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6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68화(167/300)
168화 모노리스: 고립된 바위
“강검마로부터 추가적인 요청 사항은 없었나?”
창성의 물음에 보고(寶庫) 대문 앞에서 기립하고 있던 직원이 대답했다.
“네, 그냥 끝나셨다는 말만 인터폰으로 하셨습니다. 굳이 위화감이랄 게 있다면, 목소리가 조금 슬픈 기색이셨습니다만……. 제 기우일 것 같습니다.”
“그렇군. 보물 하나라도 달라고 했으면, 흔쾌히 양도할 생각이었는데. 정말 그 모노리스만 보고 끝난 건가. 정말 특이한 친구야. 원래 이러나?”
창성이 메디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담담한 눈으로 화답했다.
“검마가 원래 그래. 물욕 같은 거 전혀 없어. 애가 애 같지 않고, 좀 많이 담백하다 해야 하나.”
“그런 부분은 젊었을 적의 니벨룽과 닮았군.”
“지크랑은 결이 좀 달라. 틀딱이야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자라서 그런 거에 관심이 없는 거고, 검마는 뭐랄까……. 물질이나 명예보다도 다른 쪽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 걔만 보면 왠지 나도 초조해지는 기분이야. 그래서 곁에서 더 보듬어 줘야 할 것 같고.”
메디아는 말끝을 흐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담은 됐고, 일단 들어가자.”
“그러지.”
보고로 들어선 두 사람의 시야에 슬슬 모노리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강검마 또한 보였다.
인기척이 느껴져도 강검마는 모노리스만 바라보았다. 메디아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 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제야 강검마가 모노리스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조금 놀란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을 마주 보았다. 말없이 한참을.
봄날의 신록처럼 싱그러운 머리카락과 녹안. 짧은 순간이나마 대화를 나눴던 꼬마와 겹쳐 보였다. 강검마의 눈빛에 희미한 연민이 깃들었다.
‘메스더.’
단순히 퀘스트라 여겨 충동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여파로 역사가 개변했다. 그가 체험했던 현장은 허상이 아니었다. 클리어 후 떠오른 상태창이 그 방증이었으니까.
‘히든 – Crown of flower를 촉매로세계 선의 역사가 다시 쓰입니다.’
추가 보상만 주어졌다면 분명히 후회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자신이 역사를 뒤틀어 버린 것 아닌가. 과거를 건드릴 시, 전망이 불투명해지는 시간 역설이 발생한다. 이른바, SF 영화에서 나오는 타임 패러독스.
하여 이 일로 인해 어떤 대사건이 촉발될지를 생각하면 어느 보상이건 부질없었다. 숱한 명예든, 금은보화든, 정령급 가호든. 그 모든 것들의 가치는 상실된다.
만행이었을지 모른다. 정사가 크게 틀어진 마당 아닌가. 한데 역사에마저 변곡이 일었다? 나비 효과는 두말하면 새삼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강검마의 눈빛엔 한 점 후회조차 없었다. 되레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검마가 모노리스 뒤편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앞쪽과 상반된 분위기의 그림들이 드러났다.
목초지를 뜯는 소와 양, 텃밭을 일구는 일련의 과정을 묘사한 벽화였다. 모퉁이엔 비뚤배뚤한 글씨로 무어라 적혀 있었다.
꼬마가 어떻게 그 여생을 살았을지 짐작게 하는 그림들. 그녀의 발자취가 이 돌에 새겨져 있다.
강검마는 속으로 길게 탄식했다.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여운이 몹시 컸다.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나 자신부터가 낯선 게임 세계에 어느 날 뚝 떨어졌다. 결은 좀 달라도 처지는 비슷했다. 고독.
강검마는 돌연 메디아를 보았다. 그리고 짧게 웃었다. 그 당돌했던 꼬맹이가 무럭무럭 성장했다면 어떻게 생겼을지 알 만했다.
‘앞에 있는 미인과 몹시 닮았겠지.’
전부를 잃었던 아이의 후손은 청춘을 보듬는 어른이 되었다. 든든한 지붕이 되어 호아킨 아카데미를 지킨다. 나뿐만 아닌 생도 모두에게 자애를 베풀고 있다.
비록 꼬마는 외로움 속에 살았을지언정, 그 후손은 풍부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강검마는 미약한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씁쓸했던 미소가 부드러운 호선으로 바뀌었다.
말없이 모노리스를 살피던 강검마가 문득 메디아에게 물었다.
