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7화(17/300)
17화 바람 잘 날 없다 (2)
느닷없이 벌어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
쉬는 시간을 쪼개 가며 피로를 달래고 있었는데, 눈을 떠 보니 웬 야생마 같은 소녀가 젖가슴을 내 코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만 살짝 올려 누군지 얼굴을 살폈다. 금발의 트윈테일에 하트 모양의 눈동자.
학원장 메디아에 준하는 원초적인 굴곡의 몸매을 지닌 건강미 물씬 나는 미소녀. 짧게 수선한 교복 치마와 무릎까지 감싼 까만 니삭스가 두드러진다.
창성(槍聖)가의 레이첼 드 뮈라. 기적의 가호에서 비중 높은 히로인이자 아카데미의 4석.
‘갑자기 얘가 왜?’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무런 접점도 없던 사이인데 눈떠 보니 레이첼이 윗단추 두 개를 풀고 고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혹여 꿈인가 싶어 눈도 한두 번 크게 끔뻑여 봤지만, 현실이 맞다. 그도 그럴 게, 섬유 유연제와 흡사한 살 냄새가 코끝을 휘감았다. 조금 더 숙이면 얼굴이 가슴에 파묻힐 것 같다.
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깃들자 레이첼은 고개를 비스름한 각도로 살짝 틀며 말했다. 윤기 나는 금발이 그녀의 어깨를 훑었다.
“섰어?”
“뭐가?”
“왜, 남자들은 자고 일어나면 아래 텐트 친다던데?”
“…….”
“아니면, 혹시 나 때문에?”
레이첼은 손을 입술에 가져다대며 여우 같은 요염한 목소리를 흘린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클로이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저기, 죄송한데 누구시죠?”
클로이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을러댔다. 레이첼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흘깃거리고서 피식, 코웃음 쳤다.
그리고 어린애를 다루듯 사근사근한 어조를 섞어 클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꼬마야, 어른들 얘기할 때는 끼는 거 아니란다!”
“…….”
클로이의 눈동자가 서서히 서늘하게 비워진다.
“레이첼! 남의 반까지 와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아벨 아씨. 그냥 인사잖아, 인사. 안 그래?”
뒤에 서 있던 아벨이 뜯어말려 보지만, 옴짝달싹을 안 한다. 아벨이 낑낑거리며 잡아끄는 게 안쓰러워 보일 지경.
석차는 아벨이 레이첼보다 두 개 높았다. 그러나 창지기 집안 출신의 완력은 아벨을 아득히 능가할 것이다.
기억으론 ‘압도적인 힘 앞에선 기술이 필요 없다.’라는 어떤 만화가 연상되는 언구가 창성가의 모토였다. 기적의 가호 M에서도 창성가 쪽 인물들은 스텟이 전부 힘에 치우쳐져 있는 힘캐 그 자체.
그중에서도 칠성 영웅 중 한 명인 창성의 조카인 가문의 적통 후계가 바로 눈앞의 미소녀, 레이첼 드 뮈라였다.
그런 아벨의 노력이 무색하게 고개만 휙 돌려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레이첼.
‘근데 얘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레이첼과 아벨이 실랑이하는 것을 보고 있자, 옆에서 차갑고 뾰족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시선만 살짝 틀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곧바로 눈동자를 정면으로 원위치시켰다.
‘좆됐다.’
클로이가 고개만 옆으로 꺾어 레이첼을 표정 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빛 눈동자는 이미 탁해져 초점이 없다. 무엇보다 문제는, 오른손에 들린 커터칼.
혹시나 했더니 역시였다. ‘그’ 모드의 클로이가 분명하다. 아무래도 의식이 끊긴 것 같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여기서 상황 정리를 하지 않으면 댓바람에 교실에서 칼부림 판이 날 것 같다.
내가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한창 아벨과 실랑이 중이던 레이첼의 시선이 클로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선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며 웃는다. 웃음소리에 클로이의 미간이 좁혀진다. 둘 다 미쳐 버린 것 같다.
“꼬마는 그런 장난감 들면 안 돼!”
