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6화(16/300)
16화 바람 잘 날 없다 (1)
연무장을 메우던 짙은 흙먼지가 서서히 흐릿해질 무렵, 방금까지 벌어진 참상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파인 곳마다 새빨갛게 웅덩이진 핏물들, 흙바닥에는 물결무늬처럼 다중의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칼날에 반사된 얼굴에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사람을 썬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한 감각이었다. 생선 배 가르라고 만든 칼인데, 나는 이걸로 사람을 썰고 있다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아직 진짜로 사람을 베어 본 적은 없다는 거 정도? 마오 쌍둥이나, 지금 눈앞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녹스나 결국 아공간 내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가상 공간의 특전을 이렇게 누리게 될 줄이야.
물론, 현실이었어도 위협하는 존재들은 여지없이 자를 생각이지만, 무분별한 살상은 지양하고 싶었다.
꼴리는 대로 휘둘러 젖히면 왠지 나도 모르는 새에 인간 백정이 될 것 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붉게 젖은 사시미를 한번 툭 털고 검집에 꽂았다. 칼날이 살짝 덜컥거렸다.
하긴, 그 짧은 순간에 세기도 힘들 정도로 사시미질을 퍼부었는데, 제아무리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어도 날이 안 상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나는 쓰게 한 번 웃었다.
26초. 생각보다 승부는 짧게 끝이 났다.
녹스는 분명 강했다. 클로이의 말대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지, 칼질이 매정하리만치 주저가 없었다.
검극을 받아 낼 때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전투 센스가 천부적이었다.
관객석에 있는 생도들은 몰랐겠지만, 녀석은 발검과 동시에 ‘까마귀의 가호’를 시전해 검극의 곡선을 변칙적으로 꼬아 댔다.
심지어 클로이 이상의 경이로운 수준의 스피드를 더하니 대응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전투에 있어서 녹스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게 맞았다. 다만, 수 싸움이 좀 어설펐다.
기척 차단을 운용해 검로를 곡선으로 그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검기에 짙은 살기가 딸려 있어 그다음 검격이 예상됐다.
물론, 앞으로 계속 경험이 쌓여 잠재력이 개화한다면 최강의 어쌔신이 되리라.
‘강하긴 했어.’
나도 이제 가호를 발현하는 게 익숙해졌는지, 나름대로 시간 안배를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온 것 같았다.
물론, 무통의 가호를 발현해도 눈 주위에 찾아오는 묵직하게 뻑뻑해지는 느낌은 여전하긴 했다.
그래도 처음 검신의 가호를 발현하고 개지랄을 떨었던 거에 비하면 웃어넘길 수준이다.
나는 손을 짚어 긴장으로 뻣뻣했던 목덜미를 살살 주물렀다. 그 와중에 아공간의 장막이 걷히고 생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내 닿았다.
여러 감정이 혼재된 열기. 앞으로의 아카데미 생활이 피곤해질 거라는 걸 직감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수밖에.
* * *
강검마와 녹스의 격전 여파는 아카데미 전체를 뒤흔들었다. 성부터 범까지 모든 클래스에선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질서의 가문 아디토레 출신이라는 게 뒤늦게 소문이 퍼져 대부분이 녹스의 강함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말이 있듯, 아디토레라는 위명은 고위급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는 그토록 생경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녹스를 상대한 남학생이 누구인지가 더욱 뜨거운 감자였다. 솔직히 상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녹스 알디토레를 횟감처럼 포를 떠 발라 버렸다. 충격을 넘어선 퍼포먼스였다.
하물며 그는 미천한 특진생 신분. 그 어떠한 소문도, 진위도 밝혀진 게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십 대들의 가벼운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충분한 초유의 관심사였다.
성(星) 클래스 교실 안.
아벨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창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자하의 노을빛에 비낀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러나 황옥처럼 반짝이던 눈동자는 오늘따라 어쩐지 고요했다.
아벨의 뇌리에 검은 머리칼을 한 남학생의 얼굴이 스쳤다.
