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6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61화(160/300)
161화 검의 호수 (5)
뽀드득.
눈이 소복이 밟히는 소리. 불현듯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 ?
내 밭에서 나는 소리였다. 곧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발이 흩날려 시야가 뿌옇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뜨문뜨문 부는 찬바람 덕에 눈발이 가시고, 점차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잠시 후. 어느 정도 확보된 시야,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가쁜 숨이 잇새로 삐져나왔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세계. 언뜻 설산처럼 보이는 허허벌판에 산등성이가 굴곡진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색감은 백색보다 더 하얗다. 무색(無色)이 있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이로써 현실이 아니란 건 알겠다.
그리고 눈안개가 완전히 개인 뒤, 나는 새삼 확신했다. 이 장소는 명백한 비현실이란 것을.
눈밭에 빽빽이 칼날이 반쯤 박힌 사시미들. 차마 가늠이 안 될 만큼 수많은 칼이 늘어서 있다.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압도적인 정경. 비유하자면 검의 무덤. 사시미는 묘비요, 설산은 묘지인 것 같다.
저벅, 저벅.
멍한 정신과는 상반되게 내 발은 절로 앞으로 내디뎌졌다.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 근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초현실적인 꿈을 몇 번 꿔 봤기에 안다. 본디 꿈이란, 그 경위가 불분명한 것이 일반적.
하지만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 뇌리에 선명했다.
나는 선거장을 빠져나와 사시미를 뽑고, 3군단장 베스나와 대치했다.
벚꽃처럼 쏟아지는 창들을 피하며, 공격할 기회를 노리던 중이었다. 그렇게 놈의 빈틈을 비집고 공격하려던 다음이, 지금이다.
그래도 대충 경위로 유추해 보자면… 이 장소가 어딘지 가능성은 한 가지로 좁혀지긴 한다.
…사후 세계?
치열하게 벌어지던 격전 속에서 어쩌다 공격을 허용당해 죽었다?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 그런 낌새는 전혀 못 느꼈다. 비록 베스나의 마법들이 하나같이 위협적이었다 해도, 마냥 못 피할 정돈 아니었잖아. 오히려 놈은 내가 이리저리 회피하자 놀란 기색이었으니까.
한순간 발을 헛디뎌 마법에 맞아 즉사? 그래도 이상했다. 마법 사출 속도가 음속을 넘었어도 그렇지. 죽음의 순간까지 기억 못 할 리가.
그건 그렇고, 왜 말할 때마다 이렇게 골통에서 메아리치는 거지? 몸은 왜 제 혼자서 움직이는 건데?
머리는 상황을 되짚는데, 다리는 부지런히 전진한다. 검의 무덤을 가로질러 언덕의 정상을 향해서.
정신과 육신이 따로 논다. 위화감이 장난이 아니다. 손발이 얼음장처럼 꽁꽁 얼었는데, 내 맘대로 비비지도 못하고.
찝찝함과 불안감이 동시에 엄습했다. 하필 3군단장과 격전 중에 정체 모를 곳을 배회한다니.
이 순간에 마법에 후려 맞고 있을 나 자신을 상상했다. 초음속으로 내쏘아진 창에 몸이 다져지는 장면, 떡갈비가 되어 꼬르륵 물에 잠기는 내 모습.
염병, 환장하겠네.
불길한 상념에 잠긴 채, 시간 개념도 없이 설산을 오르는 가운데 돌연 망막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파앗―!
[안녕하세요.]……?!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수상한 설산을 걷는 것 이상으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상태창이 말을 걸어오니까. 악몽 속에서 귀신이 아는 척하면 이런 기분일까.
[잠시 정신도 깨울 겸 대화 어떠신가요.] [수락하시겠습니까? ☞ (Y/N)]속으로 읊조려야 나타나는 상태창이 돌연, 대화를 시도한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G.M.’을 시작으로 ‘검의 신’, 급기야 ‘시스템’이 말을 걸어온다니. 기껍진 않으나 여러모로 관심을 받는다.
