”
나는 이어서 무미건조하게 입을 뗐다.
“베어 주마.”
나는 칼잡이다.
내게 있어 대화는 말이 아닌 날붙이로 하는 것이다.
* * *
아카데미 교직원실.
빡빡머리 이원빈 교관은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그 단기간에 사람이 그토록 변할 수 있는 걸까. 외모뿐 아니라 흘리는 분위기나 인상마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원래도 십 대다움이 좀 결여된 학생이긴 했다. 이따금 자신보다 더 인생 선배 같은 관록을 풍기기도 했고.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던 중, 등 뒤에서 누군가 왁! 하고 그를 놀랬다. 단발머리에 길쭉한 기럭지의 여인이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 지었다.
“선-배!”
“어, 김 교관.”
“엥, 뭐예요. 반응이 왜 그래요. 놀린 사람 민망하게.”
무덤덤한 이원빈의 반응에 김 교관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하리보 젤리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 갖가지 주전부리가 들려 있었다. 이원빈은 복잡한 속을 숨기며 그녀의 너스레에 맞춰 주기로 했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오늘따라 유독 머리가 휑한데요?”
“…대머리는 건드는 거 아니다.”
“헤헤, 죄송함돠.”
김 교관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혀를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얼굴이 어둡대.”
“별일 아니야. 그냥 검마 그 녀석이 며칠 결석하다가 오늘 출석했는데, 인상이 너무 많이 변했더라고. 그게 좀 신경 쓰여서 그래.”
“그냥 성장기라서 키 좀 큰 거 아니에요? 요새 애들이 워낙에 빨리 커야지. 얼핏 보면 저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생도들도 많더라구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요, 선배.”
“…그게 인상뿐 아니라, 사람이 좀 변해 버린 느낌? 뭐랄까 감정이 좀 깎여 나간 듯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설명하긴 힘든데, 하여간 좀 이상해.”
이원빈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김 교관은 묘한 표정으로 젤리를 우물거렸다.
“뭐, 그래도 사고만 안 치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원빈 선배 말 들어 보면 싹싹하고 예의 바른 애인 거 같은데. 그냥 기우겠죠.”
“기우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나…….’
이원빈은 짧은 잡념을 마쳤다. 강검마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15분이 채 남지 않았다. 자리를 털고 교내 식당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삐리리리⎯
책상에 비치된 유선 전화가 날카로운 벨 소리를 울렸다. 점심시간인지라, 급한 용무가 아니면 내선으로 걸려 올 리가 없을 텐데. 이원빈은 잠시 스치는 의문을 뒤로하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랑 클래스 주임 교관, 이원빈 전화 받았습니다.”
-이, 이원빈 선배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최후임이었다. 옆에 서 있던 김 교관이 누구냐 물었다. 이원빈은 입 모양으로 전화 상대가 누군지 그녀에게 말한 후, 다시 통화를 이었다.
“어, 최 교관.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원빈의 미간이 좁아졌다. 불안이 깃든 기색이었다.
“갑자기 무슨 문제인데?”
-그게 지금 선배네 클래스 학생이 학원장님께 찾아가 생도 간 아공간 전투를 신청한 모양입니다.
“뭐? 갑자기!?”
이원빈 자신도 모르게 목청에서 고함이 튀어나왔다. 우레처럼 쩌렁쩌렁한 외침에 교직원실의 온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한참 젤리를 우물거리던 김 교관도 그 모습에 사레가 들려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아공간 전투. 일반적인 페어링과 달리 아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실전에 가까운 대련. 반 배정 시험 때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모든 생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점이 달랐다.
말 그대로 서로의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장면을 아카데미 생도 전원 앞에서 라이브로 중계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극단적인 케이스가 아니면 성사되기 만무했다.
“신청한 생도랑 상대는 누구야?”
-그게…….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갑갑한 마음에 이원빈이 사납게 보채자 최 교관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신청한 생도는 강검마, 상대는 녹스 아디토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