먼젓번에 봤던 기억에는 조금 더 부드러운 인상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 본 그의 눈에는 형언하기 힘든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칼로 반월을 그리자 녹스의 팔 한쪽이 미끄러지듯 떨어져 나갔다. 마치 원래부터 잘려 있었다는 듯이, 잘리는 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곧 이은 공방은 아벨의 눈에조차 담을 수 없는 신속(迅速)이었다. 무엇보다 그 비현실적인 검극… 보는 것만으로 몸이 움찔했다.
그것도 별 특별한 무장도 아닌, 장미 회칼 두 자루로.
심지어 그녀의 기숙사 부엌에도 같은 칼이 꽂혀 있었다. 괜히 섬찟한 기분에 애꿎게 그것들을 쓰는 게 꺼려질 것만 같았다.
니벨룽의 핏줄이자 검제의 손녀딸이었기에 검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자부하던 그 안목이 무참히 부서지는 걸 느꼈다.
아벨은 몰려오는 잡념을 털며 작게 도리질했다. 청옥색 장발이 찰랑거렸다.
“이름이 강검마…….”
연무장 스크린에 떠오른 그 남학생의 이름을 아벨은 곱씹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신을 능글맞게 대했던 동급생. 이름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이야….
문득,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녀 자신이 강검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응? 약해 보여서. 원래 우리 집은 ‘강자한테 엄하고 약자한테 자비로워야 한다!’라는 게 가훈이거든.’
검제 지크프리트가 그늘진 얼굴로 말했던 신원 미상의 수석이 생각났다. 불현듯 그 학생이 강검마일 것 같다는 싸한 기분.
아니, 정황상 그가 확실해 보였다. 이유는…. 차석인 그녀보다 강검마가 압도적으로 더 강했으니까. 신성한 아공간의 채점이 그 부분을 놓칠 리는 만무하리라.
“…….”
아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훅, 하고 올라오는 부끄러운 마음에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그리고 이내 주먹을 쥔 손이 탁, 하고 가볍게 책상을 때렸다.
‘강검마, 걔는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수치심에 민망했던 감정이 순간 욱, 하는 작은 분노로 일변했다. 아벨을 대하던 그 능글맞던 태도들.
아마, 다 알고서 그 같은 반응을 보였던 거겠지. 아카데미에 입학해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했던 상대가, 알고 보니 조져 버리겠다고 포고한 수석 당사자로 유력한 인물일 줄이야.
생각해 보니 분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수석임을 숨긴 거야 백번 양보해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자신은 속내를 다 털어 놨는데도 강검마는 그 어떠한 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하물며 이름도 어제서야 알았다.
울컥하는 마음에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트윈테일의 금발 여학생이 하품하며 입을 두드렸다.
“음냐, 무슨 일이야.”
“…어, 별일 아니야, 레이첼.”
화들짝 놀라 당황한 아벨은 멋쩍은 기색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자 레이첼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녀를 응시했다.
하트 모양의 눈동자에는 장난 비슷한 짓궂음이 옅게 감돌았다.
“헤에-, 진.짜?”
“응, 요 며칠 운동을 못 했더니, 몸이 찌뿌둥해서.”
아벨은 레이첼을 향해 어색한 눈웃음 지어 보였다. 아름다운 눈썹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창성(槍聖)의 조카이자 아카데미 4석인 레이첼.
사실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애초에 성 클래스에 짙게 깔린 선민사상에 아벨은 친구 사귀기를 꺼려 했다.
근데 레이첼은 특유의 넉살로 계속해서 그녀가 은연중에 쳐둔 벽을 허물려 시도했다.
“아벨, 너 남자 생겼구나?”
“아, 아니야!”
장난 섞인 목소리가 아벨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레이첼은 검지를 곧게 뻗어 잘록한 아벨의 옆구리에 원을 그리며 살살 간지럽혔다. 아벨은 크게 기겁하고는 휙, 뒷걸음쳤다.