그 말에 클로이의 고개가 더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첼은 허리에 손을 짚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농 섞인 말투에 아벨은 관자놀이를 짚고 중얼거렸다.
“꼬맹아, 가슴이 좁다고 속도 좁으면 안 되는 거 알지?”
어깨를 쫙 펴고 봉긋 솟은 가슴을 과시한다.
“뒤.져.썅.년.아.”
드르륵, 하는 날이 밀리는 소리와 동시에 클로이가 일말의 주저 없이 섬전처럼 커터칼을 앞으로 내질렀다. 누군가의 작은 비명이 터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안 그래도 클로이는 속도가 장기인데, 먼젓번보다 더 날카롭고 빨라졌다. 발전하는 얀데레라… 자칫하면 불귀의 객이 되는 것도 한순간이리라.
쫘악!
“““!”””
‘그걸 낚아챈다고?’
레이첼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느새 클로이의 손목을 틀어쥔 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귀힘이 얼마나 센지 커터칼을 든 손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클로이가 격렬하게 저항하자 재빠르게 반대 손목도 움켜쥐는 레이첼. 여학생들 간의 앙칼진 드잡이질이 아닌 마초스러운 MMA의 한 장면이었다.
“꼬맹아, 느려.”
레이첼은 차게 식은 눈으로 클로이를 내려다본다. 그래도 아직 클로이의 눈에서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레이첼은 가소롭다는 듯이 손에 쥔 클로이의 손목을 살짝 풀어 쥐었다가 꽉 눌러 잡았다.
꾸구국, 하는 살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클로이가 고통 섞인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크윽…….”
“레이첼, 그만!”
아벨이 표정을 굳히며 막아 섰다. 레이첼은 작게 한숨을 뱉고는 클로이의 손을 던지듯 놔 주었다.
작달막한 클로이의 몸이 낙엽처럼 휙 하고 칠판 쪽으로 날아갔다. 그 와중에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아 낙법 치듯 바닥을 짚는 클로이. 몇몇이 감탄성을 흘린다.
아카데미에 정상인 여학생은 없는 모양이다. 이쯤 되니 이곳에서의 탈출이 간절해졌다.
레이첼의 눈에 다시 장난기가 짙게 감돌았다. 그러더니 내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몰캉한 감촉이 팔꿈치에 닿았다. 팔을 휘감는 폭신함에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다음 교시까지는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름이 강검마?”
질문에 대답이 없자, 레이첼의 하트 모양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입가에는 의미 모를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꼬마가 검마 네 여자 친구야?”
“아니.”
내가 말을 단호히 쳐 내자, 1~2M 앞에서 듣던 클로이가 가자미 눈으로 나를 흘겨본다. 정말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치게 하는 눈빛이었다. 손에 들린 뾰족한 커터칼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친구.”
“헤.”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다. 내 대답에 레이첼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녀는 턱을 괸 채로 고개를 까딱였다.
하트형 눈동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윗단추가 풀어진 교복 셔츠 사이로 보이는 유려한 쇄골.
시선을 살짝 틀자, 아벨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며 흠칫 몸을 떤다. 경황이 너무 없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얘도 있었지.
“둘이서 나는 왜 찾아왔지?”
“아벨 아씨가 너한테 관심 있다길래, 함 얼굴 보러 왔지.”
“내가 언제!?”
“엥, 그래서 온 거 아니야?”
“레이첼, 네가 그냥 억지로 끌고 온 거잖아!”
“난 아벨 아씨가 순순히 따라서 오길래 오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
아벨이 소리를 빽 지르자, 주위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아벨은 입꼬리를 미미하게 말아 올리며 낯빛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입을 다문다.
반 학생들의 이목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우리 넷에게 고정된 상태. 아마 여기서 이야기를 더 꺼내 봤자, 본인의 이미지만 깎일 것이란 걸 알아챈 모양이다.
랑 클래스뿐 아니라, 다른 클래스에서도 아벨과 레이첼을 보기 위해 온 남정네들로 북적거렸다.
