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6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62화(161/300)
162화 영웅이란
“다들 점심 안 챙겨 먹었어? 왜 이렇게들 매가리가 없어! 동작 봐라. 다리가 보인다. 빨리빨리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 실시!”
“실시!”
선두를 달리는 여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고들 한 건 아는데 상황이 급하다. 상황 끝나면 어련히 챙겨 줄 테니까. 일단 이동에 집중한다.”
“예!”
비상 대책 팀이 목청껏 대답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지만, 장딴지가 터져라 달렸다.
그들은 자신이 생도를 지도하는 오전 구보처럼 쪼르르 여인을 뒤따랐다. 교관복에 묻은 피를 닦아 낼 겨를도 없이.
이원빈은 어쩐지 옛적 라떼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생도 굴리는 교육방식을 이분께 배웠었지.
빌런 연놈들과의 사투가 막 끝난 참이었다. 결과는 호아킨 아카데미 측의 승리.
그 요인은 수적 우위도, 그간 꾸준히 훈련해 온 성과도 아니었다.
팀원들이 다 같이 부지런히 이동하는 가운데 이원빈이 슬그머니 옆을 곁눈질했다.
검은 로브 자락을 사라락 흘리며 뛰는 여인. 비상 대책 팀의 직속상관이자 학원장인 메디아였다.
그녀는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까득까득 이를 가는 게 눈빛에 다급함이 비쳤다. 이원빈이 침음했다.
‘학원장님의 등장으로 판도 자체가 달라질 줄이야…….’
그렇다. 그녀의 등장으로 팽팽했던 사투는 빠르게 일단락됐다.
물론 이원빈과 팀원도 분전했다. 상성이 불리한 싸움이었어도 과감하게 맞서 싸웠다.
그러나 빌런 새끼들은 생각보다 훨씬 강적이었다. 협조성이 없는 빌런임에도 상당한 팀워크로 공격했다.
뿐만인가. 따로 떼어 놓고 봐도 대단히 까다로운 적이었다.
대치가 이어질수록 양상은 불리해졌다. 그렇게 상황이 좋지 않게 치닫던 중, 하늘에서 메디아가 수직으로 낙하했다.
주먹 쥔 오른손으로 땅을 찍고, 왼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녀를 중심으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마치 터X네이터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바로 그다음. 실실 쪼개던 빌런 한 놈은 놀랄 새도 없이 얼굴이 호떡처럼 짜부라졌다.
직후, 빌런들은 즉각 대응했다. 반항이 거칠었다. 온갖 마법을 캐스팅해 메디아 한 사람만을 향해 갈겨 댔다.
그리고 메디아의 강권에 속절없이 박살이 났다. 무력하고 처참하게 폭군의 주먹에 지옥 불로 떨어졌다.
‘아까 전 보여 준 실력이 전성기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니…….’
심지어 학원장님보다 강하다는 쌍둥이 언니도 있지 않은가. 만력(萬曆) 메아인 포이즌.
이원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포이즌 어떻게 돼 먹은 일족인가?
강함이야 더 말하기 입 아프고. 고대인의 후손이라 보통 인간보다 몇백 년은 더 살며 젊음을 유지한다. 사람과 강아지의 체감 수명이 다른 것처럼.
70년 가까이 산 학원장님이지만 실제 나이, 쉽게 말해 신체 나이는 스물 즈음이다.
저 외모도 가호로 나이 들어 보이게 의태 한 거니까. 그래 봤자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긴 했지만.
“잠깐, 정지!”
메디아가 팔을 뒤로 뻗어 부하들을 물렸다. 관성에 못 이긴 교관 몇 명이 진흙에 코를 박았다. 개중엔 헥헥거리던 최설아도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궁……!
격동하는 대지. 폭우가 잠잠해지나 싶더니 이젠 땅이 흔들린다.
별안간의 지진에 교관 일동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균형을 잃은 전열이 무너져 그들은 이내 땅을 짚었다.
메디아만이 홀로 선 채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선거장 건물 방향으로.
끼에에에에에에에엙!
그녀의 눈에 하늘 높이 솟아나는 거대한 신형이 드리웠다.
“…요르문간드?”
