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7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77화(176/300)
177화 괴담 (1)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동안의 학업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료조에게 과외를 받았다.
근래 워낙 여러 일이 있어 생도 본분인 공부에 조금 소홀했기 때문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카데미에 복귀한 클로이도 과외에 합류했다.
“…부장, 너는 졸업하면 취직은 떼 놓은 당상이잖아. 그뿐이야? 영웅 에이전시든 어느 기관이든 별다른 절차 없이 그냥 패스할 수 있을걸? 넌 존재 자체가 그냥 합격 이력서야.”
웨폰의 말에 동의한다. 오늘만 해도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쇄도했다. 유수의 에이전시들이 이젠 그냥 노골적으로 접촉을 시도해 댔으나.
깡그리 무시했다. 몇 개월 전이었다면 그 제안들에 대해 고민해 봤겠지만.
나라고 돈이 싫은 건 아니었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나 돈 좋아한다.
그러나 최근 난 마음가짐을 달리 먹었다. 생도 생활에 조금 더 충실해지자고.
우리가 이렇게 하하 호호 아카데미 생활을 즐길 날이 그리 남지 않았다. 잘 쳐줘야 2년 반이다. 그동안은 되도록 생도다운 생활을 구가하고 싶었다.
이후론 인마대전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불길한 앞날이 점점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세기 전 구(舊) 칠성들의 손에 6군단장이 토벌당했고, 작금엔 5군단장과 3군단장이 차례차례 목이 잘렸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마족 측은 군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마경과 인계를 잇는 게이트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게이트는 마왕이 부활함과 동시에 파괴되고, 그게 개전의 신호탄이 된다.
솔직히 아고르나 베스나. 두 군단장의 힘은 축소된 감이 있었다.
그 둘을 마경 게헤나에서 대적했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터.
3군단장 베스나를 나 혼자 벨 수 있었던 건, 그릇이 하 주임인 게 컸다.
겸양 떠는 게 아니다. 홈그라운드인 게헤나에서 군단장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들이다.
힘의 논리만 따르는 마족들이 고분고분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하물며 군단장이 셋이나 부재한 작금에도 남은 두 군단장이 마족 전체를 통치하는 건 현재 진행형이다.
참고로 메디아한테 들은 사실인데, 칠성이 6군단장 바스몬을 상대했던 장소가 게헤나 게이트의 근방이었다고 한다.
근거지와 인접한 곳이었던 만큼 마경과 엇비슷한 수준까지 힘을 끌어냈었다는데.
하면 칠성 중 셋이 죽은 게 납득이 된다.
그게 아니고서야 전성기의 칠성들이 일주일 밤낮을 싸웠을 리가.
‘군단장 중 최약인 바스몬한테 그리 고전했다는 게 이상하긴 했어.’
달리 말하면 마경에서 군단장들이 얼마나 강할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남은 군단장들은 가만히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 마왕이 부활하여 게헤나 게이트를 붕괴시켜 주기만을.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마경에 쳐들어가서 1군단장 라이칸을 봉인한 시조의 영웅은 얼마나 괴물이었던 거지?’
아무리 동귀어진이었다지만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괜히 악마 놈들이 발로르 호아킨 이야기만 나오면 발작하는 게 아니었나…….’
시조의 영웅은 베일에 싸인 위인이다.
일곱 제자 육성, 게헤나 게이트의 통로 차단, 호아킨 아카데미의 설립.
인류사의 굵직한 줄기들은 전부 그 양반이 이룬 업적이다.
그러면서 외모나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 아마 발로르 호아킨의 재등장을 원천 차단한 게임사의 의도지 싶다.
무려 700년 전 위인에다, 슈퍼 먼치킨인 그가 재등장하면 스토리는 거기서 끝이니까.
설정상에만 존재하는 그런 신화적인 인물이겠지.
“검마,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료조의 고성이 상념을 깨부쉈다. 그녀가 연필심으로 교과서를 콕콕 건드렸다.
“이렇게 한눈팔아서 중간고사 필기시험 만점 받겠어?”
“만점까지 받을 생각은 없는데.”
