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7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76화(175/300)
176화 페르티낙스 경매장 (5)
과열됐던 경매장에는 거짓말처럼 한기가 맴돌았다. 한 소녀, 클로이의 등장으로.
빤히-
안 그래도 붉은 눈이 한껏 충혈된 모습. 적안을 중심으로 눈자위에 실핏줄이 위험하게 맺혀 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눈을 할 수 있을까. 살의가 지글거리는 안광은 과연 얀데레라 할 만하다.
‘30분 자리 비워 주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당주님…….’
나는 속으로 알’타이르를 책망했다. 그러고는 눈을 살짝 내렸다.
설마하니 역시. 오른손에 무장인 일본도를 꽉 꼬나쥐고 있다.
새하얬을 검날은 피를 배불리 마셔 시뻘겠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정답게 인사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왼손엔 불길한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천 밑부분이 축축했다.
찐득한 액체가 똑똑 방울져 떨어진다. 내용물은… 방금 그녀가 몸소 자르고 노획한 그것이겠지. 빌런의 대가리.
사실 인제 와서 내가 클로이에게 덜덜 떤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한다. 그녀의 무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들 내 상대가 되진 못할 테니.
재수 없겠지만, 실상이 그렇다. 그런데도 클로이가 저 ‘모드’에 돌입하면 절로 긴장하게 된다. PTSD가 아닐까 싶다. 첫 만남이 워낙 강렬했던지라.
‘젠장.’
멈춰 있던 시간이 움직이듯 클로이가 뚜벅뚜벅 발을 내디뎠다.
그제야 혼도 이상 기류를 감지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혼은 나와 클로이를 번갈아 보더니 앙증맞게 갸웃했다.
“저 인간은 왜 저러는 거예요?”
―…….
위기감은 나 혼자만 느끼는 건가? 혼을 탓할 생각은 없다만 경각심은 가질 만하잖아.
어째 저 살기등등한 눈에 반응하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전에 료조도 그렇고. 내가 예민한 건지 얘네가 무감한 건지…….
다만 그 순진무구한 얼굴에 뭐라 대꾸하려다 말았다. 혼, 얘한테 물어볼 게 생긴 참이다.
‘돌아왔구나.’ 그 말에는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터. 일단 이 상황부터 수습한 뒤, 좀 더 대화를 나눠 보는 걸로 한다.
나는 무릎을 붙잡고서 일어섰다. 상대에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이제 막 [소통의 가호]를 습득한 마당이다.
그렇다면 그 가호를 알차게 활용해 봐야지. 살의로 침잠되어 닫힌 그녀의 귀를 가호로 뚫어 볼 생각이다. 아니면 이쪽도 실력 행사로 나가야 할 테니까.
나는 숨을 고르고 [소통의 가호]를 발현했다. 뭐가 됐든, 두드려나 보자는 마음으로.
―클로이.
“…….”
이름을 불렀다. 걸음이 멈추지 않는다.
―일단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
발재간이 좀 더 잽싸졌다. 오른손엔 카타나, 왼손엔 보자기. 저 조합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머릿속에서 경음이 울렸다.
[소통의 가호]를 발현해도 씨알도 안 먹힌다. 그 말인즉슨, 저쪽에서 소통 자체를 거부한다는 의미. 어떠한 말도 듣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타다닷.
클로이가 훌쩍 드높게 뛰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천장에 닿을 듯한 점프력. 그녀는 천장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을 동작화 한다면 딱 저 장면일 터. 나는 신음했다.
‘환장하겠네.’
여기까지 치달은 이상 충돌을 피할 순 없다. 다소 지나칠지언정 응수해야 한다. 그렇게 내 손이 주머니로 내려가던 순간.
쐐애액!
돌연 측면에서 또 다른 기척이 클로이에게 달려들었다. 녹스였다. 섬전처럼 나타난 그는 동생에게 망설임 없이 홍륜도를 내질렀다.
기습을 감지한 클로이도 일본도를 마주 휘둘렀다.
챙! 경매장의 허공에서 맞물리는 검날. 그 검날의 주인들은 서로 가족이었다.
녹스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혹시나 해서 들어와 봤더니.’
다른 곳을 잠깐 망보는 사이, 클로이가 경매장에 들어왔다.
까마귀 가면을 쓴 사람이 강검마 같다는 게 이유였다.
녹스는 그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함구하고 있었다.
강검마만 보면 클로이가 눈 돌아가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더구나 아카데미 복귀가 늦어져 한창 목말라 있을 여동생이다. 그래서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클로이는 냄새로 까마귀 가면이 강검마임을 알아차렸다. 계속 코를 씰룩거리더니 기어이…….