“학원장님, 혹시 저기 모퉁이의 글씨 뭐라 쓰여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네 부탁이면!”
메디아가 격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모퉁이를 유심히 보았다.
“형태가 원시적이긴 한데… 골조 자체는 ‘룬어’인 것 같은데…….”
최고 지성 중 한 사람인 그녀였다. 거기에 포이즌은 문자, 언어학에 일가 대대로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문법이 예스러운데 그래도 체계는 잘 잡혀 있어서, 해석은 가능하겠다.”
메디아가 글귀를 들여다보는 가운데,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창성이 껴들어 말했다.
“…근데 원래 이런 게 적혀 있었었나? 이렇게 긴 글을 협회 연구진들이 이걸 발견 못 했을 리는 없다 본다만.”
“아, 좀! 조용히 해, 고릴라! 검마가 모처럼 부탁한 건데 집중 좀 하게!”
팩- 창성을 째려보던 메디아의 시선이 강검마에게 넘어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냥한 눈웃음. 창성이 조금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그렇게 해독을 마친 메디아가 내용을 읊어 주었다.
아저씨가 말도 없이 사라진 게 샘이 나서, 어떻게든 말을 전하고 싶어서 방법을 찾다가 ‘글자’라는 걸 만들었어.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똑똑하다고 누차 말씀하셨는데, 진짜였나 봐.
앞으로 차차 다듬어 나가야겠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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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떠나고 스무 번째 봄.
그거 알아? 솔직히 처음 혼자 남겨졌을 때, 아저씨를 엄청나게 원망했다?
아, 물론 아저씨한텐 깊은 고마움을 느껴. 그 날개 달린 괴물로부터 구해 줬잖아.
그래도 말 한마디 정돈 남겨 주고 떠났으면 좋았을걸……. 돌이켜보니 내가 만든 꽃 왕관도 그냥 내버려 두고 갔었네? 참 나, 웃겨서!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아저씨 하나도 안 보고 싶어.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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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떠난 뒤, 쉰 번째 봄. 나 키 컸다? 물론 아저씨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웬만한 풀숲은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야!
근데 지금 기억난 건데, 아저씨 나보다 세 살 어리다고 했지……?
나 왜 여태껏 아저씨라 부르고 있는 거지? 동생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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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하고 두 번째 봄.
안녕, 동생? 나 말이야, 백 년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문득 동생은 머나먼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싶더라고.
여자의 직감이랄까? 그런 판단이 든 뒤로는 기다리는 건 그만뒀어. 그냥 먼 훗날 이 글이 동생에게 닿길 바랄 뿐이야. 그래도 작은 욕심을 부려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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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 다섯번째 봄.
작년 겨울은 유독 혹한이었어. 그럴 때마다 혼자인 게 슬퍼져. 이렇게까지 오래 살아야 하나…….
몇 번이고 그만 살고 싶다 생각이 들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겠더라. 동생, 네가 구해 준 목숨이잖아. 그러니까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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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 마흔일곱 번째 봄.
삼백 아흔한 번째 봄.
사백 열두 번째 봄.
사백 일흔여섯 번째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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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번째 봄.
그거 알아? 나 오늘 오백 스무 번째 생일이다?
요새는 힘들다는 생각을 잘 않게 됐어. 오히려 살아있어서 행복하다고 느껴. 이젠 그냥 천년만년 살고 싶어질 정도야.
…근데 만약 내가 그렇게 쭉 오래 살면.
…….
언젠간 아저씨가 있을 미래에 닿을 수 있을까?
메디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강검마는 모노리스에 새겨진 흔적을 바라봤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정갈해지는 글씨체. 한 자 한 자 삶에 대한 고찰과 투쟁이 담겨 있었다.
“아저씨나 동생 둘 중 하나만 해, 이 멍청아…….”
강검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새는 신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 순간.
―파앗!
[인(人)의 격이 크게 상승했습니다.]강검마는 까끌까끌한 석 표면에 이마를 대고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쿵쿵 연신 찧어 댔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토록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보는 눈만 없다면 소리 내어 울었으리라.
* * *
용무를 마친 뒤, 우리는 서울 지부에서 나섰다. 메디아가 한사코 말렸음에도 창성은 끝내 마중을 나왔다.
차에 오르기 직전 창성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식사 한 끼 대접 못 하고 보내 미안하군. 해 준 것도 딱히 없고 말이야.”
“…….”
나는 그 두툼한 손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맞잡았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음에 한국 오시면 그때 하시죠.”