“이왕 시작했으면 만점을 목표로 해야지! 그렇게 어중간한 마음가짐이면 웨폰처럼 만년 2등에서 끝이야.”
료조의 핀잔에 웨폰이 발끈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만년 2등이냐? 나도 필기만큼은 좀 1등 좀 해 보고 싶다고! 그리고 료조, 넌 맨날 잠만 퍼질러 자면서 왜 항상 수석이냐고!”
“내가 어떻게 공부하는지 알려 줘?”
“…….”
웨폰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냉큼 고개를 끄덕이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료조의 공부법은 탐이 났다.
웨폰이 끙 신음하며 마지못해 주억였다. 료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예습과 복습.”
“……?”
웨폰은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료조가 피식 조소하며 덧붙였다.
“아, 가장 중요한 걸 까먹었네.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면 돼. 교수님들 강의 귀담아듣고.”
“…….”
“그리고 네가 맨날 나 엎어져 잔다고 뭐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난 전부 강의 듣거든? 포유류 중에 돌고래도 잘 때 뇌의 반쪽씩 교대로 잔다잖아. 그거랑 비슷해.”
웨폰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실하게 맺혔다. 그러다 곧 축 처졌다. 저 말이 마냥 비아냥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말끄트머리가 어처구니없었다. 자신을 돌고래랑 비교한다. 그것도 머리 좋기로 유명한 사키가 말이다. 웨폰은 애매한 기분을 느꼈다.
“…….”
나는 잡담하는 둘을 지켜보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클로이가 열심히 공책에 무어라 끄적이고 있었다.
다만 료조의 말을 열심히 필기하는 건 아니었다. 곰돌이 스티커가 붙은 저 공책.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안다. 일기장이었다. 그 한 페이지엔 『사랑해』란 말이 빼곡히 깜지 되어 있는.
이른바 사랑해 노트였다. 내겐 데X노트보다 저게 더 무서운 물건이다.
클로이는 페르티낙스 경매장 사건 이튿날 아카데미에 복귀했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동아리 부원들은 클로이를 반겨 주었다. 나 역시 스스럼없이 반겼다. 그날 칼 들고 달려오던 모습이 선연했으나 그러려니 넘겼다. 한두 번도 아니고.
첫 만남부터 공포 영화를 찍은 사인데 뭔들 못할까.
‘배역은 클로이가 귀신, 내가 사람.’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클로이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공책을 숨겼다. 그리고 다른 공책에 료조의 강의를 받아 적었다.
‘딴짓도 대놓고 하면 상대가 눈치를 못 채는군.’
아니면 [까마귀의 가호]를 발현했거나.
뭐가 됐든 클로이의 안중에 공부가 없다는 건 확실했다.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해. 아마 90% 확률로 출제될 거야. 문제가 서술형이라도 교수님들마다 출제 패턴이 있거든. 마경 심층을 분석한 교수님은 보통 3년 주기로…….”
나른한 료조 성격상 요점만 짚어 줄 줄 알았는데,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교과서 모퉁이에 보일 듯 말 듯 적힌 글귀도 놓치지 않았다.
그걸 또 웨폰은 안 듣는 척하면서 핸드폰으로 몰래 필기했다.
…그렇게 두 시간에 걸친 과외가 끝이 났다.
“오늘은 이쯤 하자. 다음 스터디는 내일 방과 후에 다시 하는 거로.”
교보재를 덮던 료조가 부연했다.
“아, 그리고 내일 5, 6교시 인류사랑 가호 심미학은 성적 반영 비중이 높은 강의니까 클로이나 검마 너나 졸지 말고 집중해.”
“땡큐. 고생했어.”
“네에~.”
그제야 웨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머리를 헝클며 툴툴거렸다.
“나는 그럼 가호 훈련하러 가야겠다. 이놈의 실전 주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으려면 필기만 해선 안 되니, 원.”
“그러고 보니 웨폰 너 요새 방과 후마다 어디 가던데. 그게 훈련실 가는 거였어?”
내 물음에 웨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음악실. 나는 무장이 악기 형태잖아.”
맞다. 리코더였지.
웨폰이 계속해서 말했다.