당장에 나는 저 후끈한 시선들을 피하고 싶을 뿐. 안 그래도 어제 일 때문에 피곤하던 차인데, 이런 상황들이 겹치는 건 골칫거리다.
그럼에도 안 나가는 걸 보면 아벨도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긴 했다. 아니면 나갈 타이밍을 놓쳐서 못 나가고 있든지.
나는 힘없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마를 역사책에 묻었다. 성장기 몸이라 아무리 자도 잠이 부족했다.
“별일 아니면 가라.”
레이첼의 괴고 있던 턱이 미끄러졌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아벨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재밌는 애구나?!”
나는 대꾸 없이 고개를 휙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뭐가 그리 재밌는진 모르지만, 일일이 상대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미 틀어진 아카데미 생활, 더 귀찮아지기 싫었다.
레이첼은 내 팔에 가슴을 밀착시킨 후, 야릇한 목소리로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재밌는 남자가 좋더라.”
“다행이네. 난 재미 없거든.”
그리 말하자 레이첼은 쿡쿡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밀착된 가슴이 리드미컬하게 씰룩였다. 옆으로 조금 비켜도 그녀의 가슴은 자석처럼 딸려 온다.
“어때, 이따 수업 끝나고 내 방에서 렛플릭스 보고 갈래?”
‘여우 년.’
“당장 검마 군한테서 떨어져!”
금세 정신이 돌아온 클로이가 얼굴에 노색을 띠고 소리쳤다.
“푸핫, 검마 군이래!”
레이첼은 노기 섞인 눈초리로 으르렁거리는 클로이는 무시하고 아벨의 눈치를 살폈다.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아벨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레이첼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짧은 교복 치마를 툭툭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서 재밌었어, 검마 쿤! 조만간 또 보자!”
“오지 마.”
“푸핫, 너무 매몰차!”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차갑게 대꾸했다. 뭔가 레이첼, 쟤랑 엮였다고 생각하니 편두통이 몰려올 것 같았다.
도깨비처럼 안광이 붉게 변한 클로이를 한번 흘긴 후, 레이첼은 아벨의 팔짱을 낀 채 내게 손 인사했다.
나가기 전, 아벨은 눈을 가늘게 떠 나를 바라보았다. 미려한 속눈썹이 내려와 눈을 반쯤 가렸다. 그러다 입술을 한두 번 달싹이더니 이내 발걸음을 문 쪽으로 꺾었다.
그렇게 아벨과 레이첼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세 자릿수 장정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집중됐다. 적의 가득한 눈빛들. 아무래도 난 의도치 않게 교내 모든 수컷의 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 * *
성(星) 클래스로 향하는 교수동 복도.
‘그 정도일 줄은…….’
태도가 냉연한 거야 그렇다 쳐도, 그늘진 검은 눈동자에 내재되어 있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무언가는 보는 사람을 압도시켰다.
잠시 눈빛 교환만 했을 뿐인데 목이 잘린 기분이다. 오랜만에 느껴 본 공포에 이가 미미하게 부딪쳤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봐 왔던 말만 번지르르한 쭉정이 같은 동급생들과는 격을 달리할 게 분명했다.
창성가는 대대로 걸출한 무인들과 혼약을 맺어 오는 가풍이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첼의 입장에서 강검마는 너무 탐이 나는 재원이다. 레이첼은 속으로 작게 읊조렸다.
‘검마라…….’
다소 사납게 느껴지는 까칠한 태도와 퇴폐적인 눈동자. 남학생들 사이에서 난공불락의 여제라고 불리는 그 아벨이 흥미가 동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클래스 앞에 거의 도착하자 레이첼은 걸음을 멈추고 아벨을 향해 발끝을 꺾었다. 아벨은 팔짱을 끼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레이첼은 묘한 미소를 걸고 사과했다.
“아벨 아씨, 미안.”
“…하, 방금 그 소란이라면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랑 클래스 학생들에게 사과해야지.”
“아니, 그거 말고.”
“…뭐?”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했다.
“검마 쟤, 양보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