개도 아니고, 냄새로 누군지 판별한다니. 제 동생이어도 사람을 소름 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녹스는 다시 클로이를 봤다. 속 빈 쭉정이처럼 허한 눈동자.
이렇게 된 이상 적당히는 불가능했다. 방학 동안 거듭 실전 감각을 키워 온 클로이다. 잠재력과 경험이 맞물리니 예상대로 엄청난 암살자로 재탄생했다.
이 상태의 클로이는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면 되레 이쪽이 당한다.
녹스가 재차 홍륜도를 과감하게 흔들었다. 클로이가 칼을 휘두른 순간도 동시였다.
쉭! 뒤얽히는가 싶던 두 검날이 공기를 찢었다. 둘 다 [까마귀의 가호]를 발현한 눈속임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그 의도가 달랐다. 녹스는 동생을 향한 직격타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클로이는 비검을 숨기기 위한 교란이었다. 쳇, 클로이가 혀를 찼다.
바로 다음, 그녀는 허리를 말아 조였다. 그리고 그 탄성을 이용해 빙글 회전했다. 칼에 가속을 담아 몰아쳤다. 쉼 없이 맹타를 퍼부었다.
카가강!
녹스는 홍륜도 두 자루를 X자로 교차하여 받아 냈다. 정확히는 버텨 냈다. 완충시켰음에도 손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강공할 만한 속도가 실리니 일격 하나하나의 압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지만 이건 정말 죽일 기세지 않은가.
당황하는 이 찰나에도 클로이는 회전력을 되살려 연타를 이었다. 좌우 시야를 깎아 먹기도, 눈 한 번 끔뻑하면 어느새 뒤에서 날붙이를 찔러 온다. 예기를 잔뜩 담은 공세였다.
녹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생각을 줄이고 행동을 우선시했다.
남매의 검이 쉬지 않고 맞부딪쳤다. 컴컴했던 경매장 내부. 그 안에선 영화 필름을 오려 붙인 듯 끊어진 장면이 연속해 나타났다.
공중에서 불똥이 깜빡깜빡 자동차 후미등처럼 번뜩이고 점멸했다. 때때로 지상에서도 은빛 실선이 오갔다.
챙! 챙! 챙!
두 날붙이가 악기로 쓰이며 합주를 이뤘다. 마치 배경 음악처럼. 남매는 오페라 극장 같은 무대에서 검무를 추었다.
선혈만 안 튈 뿐, 혈전이나 다름없는 공방이었다. 저대로면 둘 다 몸 성히는 못 끝날 것이다. 하물며 접전이 격화될수록 수세에 몰리는 건 녹스 쪽이었다.
당연하다. 이성이 날아간 클로이는 상대를 완전히 끝장낼 셈이었다. 녹스의 목적은 훨씬 어려운 여동생의 제압.
기량을 떠나서 녹스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내가 나서야 한다.’
나는 혼을 뒤로한 채 칼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만!”
쩌렁쩌렁한 고함이 장내를 들썩였다. 비로소 남매의 칼끝이 서로의 목 앞에서 정지했다.
녹스의 턱 끝에서 뭉쳐진 땀방울이 그 아래 검날에 떨어졌다. 그 땀에 클로이의 검에 얇게 발린 피 칠이 조금 씻겼다.
격전의 흥분이 가라앉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자세로 서로를 겨냥하던 남매는 이윽고 검을 거두었다.
“하아- 하아-.”
녹스가 무릎을 짚은 채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손등으로 턱을 훑었다. 묻어나는 땀이 한 모금이었다.
그는 비틀비틀 허리를 펴고 시선을 들었다. 클로이의 눈동자에서 차츰 초점이 돌아온다.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군.’
그제야 한숨 돌린 녹스는 뒤를 돌아봤다. 당주님을 필두로 아디토레 일원들이 들어섰다.
당주는 주변을 휘둘러보다 이내 진한 한숨을 흘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간 좀 잠잠하나 했더니 또 이 모양이구나. 대체 언제까지 이 할애비의 속을 썩여야 만족하겠니, 클로이.”
클로이는 흐릿한 눈을 뻐끔거렸다. 그러다 실 끊긴 꼭두각시처럼 스르르 쓰러졌다. 녹스가 그런 여동생을 받아 냈다. 그는 품에서 기진한 제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하기야 잠재력을 전부 끌어다 썼을 텐데, 탈력감이 엄습했겠지. 이로써 당분간 며칠은 손 하나 까딱 못 하길. 녹스는 그렇게 속으로 바랐다.
상황이 진정됐다.
당주가 멋쩍은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설마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경매장에 들어왔을 줄이야. 못 볼 꼴을 보였구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녹스나 더 칭찬해 주십쇼. 타이밍 맞게 나타나서 사태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아마 제가 나섰다면 상황이 크게 번졌을 테니까요.”
