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5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52화(151/300)
152화 회장 선거 (2)
보랏빛 노을이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시간대. 아카데미에 어스름이 일었다.
여름의 무더위는 완연히 가시고, 떨어진 잎들이 길에 융단을 깔았다.
저벅, 저벅.
나는 아카데미 부지를 산책하고 있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다듬을 땐, 버릇처럼 걷곤 한다.
“벌써 가을인가.”
한 발짝 내디디면 잘 익은 낙엽이 밟혔다.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이 찌는 계절. 밤바람이 쌀쌀한 게, 자칫 감기 걸리기 딱 좋았다.
‘클로이는 잘 지내려나.’
오늘 조례 시간, 교관 이원빈이 클로이의 아카데미 복귀가 다소 늦어질 수 있다 전했다. 아무래도 비단 가족들의 장례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속으로 그녀를 걱정하면서 ‘그’ 벤치로 향했다. 산책의 마무리는 언제나 그 장소로 귀결됐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협회 출입증 때문일지라도 이번 출마가 옳은 선택일까.
나는 이미 여러 번 정사에 관여한 바 있다. 입학 무렵만 해도 배경 인물 A로 살겠다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러나 그 모든 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반면 이번 일은 결이 좀 달랐다. 이번은 내가 발 벗고 정사에 뛰어드는 경우였다.
모노리스를 찾지 못한다 해도 목숨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아티팩트를 찾을 시간에 무장 강화를 부단히 해 두는 게, 더 나을 테지. 그럼에도 나는 기억의 편린 획득을 우선으로 두었다.
하나하나 얻어 가다 보면 그 끝엔,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그런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덩달아 추가 보상도 노려 봄 직했고.
’모노리스를 얻고 단숨에 나머지 5개도 모으자.‘
상념에 잠긴 채 걷던 중, 늘 앉던 벤치가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 먼저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매우 뜻밖의 인물이.
‘…유세인?’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두드리는 세인의 모습. 그녀는 헤드셋까지 쓰고서 게임에 몰두했다.
세인이 기척을 느꼈는지 눈동자만 굴려서 나를 쳐다봤다. 표정을 보건대, 내가 올 걸 예상한 모양이다.
이 일대는 본디 인적이 드문 곳인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출몰이 잦아졌다.
아벨, 사키에 이어 이번에는 유세인까지. 이젠 주요 인물들의 핫스팟으로 통하는 건가 싶다.
“뭐 함, 여기 앉으려 했던 거 아님? 와서 앉으셈.”
진짜 저 음슴체는 어떻게 안 되나? 성녀라면서.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신도 수 줄어드는 소리가 귀에 흘러 들어온다.
‘애초에 이 세계에 신이 남아 있던가?’
일전에 데미안 교수(?)가 잔존하는 신은 더 이상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검의 신이 신 전부를 몰살시키고 마지막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던데.
‘그렇다면 세인이 모시는 신이란 존재는 뭐지?’
우두커니 서서 골몰하자 세인이 보채듯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만남이긴 하나,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세인에겐 이것저것 묻고픈 게 많았다. 며칠 전 복도에선 스치듯 이야기한 게 전부였고.
이후로는 세인이 은근슬쩍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이유는 예의 그 ‘신벌’ 때문이겠지.
억지로 세인에게 물어 봤자 원하는 말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괜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가십거리에 고픈 청춘들인데, 내가 세인을 연달아 찾는다면? 상상만 해도 이마에 주름이 늘었다.
나는 슬슬 다가가 세인의 옆에 앉았다. 그제야 그녀는 헤드셋을 벗고 휴대폰을 갈무리했다. 세인이 선뜻 입을 열었다.
“걱정 마셈.”
“……?”
“내가 너한테 이성적으로 반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임.”
느닷없는 세인의 말에, 내 얼굴에 황당함이 차올랐다.
반해 세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성녀라 함은 이 세계 전부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 그렇기에 특정한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 그게 성녀임.”
“……..”
“명색이 성녀인데, 죄 많은 남자한테 죄를 더 끼얹을 수야 없지.”
세인은 그리 말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어 옅게 웃으며 발을 엇갈리게 저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는 세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라서 모두를 사랑해야 하기에,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 같은데.
첫 마디가 이거라니……. 어째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나는 속내를 애써 감추고서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네가 한 말이 있으니까 이것저것 묻진 않을게. 대신 이거 하나 정돈 답해 줘라.“
세인은 말없이 발만 잔망스레 흔들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알아듣고 재차 입을 뗐다.
”말로 대답할 필요 없고. 끄덕끄덕, 도리도리 정도로만 답해. 내가 묻고픈 건 하나야.“
”…….“
그제야 세인이 작게 끄덕였다. 대답이 떨어졌다.
”유세인, 네가 상태창과 확실한 연관이 있다는 건 알겠어. 너한테 가장 궁금한 건 그건데, 신벌 뭐시기 때문에 대답 못 해 줄 거고.“
끄덕끄덕.
”솔직히 네 정체가 뭔지. 왜 아카데미에 왔는지. 그런 것들은 별로 관심없다. 내가 궁금한 건 한 가지,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일들이랑 하려고 하는 일들, 전부 시스템이나 아니면 그 비스름한 게 의도한 거냐?“
“아님.”
단호한 대답. 세인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도 네게 감히 개입할 수 없음. 그것이 설사 신일지언정.”
“……?”
세인이 툭툭 엉덩이를 털었다. 추가적인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렸다.
“검마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존재임. 다만 아직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뿐이지. 그저 올곧게 나아가기만 해도 인간성이 말라 가겠다만…….”
세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의구심을 갖지 마셈. 고민은 약자의 몫, 강자는 행동으로 보이는 것임.“
말을 마친 세인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도 곧 몸을 일으켰다.