다만 내게 이런 선문답을 주고받을 시간이 있나. 궁금한 거야 많지만 여기가 어딘지, 또 내가 뭐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때, 내 심란함을 읽었는지 글귀가 떠올랐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당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여전히 분투 중이죠. 오히려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친절하게 내가 품은 불안을 해소해 준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꼭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거겠지. 그 선명한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G.M.’, ‘검의 신’과는 달리 ‘상태창’ 이 녀석은 내 우군이라고 생각을 굳히지 않았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이 아니라 속으로. 몸이 내 뜻대로 안 움직이니 어쩔 수 없다.
[Y/N]▲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인사는 됐고. 이야기의 본론부터 말해. 이 개활지가 어딘지, 왜 내 의지랑 무관하게 설산을 걷고 있는지. 상황을 보니 네가 날 여기러 부른 걸 거 아니야.
[언제나 그렇듯, 성격이 참 급하신 분이시군요. 굳이 안심을 드렸는데 그조차 못 믿으시다니. 뭐, 좋습니다. 조심성 있는 건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니.]…….
말투가 묘하게 약 올리는 것 같다. 중간에 후후 웃음소리도 섞여 있고.
[일단 하나 정정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걷고 있는 이곳은 설산이 아닙니다.]눈이 사방에 깔려 있는데, 눈밭이 아니라고?
[네. 이곳은 본디 호수. 동시에 당신의 내면이 투영된 세계입니다. 비록 지금은 서리가 빗발쳐 얼어붙었지만, 본질이 호수란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그 말을 듣고 시선을 살짝 내려봤다. 뒤덮인 눈 사이로 보이는 노면이 푸르스름하게 불투명했다. 발아래 전체가 얼음장이었다.
[눈치가 없으셔서 모르셨겠지만, 이곳이 얼어붙은 지는 꽤 됐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인(人)의 격이 하락한다.’라고 분명히 경고했죠. 하지만 당신은 깔끔히 무시하고 무슨 일 있으면 칼부터 휘둘렀죠. 사람이 말을 했으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사람?
삐빅!
[우문입니다. 당신에겐 아직 발언권이 없습니다.]…….
상태창의 퍽퍽한 핀잔이 계속됐다. 이거 대화 요청은 명분이고 잔소리가 주목적이었네.
[그렇게 검에 완전히 취해 급기야 자의식조차 잃게 됐습니다. 스스로를 잃은 채 적을 이겼다 한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질까요?]어디선가 가늘어진 눈초리가 느껴졌다.
[명심하세요. 주적은 타인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죠. 이대로면 당신의 심상은 이 호수처럼 얼어붙을 겁니다. 끝내는 영원히 녹지 않는 만년설이 되어 결국엔 회칼만 휘두르는 기계로 전락하겠죠.]이어지는 휴- 하는 짙은 한숨 소리.
[하지만 다행히 운이 좋았습니다. 원래라면 밑 빠진 독처럼 말라 버렸을, ‘인의 격’을 당신의 주변에서 간신히 채워 주니까요.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임.]임?
츠츠츠츠.
채 말이 매듭지어지기 전, 피부를 아리던 찬바람이 흩어졌다. 이윽고 잿빛 하늘이 맑게 개더니 곧 눈발이 뚝 그쳤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능선의 저편에서 솟은 태양이 섬광을 뿌렸다. 동시에 등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부드럽고 말랑한.
기습적인 빛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어렵사리 안력을 돋워 눈을 떴다.
사르륵.
눈이 녹아내리며, 본래의 풍경이 드러났다.
광오한 호수. 잔잔한 물결이 무한한 검들을 어루만지듯 일렁였다.
그 순간.
[외부의 개입으로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억제력을 사용해 사용자의 인격 조정을 시작합니다.]지이잉.