“주군!”
그때 최설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위험한 순간엔 용케도 자취를 감추더니. 염려 가득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눈을 가늘게 좁히자 최설아는 안절부절못했다.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려 시선을 피한다. 찔리는 건 있는 모양이지.
‘근데 어차피 쟤가 있어 봤자 상황이 나아졌을 것 같진 않으니.’
무엇보다 나무랄 체력이 없었다. 얀데레 모드 클로이만 보면 진이 쑥쑥 빨리는 기분이다.
나는 곁에 있는 혼을 바라봤다. 그녀는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일전에 보여 준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었다.
이래서야 쟤랑 더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겠네.
그렇지만 혼과 이렇게 작별하기엔 못내 찝찝하다.
어찌 되었건 그녀에게서 네 번째 편린에 대한 단서도 얻어야 하는 마당이니.
이대로 혼을 그냥 보냈다간 일이 무척 번거로워진다.
길냥이한테 간택당하듯 혼을 거둘까? 묘하게도 기숙사동 규정엔 누구와 동거해선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다.
아마 기적의 가호 M 게임사가 거기까진 생각이 못 미쳤을 것이다.
다만 혼은 기다란 귀를 제하면 영락없는 십 대 여자애다. 행색이 꼬질꼬질함에도 심지어 예쁜.
나는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안 되겠네.’
저런 애랑 같은 방에서 지내면 내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나.
생도들 입방아에 괜한 이야기가 오르내릴 수 있으니까. 상상만 해도 어질어질하다.
…일단 그 전에.
“당주님, 혹시 저 새끼 드래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 물음에 당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골몰했다. 그가 조금 뜸 들인 끝에 대답했다.
“사실 나도 그 부분이 조금 골치야. 원래라면 마경에 다시 보내 줘야 할 테지만, 하필 흘러 들어온 경로가 경매 아닌가. 마족들이 알면 들고일어날걸세. 옳다구나 하면서 명분으로 들먹일 수도 있는 노릇이고.”
당주가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그 말대로다.
마족들이 이걸로 꼬투리를 잡았다간 자칫 악화일로로 접어들 테니까.
최악의 상황은 이걸 명분으로 침공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마족 측에선 군단장도 둘을 잃은 판국이다. 지금 한창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텐데.
인간이 마족을 경매에 내놨다?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셈이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학원장님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저 드래곤을 아카데미에서 관리하는 겁니다. 생도라는 위장 신분으로 말이죠. 어차피 생긴 것도 인간과 큰 차이도 없으니. 그리고 잠시 대화해 봤는데 인간한테 위해를 끼칠 마족은 아닙니다.”
내 의견에 당주의 눈썹이 씰룩였다.
“마족이랑 소통을 했다고?”
“예. 어쩌다 보니 대화할 수 있게끔 하는 가호를 얻었습니다. 여튼 제 말의 논지는 아카데미가 드래곤을 비밀리에 관리한다, 이겁니다.”
가만히 듣던 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듣고 보니 나쁘지 않군. 아니, 이보다 나은 방향이 있을까 싶은 정도야. 호아킨 아카데미는 치외법권. 게다가 그간 일 때문에 보안도 훨씬 단단해졌지. 이젠 방범에 물 샐 틈도 안 보일 만큼 말이지. 다만.”
당주는 혼을 한번 보고서 말을 이어 갔다.
“보호자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할 성싶은데. 그래야 학원장님을 설득할 수 있을 거야.”
“아, 그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
나는 말없이 최설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눈이 맞닿은 순간 그녀의 낯빛에 불길함이 차올랐다.
* * *
강검마와 이야기를 마친 후 얼마 안 있어, 알’타이르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스위스 국제 번호가 찍혀 있었다.
“예, 검제님. 상황 얼추 마무리 지어졌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클라디부터 시작한 긴 여정이 드디어 끝이 났군그려.]“하하, 고생은요 무슨. 정말 우연 찮게도 경매장에서…….”
알’타이르는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수화기 너머 검제는 놀란 기색으로 그 말을 경청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강검마는 거기에 대체 왜 있었던 건가?]“그건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친구가 있었기에 상황이 순조롭게 종결됐죠. 그 하나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뭐, 그건 그렇군. 아니면 조만간에 내가 가서 직접 물어봐도 되고.]“직접이요? 그럼 설마……?”
당주는 전화상이나 검제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이는 듯했다.
[맞네. 칠성의 승계 준비가 거의 마무리됐으니 나도 아카데미로 돌아가야지. 정확히 한 달 후, 승계는 호아킨 아카데미에서 이뤄질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