* * *
강검마와 헤어진 뒤, 세인은 정처 없이 밤길을 걸었다. 그녀는 조금 전의 만남을 되새김질했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컥!”
그 순간, 세인은 심장이 행주처럼 꽉 짜이는 격통을 느꼈다. 그녀가 입을 가리며 기침했다.
탁한 기침 소리가 연달아 메아리쳤다. 입가를 막은 그녀의 손바닥에 핏물이 맺혔다.
제 손을 보던 세인이 어이가 없다는 기색으로 실소를 흘렸다.
“하, 고작 그거 말해 줬다고 이래?”
세인은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처연하게 반짝이는 별들이 시선처럼 그녀를 마주 바라본다.
“…….”
“…….”
잠깐의 눈싸움. 세인이 이마를 감싸면서 혀를 찼다.
“에혀, 너희들이 아무리 쟤를 싫어해도 그렇지, 충고 좀 했다고 나한테 화풀이해? 그렇게 속이 좁으니까 한 명한테 전멸당하지.”
“…….”
“됐다, 됐어, 이 좀생이들아. 말만 신이지. 마음 씀씀이는 쥐구멍보다 좁고, 겁은 갓난아기보다 많은 게 신이냐! 너희가 툭하면 신벌을 내려 대서 이젠 수혈을 받아야 할 지경이라고!”
하늘에 대고 신경질 내던 세인은 이내 손수건으로 핏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히 발을 뗐다.
쌀쌀한 가을바람에 가녀린 몸이 잘게 경련했다.
* * *
근래 학년 구분 없이 생도들 사이에선, 어떠한 소문이 돌았다.
“너 그거 들었어? 이번 회장 선거에 1학년 생도도 출마한대. 그것도 두 명이나.”
“헐, 말도 안 돼. 전례가 없는 일 아니야? 아니, 근데 올해 1학년들이 아무리 잘났어도 회장 선거는 좀 다르지. 호아킨 아카데미 선거가 무슨 인기 투표도 아니잖아.”
“그치. 무력이 아무리 세건, 뭐건 간에 결국 두루 방면에서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자리니까.”
“…소문으론 이번 회장 선거, 단순히 투표만 하는 게 아니래.”
“뭐!?”
“쉿! 이거 내가 어렵게 들은 정보인데, 단순히 투표만 하는 게 아니라, 그에 앞서 경연을 치른다잖아. 그도 그럴 게, 1학년 두 명이 포함되면 총 7명이잖아. 그럼 수가 너무 많으니까 한번 줄이고 가는 거지.”
“그래서 그 경연 내용은 뭔데?”
“글쎄, 그것까지는 몰라. 뭐, 실전을 중시하는 학풍상 서로 투덕거리는 거 시키는 거 아닐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선거 후보를 정하는 경연인데 쌈박질이나 시키겠어? 모르긴 몰라도, 우리 호아킨 아카데미에 어울리는 귀족적인 품위 있는 방식이겠지!“
* * *
교실에서 멍하니 창 너머를 바라보는데, 돌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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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처) 호아킨 아카데미 행정실
[Web 발신](안내) 회장 선거에 앞서, 경연 내용에 대한 공지.
학생회장 후보로 등록된 생도 전원은 금일 4교시 시작 전까지 본관 3층 중회의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 ==
내가 빤히 휴대폰을 응시하고 있자 료조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인데 표정이 그래? 스팸 문자라도 온 거야? 그런 거면 나한테 말만 해 번호 추적해서 전부 먹통으로 만들…….”
나는 말없이 문자 내용을 보여 줬다. 조용히 글귀를 훑던 료조의 시선이 내게 넘어왔다.
“벌써 시작하는구나.”
“그러게. 아직 선거 당일까지 이 주 넘게 남았는데, 경연은 좀 빨리 치를 건가 봐.“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이 경연의 의도는 안 봐도 뻔하니까.”
엊그제, 후보들에 한해서 경연을 치를 거란 통보가 있었다. 그에 대해 료조는 협회 측 의견인 것 같다 추측했다.
돌연 1학년생 두 명이 후보로 추가됐으니, 위 학년 선배들이 좋게 볼 리가.
본격적인 선거에 앞서 2, 3학년의 불만을 누그러뜨려야 할 테지. 이에 제일 효과적인 건 1학년과 2, 3학년들 사이에 차등을 두는 것.
하여 경연은 이번 선거를 주최한 협회에서 내놓은 나름의 대안이다, 라는 게 료조의 가설이었다.
‘어쨌든 간에 귀찮은 일이 늘었을 뿐이지.’
그렇게 시간이 되고, 나는 곧장 중회의실로 이동했다. 본관 3층에 도착하니 대기 중이던 하 주임이 나를 맞이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중회의실까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전처럼 슬금슬금 눈을 회피하는 하 주임. 나는 앞장선 그녀의 뒤를 따라 중회의실에 다다랐다.
끼이익.
문을 열자 먼저 도착한 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차갑게 가라앉은 눈들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
저 사람들이 다 내 경쟁자다. 나름 기세를 갈무리한 것 같지만, 안광에 스치는 적개심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주변을 슥 둘러본 뒤에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바로 그때 뒤통수에서 아주 미세한 기운이 느껴졌다. 익숙하면서 불길한 이건… 마력이었다.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나를 노려보던 면면을 일일이 훑어보았다.
불만으로 미간을 잔뜩 좁힌 멀대, 가자미눈으로 곁눈질하는 여자, 그리고 퀭한 눈으로 천장만 보는 환자.
세 사람을 보고 있자니 손이 절로 주머니로 내려갔다.
“설마 아직도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