“훈련실은 너무 땀내 나는 곳이라 좀 그래서. 대신 서남쪽 외곽에 있는 아론 별관에 음악실이 있더라고.”
“서남쪽 외곽이면 완전 오지잖아. 주변에 건물도 하나 없고.”
료조가 고개를 기울였다. 웨폰이 반문했다.
“생각보다 찾는 사람 엄청 많더라. 나는 관악기 실에서 혼자 연습하는데, 피아노실은 항상 붐벼. 어제 복도 창문으로 우연히 봤거든? 여생도들이 피아노 앞에 줄지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더라.”
“순서를 기다릴 정도라고? 보통 피아노 치겠다고 번호표를 뽑진 않잖아. 요즘처럼 패드에 악기 대용 어플도 넘쳐 나는 세상에?”
웨폰이 꼰대처럼 혀를 끌끌 찼다.
“어휴, 사키 네가 악기에 대해 뭘 알겠냐? 전자음이랑 실제 악기는 음색에서 차이가 있다고. 아무리 시대가 좋아져도 그건 못 따라 해.”
료조의 눈썹이 팔자(八)로 솟았다. 그러나 곧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런 가운데 클로이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다 보니 좀 이상한데요? 애초에 아론 별관은 작년에 폐쇄했거든요. 시설이 너무 낙후되어서 보수 공사한다고.”
웨폰이 횡설수설하는 투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그, 그럴 리가! 방금 말했잖아. 사람 엄청 많다고! 그리고 클로이,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데?!”
“제 오빠인 녹스가 2학년이잖아요. 작년에 지나가듯 아론 별관이 폐동했다고 들었거든요. 녹스가 조용하다고 즐겨 찾던 곳이라 분명히 기억해요. 그리고…….”
돌연 클로이가 발을 굴려 쿵쿵 바닥을 두드렸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음악실은 여기 본관 2층에만 있잖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와 료조의 시선이 웨폰을 향했다. 그의 낯빛이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검은 머리라.”
읊조린 것은 제단 위 백의를 입은 남자였다. 발밑까지 하얀 천으로 가려져 유령처럼 형체 없이 형상만 존재했다.
제단 아래는 생기의 조각이 완연히 가신 회백색의 세상. 그곳은 하나의 장소이며 현상과도 같은 무저갱이었다.
사슴 머리 마족이 넙죽 절한 채 사내에게 읍소했다.
“이, 이 모든 게 미처 말리지 못한 제 부족함입니다. 하, 하지만 설마 군주들께서 인간 놈들의 손에 당하실 거란 불경한 상상을 못 했을 뿐입니다. 부, 부디 자비를 보이소서.”
백의 사내가 매우 느릿하게 뒤돌아섰다.
쿠구구구구구구.
그 사소한 무브에 일대가 진동했다. 지진의 영향에서 벗어난 건 오롯이 백의 사내가 서 있는 제단뿐이었다.
저벅.
사내의 발이 계단을 지르밟았다. 무질서하게 모여 있던 마족들이 한시에 머리를 조아렸다.
“자비를 바라는가.”
사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는 허무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말해 보거라. 내가 네게 자비를 베푼다면, 반대로 내게 자비를 보일 수 있는지를.”
“……!”
“자비란 본디 역천의 존재만이 베푸는 것. 그러나 나 역시 하늘의 밑의 미물에 불과하다. 한데 너는 어째서 내게 자비를 구하는가.”
백의 사내가 사슴 머리 앞에 멈춰 섰다.
“묻노니.”
마족을 굽어보던 사내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내 형제들을 죽인 그자는 역천의 존재였나.”
사슴 머리가 저도 모르게 들렸다. 위대한 자의 존안이 보였다. 그분의 머리 뒤에선 검은 태양이 세상의 빛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마족이 약속했다는 듯 검은 눈물을 흘렸다.
“아아. 게헤나의 주인 쿠아른이시-”
스으으으으.
그 순간 사슴 머리가 공간에 잡아먹히듯 소멸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어느 하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내, 2군단장 쿠아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허만 맴도는 눈으로 하염없이 검은 태양을 응시했다.
“뵐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천외천이시여.”
검은 태양은 그저 묵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