메디아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마경 게헤나에 똬리를 틀고 있어야 할 괴물 뱀이. 갑자기 아카데미 부지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애써 유지하던 평정에 쩌적- 실금이 갔다. 사태의 심각성이 여실히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요르문간드는 자신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다. 생긴 건 마수 같으나 마족으로 분류되는 요마였다.
적어도 틀딱 지크나, 고릴라 뮈라가 함께해야 토벌 가능성이 있다.
홀로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간 한 입 거리가 될 뿐이었다.
“제기랄!”
메디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얬던 윗니가 피로 물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 생도들의 안전이다. 그렇지만 토벌전이 시작되면 생도들은 무조건 휘말리고 만다.
그 점 하나가 못내 가슴을 할퀴었다. 메디아가 주저하는 이유였다.
그녀 자신이야 살 만큼 살았다지만, 그 어린아이들에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모든 게 자신의 모자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인명 사고가 났다는데, 더 이상 피해를 늘릴 순 없다.
더군다나 학원장씩이나 된 자로서 저깟 괴물한테 몸을 던지는 게 무섭겠는가.
자신에겐 외세로부터 아카데미를 보호할 책무가 있다. 이를 위해선 뼈가 바스러지는 순간까지 맞설 수 있다.
이곳 호아킨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게 배웠고.
학원장이 된 현재.
자신이 생도들에게 가르치는 영웅이란 존재는 그런 거니까.
‘그렇다면.’
메디아는 불끈 쥔 주먹을 양 옆구리에 붙인 뒤, 품세를 밟았다. 그리고 두 손에 실은 용력을 그대로 단전에 쑤셔 넣었다.
[시인의 가호가 발현됩니다.] [서약의 가호가 발현됩니다.] [개방의 가호가 발현됩니다.]메디아의 눈에서 녹빛 양안이 흘러나왔다. 전 근육에서 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갈(喝)!”
외침과 동시에, 허벅지와 종아리가 다섯 배가량 부풀었다.
단숨에 도약해 저 혀를 날름거리는 주둥이에 정권을 때려 박는다. 메디아가 핏발 선 얼굴로 말했다.
“내가 저놈을 상대할 테니, 너희는 생도들의 안전을 확보해!”
교관진에 지령한 메디아가 발을 떼기 직전. 최설아의 감각에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요곤?
가만히 노면에 심고 있던 고개를 빼꼼 들었다. 곧장 그녀의 눈빛이 구슬처럼 반짝였다.
“주군!”
‘주군?’ 학원장을 포함해 전원 고개를 치켜올렸다. 면면에 경악 섞인 적막이 맴돌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엙!
뱀의 비늘에 은빛 실선들이 새겨진다. 피어가 절규로 찌그러졌다.
돌처럼 딱딱했던 메디아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녀는 눈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녹색 홍채가 한껏 더 휘둥그레진 모습.
요르문간드가 이리저리 피해 보려 몸체를 빨랫감처럼 출렁거렸다. 칼날 다발은 끈질기게 추격하여 뱀의 허물을 벗겼다.
…쿵!
한참을 울부짖던 거체가 내려앉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메디아는 생각했다.
보란 듯이 요르문간드를 회 친 자가 누군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수 있노라고.
* * *
사키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빤히 강검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강검마의 등 뒤로 공작 꼬리처럼 촤르륵 펼쳐진 사시미들. 기이함과 동시에 신비한 광경이었다.
공중에서 둥둥 뭉쳐 다니는 칼날이 손짓 한 번에 적을 짓이겼다. 더불어 태양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괴수를 무너뜨렸다.
괴물의 죽음은 사키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이곳까지 달려온 마당에 이성이 제 역할을 하진 못했으니까.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강검마의 안위뿐이었다.
사키는 다시 강검마의 등을 봤다. 검은 머리가 바람에 기분 좋게 나부끼고 있었다. 돌연 눈물이 차올랐다.
“…돌아왔구나.”
강검마가 뒤를 돌아봤다. 무색무취했던 표정에 감정이 번졌다. 그가 옅게 웃어 보인다.
“고맙다. 덕분에 머리가 좀 식었어. 이번 일 마무리되면 박스째로 양갱 사 줄게.”