“우리 아벨 아씨도 어엿한 한 명의 여자였네? 연애는 완전히 척진 줄 알았는데.”
“진짜 아니라고!”
아벨이 얼굴을 붉히자, 레이첼이 턱을 괴고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누구야? 아벨의 여심을 훔칠 정도면 저런 어중이떠중이는 아닐 테고. 음, 어디 보자-.”
레이첼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가볍게 턱짓해, 레온을 가리켰다.
“레온, 쟤야? 뭐, 얼굴 하나는 잘생겼으니까.”
“아니.”
아벨은 얼굴에 표정을 지우고 반색하며 부정했다. 그러자 레이첼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아벨 아씨는 이상하게 레온한테 적대적이더라. 그럼 어제 그 연무장에서 특진생?”
“!?”
빙고. 아벨의 얼굴이 일순 빨개졌다. 그 반응에 레이첼의 얼굴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슬쩍 일어서 아벨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뭐, 뭐 하는 거야?!”
“가자, 아벨 아씨.”
“어-디를?!”
“랑 클래스!”
그렇게 아벨은 레이첼의 팔 힘에 힘없이 이끌려 갔다. 창지기라 그런지 악력이 억셌다.
* * *
6교시에서 7교시로 넘어가는 쉬는 시간.
드르륵―
랑(狼) 클래스의 교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잦아들었다. 갑작스러운 미소녀 둘의 등장에 랑 클래스 생도들이 목소리 낮춰 속닥거렸다.
얼굴에 미소를 걸고 앞장서는 레이첼과 그녀에게 이끌려 아벨이 쭈뼛쭈뼛 걸어 들어왔다.
심지어 올해 아카데미의 차석인 아벨 폰 니벨룽과 4석인 레이첼 드 뮈라였다. 최상위 반인 성 클래스 내에서 톱을 달리는 두 소녀.
아벨의 미모야 눈에만 담아 두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건 당연했지만, 그 옆의 레이첼도 건강한 매력이 두드러지는 미소녀였다.
그녀가 싱긋 눈웃음을 짓자 남학생들이 가슴께를 붙잡고 뒤로 넘어갔다. 아벨은 뒤에서 푹푹 짧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교단에 우뚝 선 레이첼이 눈매를 좁히며 검은 머리를 찾았다. 얼굴이야 어제 연무장에서 봤기에, 얼추 알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극히 드물어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면면을 빠르게 쓱 한번 훑은 레이첼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떠 올랐다.
오, 찾았다! 확연히 눈에 띄는 검정. 끝부분이 희끗희끗하게 새어 있는 게 특이점이었다.
3번째 줄 창가 쪽에서.
두터운 역사 교본을 베개 삼아 엎드려 자고 있다. 그의 옆에선 빨간 머리의 귀여운 여학생이 헤실거리며 그가 자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 친구인가? 레이첼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 아벨을 놀려 줄 겸 찾아왔지만, 레이첼 개인적으로도 저 특진생은 꽤 흥미로웠다.
레이첼은 옅은 미소를 걸고, 윗단추 두 개를 풀고 강검마에게 다가갔다. 호쾌한 발걸음은 아벨이 말릴 틈도 없다.
웬만한 남자라면 무장이 해제될 만큼 도발적인 몸매. 전투 모드에 돌입한 여성의 의지였다. 시선이 그들을 향해 모였다.
레이첼은 호, 하고 강검마의 귓가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클로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살기 섞인 눈초리를 쏘아 냈다.
강검마는 짧게 침음을 흘리더니 잠을 털 듯 머리를 흔들었다. 꽤 곤히 잤는지, 눌린 쪽 뺨이 붉게 염색됐다.
강검마는 멍한 시선으로 숙였던 고개를 빼꼼히 들어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곧바로 강검마의 넋 잃은 시선과 레이첼의 우윳빛 가슴골이 마주쳤다.
“…뭐야?”
그녀는 옆머리를 귓바퀴 뒤로 넘기고,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강검마에게 속삭였다.
“섰어?”
레이첼의 입가에 미염한 호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