[인(人)의 격이 상승합니다.] [검신(劍神)의 가호 ‘심(心)’이 발현됩니다.]* * *
선거장 내부.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세인은 이마에 송골거리는 진땀을 닦았다.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음.”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가운데 그녀만이 비교적 태연했다.
애초에 세인이 느끼는 불안의 기조는 생도들과 다른 종류인 탓이었다.
눈매를 좁힌 세인은 저 멀리 응시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강검마를 뒤에서 끌어안은 하늘색 머리가 보였다.
“…그래도 너님 덕에 고비는 넘겼음.”
세인이 옅게 웃었다. 그 미소의 의미는 안심이었다.
이내 핸드폰을 끈 그녀는 생도들 틈 속으로 파묻혔다.
* * *
“하아… 하아…….”
숨소리가 탁하다. 사키의 온몸 여기저기에 생긴 상흔에서 피가 쉼 없이 흘렀다.
호수에 부표하는 덩이들을 밟아 가며 간신히 오긴 했는데. 초음속으로 사출되는 마법을 피하기란 무리였다.
그나마 마법의 타깃이 강검마라 치명상은 아슬아슬하게 면했지만, 상태가 처참했다.
급소만 피했을 뿐, 곧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키는 왈칵 피를 게워 냈다. 한바탕 선혈을 쏟아 내고서야 머리가 차가워졌다. 풍선 바람 빠지듯 산소가 줄어 두뇌 활동이 차분해진 것이다.
“…나도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사키는 새파란 입술로 자조했다. 지금 자신은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과격하게 말해 머저리 병신이었다.
이 돌발적인 행동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강검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면서 냅다 달려오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그렇지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의식이 날아간 채 공격을 받아 내고 칼을 휘두르는 강검마를.
저대로 두면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 그 일념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
베스나는 지독하게 퍼붓던 공격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침 마력도 재충전해야 할 시점이었다. 마력을 끌어올리려면 못해도 1분은 필요한 상황. 베스나는 마력을 갈무리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도 미약해 계집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길바닥을 기는 개미를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계집의 존재감은 베스나의 인지 범위 밖이었다. 알았더라면 눈짓만으로 목을 꺾었을 천것이었다.
그런 년이, 피 칠갑을 한 제 몸은 돌보지도 않은 채 강검마를 껴안고 있다.
난데없는 청춘의 현장에 어이없기도 잠시, 베스나의 관자놀이가 사납게 꿀렁였다.
“감히 미물 주제에 나의 싸움을 방해하려 드는 것이냐!”
베스나가 소리를 내질렀다. 여음이 아카데미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에 생도들의 몸이 다 같이 졸아붙었다.
“오냐, 이 천것아. 네 그릇된 행동 덕분에 정신이 깼다. 이참에 방해하는 벌레들을 깡그리 박멸해 주마.”
베스나가 손을 튀기자, 검붉은 기운이 팔에서 흘러나왔다. 사악한 마력이 손끝을 타고 똑똑 떨어져 호수가 오염됐다.
베스나는 가슴 앞에서 두 손을 이리저리 굴렸다. 입술은 계속해서 주문을 영창했다.
이에 수면이 늪지대처럼 찐득하게 들끓기 시작하더니…….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엙!
호수 밑바닥에서 거대한 물뱀이 돋아나왔다. 불완전한 소환이었지만 그 덩치가 별채 건물의 세 배였다. 흐릿했던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력을 완전히 소진해 마경에서 불러낸 권속. 세상을 삼키는 바다뱀.
「요르문간드(Jǫrmungandr)」
펄쩍 날 듯이 뛰어오른 베스나가 뱀의 머리에 착지했다. 그녀는 비늘을 어루만지며 권속에게 속삭였다.
“우리 아가, 게헤나에서 여기까지 불러 내어 미안하구나. 대신 먹잇감이 많으니 양껏 포식하려무나.”