“……?”
“비싼 거로.”
그 한마디를 남기고서 강검마는 정면을 바라봤다. 게슴츠레 가늘어진 눈으로 적을 응시했다.
앞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음. 베스나는 손 발가락만 찌르르 떨 뿐, 움직이지 못했다.
일전이 얼추 결착이 났다. 그러니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었다. 강검마는 베스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올수록 베스나는 냉기에 휩싸였다. 영멸이 곧이었다.
사력을 다했다. 비전 마법으로 몰아쳤고, 최흉의 권속을 불러냈다.
하지만 그 모든 수가 무색하게 자신은 죽어 가고 있었다. 차츰차츰 가까워지는 저 괴물에 의해서.
인간은 마족을 두려워한다. 이유야 지극히 단순했다. 우리가 저 쥐 떼처럼 옹송그린 하찮은 것들보다 월등한 존재니.
강자가 약자를 포식하는 건, 당연한 순리이자 새겨진 본능이다.
그런데 왜, 미물들이 젖과 꿀이 흘러넘치는 땅에 살며, 강자인 우리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마경에 내몰렸는가.
베스나는 순리를 거스르는 이 상황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니 인간은 모조리 죽인 다음, 이 비옥한 대지를 차지하리라.
더구나 머지않아 그분께서 다시금 눈을 뜨시면 인계는 비탄에 젖어 들 것이다.
핏빛 미래가 뇌리에 자연스레 그려졌었다. 상상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왔다, 저 정신 나간 인간을 마주치기 전까진.
저벅.
강검마가 베스나와 일곱 걸음 남짓한 거리를 두고 섰다. 낮게 가라앉은 눈은 3군단장을 굽어보았다.
미지의 감정이 베스나의 영혼을 건드렸다. 그녀가 빠득빠득 소리를 질렀다.
“하찮은 벌레 새끼 주제에 그딴 눈깔로 나를 봐!? 네놈이 아무리 강해 봤자다, 인간이여! 그분께서 재림하시어 이 땅을 검붉게 물들일 것이며……!”
“야.”
강검마의 외마디가 발작을 칼같이 잘라 냈다. 그가 귀를 후비며 말했다.
“원래 말 많은 악당이 가장 비참하게 죽는 거 모르냐? 네 동생은 말이 적어 비교적 곱게 갔는데, 한 방에.”
“뭐, 뭐야!?”
“그리고 ‘그분’, ‘그분’ 거리는 거. 네가 수준 미달이라서 뒷배나 자랑질하는 주제에, 벌레니 뭐니 하는 거 같잖다.”
“어, 어어, 어찌! 가, 감히! 그분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테니.”
강검마가 주머니에서 뺀 손을 들어 올렸다. 수천의 사시미가 베스나에게로 총구처럼 겨누어졌다.
“죽어.”
칼날들이 날카로운 그림자를 만들어서, 베스나의 얼굴을 은빛으로 뒤덮었다.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이 사시미가 가볍게 곤두박질쳤다. 비명이 몇 번인가 섞여 들렸으나 얼마 후 잦아들었다.
…그렇게 주위가 피로 흥건해졌을 때.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기 더미가 뽀글뽀글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허공을 누볐던 검들이 한 개, 두 개.
뭉텅뭉텅 물 위에 묘비처럼 꽂히기 시작했다. 참변으로 희생된 생도들을 애도하듯이.
해질 녘의 태양빛이 비구름을 밀어냈다. 휘몰던 찬바람이 가시고 피부에 열이 올랐다.
생도들은 각자 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만, 생각은 공통된 방향으로 흘렀다.
자신이 모멸의 시선을 던졌던 특진생. 강검마는 어느 하나 등 떠밀지 않았는데 전장에 나섰다.
인정과 이해를 바라서는 아니었다. 짐작건대, 자신이 해야 했기에 나섰을 것이다.
그 모습은 한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생도는 이 말이, 저토록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잠깐 고민했다.
고개를 들었다. 호아킨 아카데미에 햇살이 드리운다. 안구가 시렸다.
눈을 감았다 떴다. 소년일지 소녀일지, 아니면 둘 다일지 모를 생도는 호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영웅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