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65)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65화(164/300)
165화 의도치 않은 행운 (1)
다음 날 아침.
기숙사에서 나오자 고동색 세단이 입구에 서 있었다. 관리가 워낙 잘되어 뽀독뽀독 빛이 났다.
기숙사비가 가장 저렴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자태. 지나가는 생도들의 눈길이 차에 한 번씩은 머물렀다.
‘누구 차지?’
호기심 어린 시선들. 하지만 나는 금박이 입혀진 번호판 때문에 누구의 차인지 어림할 수 있었다. ‘기적의 가호 M’ 설정집에서 봤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순금이 입혀진 번호판. 저 차에 자유로이 시승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몇 안 된다.
대통령과 칠성 영웅급. 대통령이 행차하셨을 리는 없으니, 가능성은 당연히 후자다.
지이잉.
꺼멓게 선팅된 차 창문이 내려졌다. 그 틈 사이로 보이는 멋들어지게 선글라스를 낀 여인. 그녀가 검지로 색안경을 살짝 내려 콧등에 올렸다.
녹색 고리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메디아였다. 그녀가 말갛게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검마야, 여기야! 얼른 타!”
“…….”
잠깐 어이가 없었다. 어젯밤, 성 과장이 자신을 대신해 다른 사람이 나를 협회까지 데려다줄 거라고 문자로 언질 주긴 했다. 설마 그게 학원장님일 줄 알았겠는가.
성 과장의 묘한 말투에서 낌새를 눈치챘어야 하는데.
어쩐지 문자에서 조심조심이 뚝뚝 묻어나더라니, 이런 내막을 숨길 줄은 몰랐다.
‘성 과장님?’
안 그래도 협회 도착해서 가이드를 칠성의 창성이 자처한 판이다. 거기에 데려다주는 건 칠성의 현자다.
스케일이 어쩌다 이리 커진 거지? 과장 좀 보태서 내 사적인 일에 대통령 두 명이 달라붙은 격이다.
아니, 국제적 위상은 대통령 이상이지. 아무튼 과하단 거다. 부담감에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고.
하아-
좋게 생각하자. 아공간 포털은 개인적 용무로 사용 불가. 원주에서 서울까지 버스 타고 1시간 반 남짓이지만.
저 차로 이동하면 40분 컷이다. 왜냐면 국빈급 차로가 따로 있거든.
부조리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강조하지만, 이 세계는 엄연히 신분 사회다. 민주주의는 이곳에선 낭만이다. 빌어먹을.
나는 혀를 찼다. 그리고 슬슬 다가가 뒷좌석에 올랐다. 탑승과 동시에 메디아의 격한 환영이 시작됐다.
“아이고, 우리 검마. 이거 며칠 만에 보는 거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켁- 켁-”
메디아가 집게손가락으로 내 양 볼을 꼬집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물렸다.
“학원장님, 일단 알겠으니까. 출발하신 뒤에 이야기하시죠.”
“너무 반가워서 그만. 기사님, 출발해 주세요.”
뻥 뚫린 가도를 달리는 차 안.
나와 메디아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서두는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축약하자면, ‘요새 검마 너 완전 난리더라!?’, ‘검마, 너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에 침이 마르게 나를 칭찬했다.
다만 메디아의 업된 말투가 내겐 미묘하게 느껴졌다. 지금 그녀는 애써 속내를 감추고 있다.
메디아는 학원장으로서 소임 의식이 남다르다. 매번 내겐 ‘박봉이다’, ‘복리후생이 없다.’, ‘업무량이 살인적이다.’라며 툴툴거리지만, 생도를 누구보다 아끼는 그녀다.
그런데 며칠 전, 생도들이 무더기로 죽었다. 죄책감과 중압감이 그녀의 양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터.
나는 메디아를 지그시 봤다. 검은 안경알 너머 보이는 건 눈 밑에 내려앉은 검은 피로였다. 몇 날 며칠을 잠을 못 잤단 방증이었다.
세상은 그녀를 호아킨의 학원장, 칠성의 현자라 추앙한다.
하나 그녀 또한 결국 한 명의 인간이다, 죄악감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치는.