베스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에 세로로 쭉 찢어진 눈깔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工으후루꾸十卞丁下丁卞十꾸루후으工으후루꾸十卞丁下丁卞十꾸루후으工으후루꾸十卞丁”
요르문간드가 괴괴한 울음을 터뜨렸다. 놈이 생도들 쪽으로 아가리를 틀었다. 푹푹 뿜어내는 콧바람에 바람이 반대로 불었다.
“아, 아아, 아아.”
남생도 하나가 절망에 젖은 눈으로 괴수를 올려다봤다. 체념하여 이젠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상황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렇게 뇌리에서 재생되는 주마등과 현실이 교차하던 때였다.
키리링- 키리링- 키리링-
키리링- 키리링- 키리링-
소슬한 검명이 연거푸 울려 퍼졌다.
“……?”
남생도는 허리춤에서 뭔가 깔짝거리는 자극을 느꼈다. 문득, 시선이 내려갔고 이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오늘 아침, 선거장에 나설 때 장난스레 허리에 찼던 다이쏘 사시미. 그 칼날이 저 혼자 흔들리고 있었다.
남생도만이 아니었다.
기호 7번의 지지자들인 사시미단. 1,457명의 허리춤에 차인 다이쏘 사시미가 생명처럼 박동했다.
꿈틀거리던 검들이 이윽고 그들의 허리춤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천 개가 넘는 사시미가 허공에 떠오른다.
“…이건?”
생도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관망했다.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에 사고가 마비됐다.
“끼에엙?”
영문을 모르는 괴수는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측면에서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 괴수는 있지도 않은 귀를 쫑긋 세웠다.
“이기어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날들이 시위의 화살처럼 단숨에 발사됐다. 어마어마한 속도를 뿜으며.
파바박! 파바박! 파바바밧!
요르문간드는 비명인지 포효인지 모를 괴성을 내질렀다. 놈은 거칠게 저항했으나 발악에 불과했다.
빛살들이 요르문간드의 비늘을 찍으며 잘게 토막 냈다. 파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발버둥이 거세질수록 칼날이 가속했다. 그렇게 어지럽게 몰아치는 검극을 괴수는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엙!
요르문간드의 모체가 바람 앞 촛불처럼 맥없이 휘청댔다. 칼날에 노출된 괴수의 몸부림에 땅이 울렸다.
냉소를 잃은 베스나가 뱀 머리 위에서 주저앉았다. 내 새끼의 이마를 쓸며 이름을 애달프게 불러 보았다. 푸슉- 끈적한 피가 튀어 얼굴에 달라붙었다.
“아가……!”
순간 두근거리는 심장. 옆얼굴이 따끔거렸다.
끼기긱- 베스나는 빳빳한 목을 비틀었다. 그녀의 동공이 지진에 맞물려 사정없이 떨렸다.
! ! !
지축이 뒤틀린 가운데 검은 신형이 다가온다.
권태롭게 빛나는 눈동자를 이쪽에 고정한 채, 주머니에 손을 찌른 오만한 걸음걸이로. 새하얗던 백발엔 어느새 칠흑이 내려앉아 있다.
뚜벅.
복마전을 뚫고 울리는 발걸음 소리.
뚜벅.
물기가 촉촉한 눈들에 검은 머리가 맺혔다. 생도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흐물거렸다. 참다 못한 누군가가 환호성을 터뜨렸다.
“강검마다!”
그 한마디를 중심으로 희망이 퍼지기 시작했다.
반면, 충격의 연속에 베스나의 얼굴빛이 죽은 자처럼 질렸다. 그녀는 직감했다. 잘못 건드려도 단단히 잘못 건드렸다.
잠깐 눈 돌렸을 뿐인데. 저 일변한 분위기며, 갑작스러운 이 정체불명의 능력은 진정 무엇인가. 강검마의 손짓 한 번에 회칼들이 요르문간드를 물어뜯는다.
바로 그때 시퍼런 칼날이 그녀의 망막에 어렸다. ‘아.’ 하는 신음을 마지막으로.
파바박!
베스나에게 검날 폭풍이 쇄도하고, 그 모든 장면은 호수에 거울처럼 반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