시원시원한 승낙에 창성과 메디아가 흠칫 놀라는 건 동시였다.
제안한 창성조차 의외라는 반응. 악수한 채 잠깐 얼이 빠졌던 창성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크하하, 꼭 그러세!”
수많은 인사를 받으며 나와 메디아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검은 세단은 곧장 출발했다.
나는 잠시 차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메디아의 모습.
풀썩.
이내 그녀의 머리가 내 오른쪽 어깨에 안착했다. 조용히 어깨를 내주었다.
룸 미러로 지켜보시던 기사님도 적정 속력으로 감속해 주셨다. 잠잠해진 배기음.
덕분에 아카데미에 도착할 때까지 메디아는 깨는 일 없이 곤히 잘 수 있었다.
* * *
란슬롯 컴퍼니. 존립하는 히어로 에이전시 중 단연 으뜸이라 여겨지는 회사다.
“하아… 하아…….”
번지르르한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남자가 헐레벌떡 가로지르고 있었다. 올 뮤트의 비서, 케인이었다.
케인은 훈련실이라 적힌 문에 다다라서야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노크조차 생략하고 문을 열었다. 서구식 매너에 어긋나는 행위였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엘리!”
220파운드짜리 덤벨을 까딱이던 올 뮤트가 눈만 돌렸다.
“무슨 일이야?”
“너, 그때 축제 때 봤던 사시미 검성 기억나지?”
케인의 말에 올 뮤트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나지. 이번에도 호아킨 참사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족과 맞섰다고 외신에서 보도를 계속 냈잖아. 기사만 보면 거의 시조의 영웅의 재림이라던데.”
“야, 엘리! 지금 경쟁자 칭찬 늘어놓을 때야?”
올 뮤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경쟁자?”
“너랑 칠성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게 경쟁자지, 그럼 동료냐?!”
“난 또 뭐라고.”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오자 케인이 버럭 소리쳤다.
“지금 운동이나 할 때냐고! 방금 백악관에서 전화 왔어. 엘리, 네가 차기 칠성이 되지 못하면 우리 컴퍼니에 세금 폭탄을 때리는 법안을 결의할 거래!”
“세금 내는 게 뭐 이상한 일이라고. 그간 안 냈던 거 몰아서 내는 거잖아.”
“장난해? 토해 내야 할 금액이 무려 3억 달러라고! 한화로는 3천억! 우리 컴퍼니 분기 매출이라고! 그거 몽땅 징수당하면? 상상은 해 봤어?”
올 뮤트는 덤벨을 들었다 내리며 무심히 반문했다.
“납세는 미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야.”
“…….”
“그리고 알잖아, 나 칠성 자리에 그렇게 큰 관심 없는 거. 하도 백악관에서 보채서 그런 거지, 그 자리에는 마땅한 사람이 앉는 게 당연해. 사시미 검성, 걔 이번 호아킨 참사의 영웅이잖아.”
그렇다. 올 뮤트는 이런 영웅이다. 가감 없이 남을 인정할 줄 아는 올곧은 성미.
그렇기에 대중은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정반대로 에이전시 입장에선 골치가 아팠다.
정직함? 좋다 이거야. 다만 이 사회는 뭐든지 돈으로 귀결된다. 한데 비즈니스 정신이 결여된 간판 스타라……. 미합중국의 자본주의를 욕보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케인은 울상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다 들리게끔 최대한 애처로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래… 네 의사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본국에서 차기 칠성이 배출될 거라 기대에 부풀어 있던 ‘국민’은 다 바보 되는 거지, 뭐.”
“…….”
“그리고 컴퍼니가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다 ‘국민’의 바람을 반영한 거야. 그들은 올 뮤트인 네가 칠성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투둥- 둔탁한 소리. 떨어진 덤벨이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 케인의 발부리에 부딪혔다. 케인은 올 뮤트를 흘깃했다.
착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올 뮤트의 눈빛에 비쳤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말했다.
“호아킨 아카데미로 가는 비행기 편 끊어 놔.”
케인은 떠오르려던 미소를 애써 지웠다.
“언제로?”
“최대한 빨리.”
“OK.”
케인은 곧바로 전화를 걸어 전용기를 준비시켰다.
‘미안해, 엘리. 치졸한 건 아는데 회사가 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고결한 영웅 올 뮤트를 자극할 수 있는 유일한 흉수.
그것은 그녀의 남다른 애국심, 국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