잠시 후, 메디아의 눈빛이 돌연 깊게 잠겼다. 그에 운전 중이던 기사님은 귀를 닫았다. 차내 분위기가 사뭇 엄숙해졌다.
메디아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숨을 길게 흘렸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사실, 검마 네게 이것부터 질문했어야 하는데… 그때 네가 상대했던 적…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급’이야?”
“예. 당시에 적은 자신을 3군단장 베스나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상대해 본 저로서도 맞는 것 같고요.”
“…헉!”
내 말에 격한 반응은 앞쪽에서 나왔다. 룸미러에 반사된 기사님의 모습. 새하얗게 표백된 얼굴과 운전대를 잡은 손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하…….”
메디아는 관자놀이를 살살 마사지했다. 그녀의 표정은 여상했다. 예상과 당사자의 증언이 딱 맞아떨어졌으니까. 그녀가 부연했다.
“생도들은 그때 적이 누군지 몰라. 심지어 교관들도 말이야. 솔직히 살면서 볼 일이 전혀 없는 군단장을 봤다는데,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겠어? 그냥 엄청난 강적이라고만 생각하겠지.”
“그렇겠네요. 그리고 적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는 편이 생도들한테도 충격이 덜 하겠어요.”
짐짓 고개를 끄덕이자, 메디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곤 인자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쩜 애가 이렇게 의젓할 수가 있지? 진짜 너무 애어른 같다니까. 근데 검마야,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아.”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이 사실은 아카데미랑 협회에서 합심해서 정리한 다음 공표할 거야. 네가 생도들을 위해 어떤 적을 상대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누구였는지. 그래야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겠지.”
메디아는 쓰다듬던 손을 떼고 살포시 내 손을 맞잡았다.
“더불어서 얼마 전에 틀딱한테 연락이 왔는데, 슬슬 준비가 끝나 간대.”
“준비요? 무슨?”
“젊은 애가 이리 깜빡깜빡해서 되겠어? 당연히 네 칠성 승계 건이지!”
“……!”
딸꾹-!
운전기사가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메디아는 말을 계속했다.
“5군단장 아고르와 3군단장 베스나 토벌까지 했잖아. 이참에 쭉쭉 밀고 나가야지. 아마 두 달 내로 모든 준비가 끝날 거야. 오늘 내가 협회 한국 지부 가는 것도 그걸로 고릴라랑 모의하러 가는 거거든. 물론 다른 사안도 포함해서.”
기사는 이 비좁은 공간에서 너무 많은 걸 들었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핸들을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기사는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순풍이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훑었다.
…그런 와중, 황금 번호판이 서울에 진입했다.
* * *
한국 협회 지부에 차량이 들어섰다. 대기 중이던 요원들이 재빨리 자동차 문을 열어 주었다.
문틈 새로 곧은 다리가 뻗어 나오더니 깔린 카펫을 밟는다. 요원들이 다리를 향해 일제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협회 한국 지사 방문을 환영합니다! 호아킨 아카데미의 학원장이시자 칠성의 현자, 메디아 포이즌 님!”
메디아가 곧게 섰다. 정오의 햇살을 받은 선글라스가 날카롭게 빛났다.
벌컥
그다음 순간, 반대편 문이 열렸다. 요원들이 재차 우렁차게 복창했다.
“협회 한국 지사 방문을 환영합니다! 호아킨 아카데미의 생도이시자 호아킨 참사의 영웅, 강검마 님!”
“…예, 뭐.”
강검마는 뻘쭘한 기색으로 메디아 옆에 섰다. 그가 속삭이듯 메디아에게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환대가 너무 거창했다. 이 정도면 꽃목걸이라도 걸어 줄 기세였다. 메디아가 대답했다.
“영웅 협회가 원래 보수적이라 그래. 원래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상명하복을 딱딱 시키잖아. 뭐… 이유가 그뿐만은 아니지만.”
그때였다.
쿵쿵- 발걸음 소리와 함께 노면이 진동했다. 요원들이 말없이 길을 텄다.
메디아의 눈매가 게슴츠레 좁혀졌다.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왔네.”
강검마는 고개를 들었다. 멀찌감치부터 존재감을 과시하며 다가오는 신형이 보였다. 중후한 풍채와 야수 같은 얼굴을 한 사내. 창성, 리차 드 뮈라였다.
“크하하, 이거 몇 년 만에 보는지 모르겠군. 그간 별고 없었나, 할멈?”
창성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또각또각 메디아는 구둣발을 울리며 그 앞에 마주 섰다.
“야, 고릴라.”
“왜 그러나, 할멈.”
창성이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후우- 진한 숨을 토하는 메디아. 그녀가 짧게 숨을 집어삼켰다.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랬지!”
쇄애액!
메디아가 뾰족한 고성과 함께 정권을 내쏘았다. 주먹이 공기를 찢고서 창성의 아랫배에 박혔다.
쿵―! 파공음이 북소리처럼 났다. 충돌의 여파로 돌풍이 사납게 휘몰았다.
‘뭐지?’
강검마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뜸 주먹부터 꽂는 게, 칠성 영웅 간의 인사인가? 친구끼리 투닥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돌바닥이 깨지고, 바람이 역류했다. 분명하다, 저건 살심을 담아 내지른 공격이었다.
전원 경악으로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진 가운데, 창성이 해맑은 미소로 말했다.
“이거 자네도 나이가 들었군. 예전엔 창자가 뒤집히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아린 정도구먼.”
말은 그리하면서 피가 턱을 타고 흘렀다. 메디아가 코웃음 쳤다.
“어쭈, 허세는. 오랜만에 봐서 살살 쳐 줬는데 버틸 만한가 봐? 그리고 며칠 잠을 못 자서 그런 거거든? 고릴라, 너야말로 복근이 푸딩처럼 말랑말랑해졌는데?”
창성의 미소가 피로 좀 더 빨개졌다. 한 박자 늦게 몰려오는 통증. 내장이 상했다. 창성은 배를 매만지며 애써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근래 단련을 게을리했더니 이리되더군. 쿨럭- 그래도 자네는 책상머리 앞에 있는 것 치고, 건강한 것 같군. 안심일세, 할…….”
“할?”
“…메디아.”
그제야 메디아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렸다. 그 장면을 보던 강검마의 눈에 고민이 깃들었다.
과연 칠성을 승계하는 게 맞는 선택일까? 인사가 이런 주먹다짐이라면 진지하게 망설여졌다.
다들 이도 저도 못 하는 사이, 강검마는 창성과 눈이 마주쳤다.
“직접 보니 이리 반가울 수가!”
창성은 들뜬 표정과 달리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내색은 안 하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내 자네를 보고 싶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부리나케 달려왔어! 이왕 왔으니 다 같이 점심부터 하지.”
창성이 악수를 청했다. 메디아가 그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엄한 수작 부리지 마. 모노리스로 검마를 안내하는 것까지가 고릴라 네 역할. 게다가 검마가 용무 볼 동안 우리끼리 협의 봐야 할 사안이 한두 개야?”
“에잉, 사내들끼리 고기 좀 뜯으면서 우정 좀 돈독히 할까 했더니.”
창성이 입맛을 다셨다. 메디아가 으르렁 엄포를 놓았다.
“산적이야? 고기나 뜯게? 그리고 밥은 핑계고 우리 검마 살살 감으려는 거 모를 줄 알아? 고릴라가 정치에 물들더니 뱀이 다 됐어.”
“메디아, 자네가 생도들을 아끼는 마음은 알지만 가끔은 과보호가 아닌가 싶군.”
메디아가 통렬하게 일축했다.
“호아킨 참사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바엔, 과보호가 나아. 그러니까 이 시국에 내 생도들한테 누구도 접근할 수 없어. 설사 생사를 함께한 전우일지라도. 그게 학원장인 내 의무거든.”
“…허허.”
창성은 우물쭈물 뒷목을 긁적였다. 메디아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며칠 밤낮을 샌 초췌한 눈이 창성을 노려보았다.
“너나 나나 이번 참사에 각자의 부채가 있어. 오늘은 그 책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날이란 걸 명심해. 청승맞게 고기나 뜯는 날이 아니라.”
“허, 참. 미안허이.”
창성이 축 늘어진 어깨로 앞장섰다.
“따라오게. 모노리스로 바로 안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