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8화(18/300)
18화 바람 잘 날 없다 (3)
레이첼이라는 폭풍이 휩쓸고 간 랑(狼) 클래스.
웅성거리는 생도들과 달리 나는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표정에 침울함이 감도는 클로이. 다행히 정신 줄은 돌아온 모양이지만, 얼굴에 먹구름이 제대로 껴 시무룩해져 있다.
아무래도 레이첼에게 무기력하게 제압당한 게 여간 분한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나름 변호해 주자면 상대는 호아킨 아카데미의 4석이었다.
그 말은 즉, 레이첼과 붙었을 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생도는 2,500명 중 단 세 명이라는 소리.
게다가 당대의 강자와 결혼해 강한 핏줄만을 잇는다는 창성가 특성상 타고난 완력 하나만큼은 교내 최강 수준이리라.
솔직히 칼부터 빼든 클로이의 잘못이 더 크긴 했지만, 덤벼 보라는 식으로 도발한 건 레이첼이 먼저였기에. 누가 더 잘못했다고 하기는 힘들긴 하다.
근데 문제는, 클로이는 근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같은 클래스고 레이첼은 마주칠 일도 적은 성(星) 클래스라는 거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매몰차게 ‘네가 먼저 칼 빼 들었잖아.’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다음 칼부림의 표적이 나로 옮겨지겠지.
낙담한 듯 어깨가 축 처진 클로이. 왠지 안쓰러운 마음에 위로라도 할 겸 말을 건네려던 그때, 그녀가 잠시 망설이더니 먼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검마 군도 큰 게 좋아요?”
“뭐가?”
“…검마 군도 그, 그 가슴 큰 게 좋냐구요!”
“…….”
클로이는 순망한 눈망울로 울먹거리며 버럭 소리를 높였다.
‘분한 포인트가 그거였어?’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서 꽁해진 줄 알았는데, 가슴 때문이었다니. 어쩐지 아까부터 양손을 가슴팍에 모으고 고개만 틀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가슴이라…….’
나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뭐, 내가 가슴에 대해 관대한 것도 있긴 하지만, 레이첼의 그 우윳빛 두 덩이가 너무나 공격적이라 그렇지, 클로이도 가슴이 그렇게까지 작은 편은 아니었다.
가슴이라는 무림에서 레이첼과 그나마 비빌 만한 여성은 메디아 정도? 아벨조차도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웬만한 여자들은 건전지급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유가 머리에 스쳤다.
하지만 여기서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벌통을 들쑤신 꼴이 될 게 분명했다. 아직 클로이는 오른손에 커터칼을 꼬나쥐고 있었다.
사시미가 없을 때, 나는 일전보다 강해진 클로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혀를 잘못 놀린 대가로 피를 보고 싶진 않았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고 나는 대답만 하면 되는 상황. 아직 창창한 성장기의 소녀니 혹시 모르는 일이다.
…가능성은 좀 희박해 보이긴 한데. 나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며 말했다.
“난, 가슴 큰 거, 별로.”
“…….”
가자미 눈으로 나를 흘기는 클로이. 아직 커터칼을 잡은 손에 힘이 덜 풀렸다. 나는 침음을 흘리며 말을 덧붙였다.
“오히려 작은 걸 더 좋아할지도?”
사나이의 양심을 저버린 죄, 언젠가는 달게 받으리라. 지금은 목숨이 우선이다.
“…저, 정말요?”
“응.”
그러자 얼굴에 화색이 도는 클로이. 입가에 잃었던 미소를 되찾는다. 옷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슥슥 닦고서야 커터칼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클로이는 살짝 흘러내린 붉은 단발을 착- 귀 뒤로 넘기면서 싱긋 웃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여성으로서의 어필하기 위한 제스처가 아닐까.
너무 봄내 물씬 나는 분위기도 좋지 않다. 그도 그럴 게, 클로이는 얀데레다. 이 이상 내게 호감을 품는다면 냉장고에 당장이라도 나를 쑤셔 넣으려 할 것이다.
직감적으로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정말 위험할 것 같단 생각이 스쳐 나는 재빨리 아무 말이나 꺼내 주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클로이, 그… 녹스, 그 일 이후에 어때?”
녹스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녀의 얼굴에 일순 그늘이 드리웠다. 어지간히 자신의 오빠가 싫은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클로이는 ‘왜 그렇게까지 녹스를 싫어할까?’란 의구심이 들었다. 아디토레란 집안도 싫어하지만, 뭐랄까 녹스는 좀 ‘증’에 감정이 섞인 느낌이랄까?
근데 남의 가정사 들추기가 좀 꺼려져 묻지는 않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 암살자 집안에 깊게 연관되어 봤자, 밤길 조심할 일이 늘 뿐이다.
내가 잠시 상념에 잠기자, 클로이는 옅은 건조함이 스며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지금 아카데미 부속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웬 입원? 아공간 대련은 외상이 없잖아.”
클로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뒤로 넘겼던 옆머리가 흐트러졌다.
“…사실 안 찾아가 봐서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들리는 말로는 확실히 외상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검마 군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음.”
내가 무참히 썰어 버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멘탈이 나갈 정도로 나약해 보이진 않았다.
‘그 새끼, 딴맘 품는 거 아니야?’
관상은 과학이라고 녹스의 그 감정 없이 비릿한 입매가 떠올랐다. 설마 입원으로 방심을 유도하고 오밤중에 퍽치기라도 할 심산일까. 충분히 가능성 있다.
그리고 암습은 녀석의 특기. 물론, 다시 무참히 밟아 주면 그만이지만, 그때는 실제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았다. 미리 불상사를 방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클로이 혹시 녹스가 입원한 병동이랑 병실 알려 줄 수 있어?”
“…네!?”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는 클로이. 나는 씨익, 방긋 웃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원래 남자끼리는 치고받으면서 크는 거거든. 가서 남자답게 짧게 대화나 좀 나누고 오게.”
“…그래도.”
클로이와 대화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그녀와 녹스의 관계는 마냥 나쁜 게 아닌 애증의 관계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뭐가 그렇게 걱정스러운지 입술을 짓씹으며 침음을 흘리는 클로이. 이럴 때 내 필살기를 발휘할 때다.
“클로이.”
“네?”
나는 그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얹어 쓰다듬어 주었다. 입가에는 다년간의 요식 서비스업으로 다져진 미소를 걸고.
“부탁할게.”
“……!”
클로이의 얼굴이 활화산처럼 달아올랐다.
『얀데레 조우법 1. 일단 머리를 쓰다듬어라. 그럼 반절은 먹고 들어갈 것이다.』
며칠간 자기 전 너튜브로 공부한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 * *
호아킨 아카데미 부속 병동 VIP실.
녹스는 침대에 몸을 파묻고 떨고 있었다. 태어나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꿈틀거렸다. 심장의 고동이 멈추지 않는다.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가의 농도가 시간이 지나도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그 자식 때문이었다.
‘강검마.’
이제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조차 못하게 된 이름. 소리 없이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강검마의 칠흑빛 눈이 머리에 스칠 때마다 말단부위부터 몸이 저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처음 맛보는 생생한 공포. 그 자식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혐오가 혼재돼 고통스러웠다.
일생을 패배를 모른 채 살아왔다. 그 어떠한 적들이건, 아디토레의 천재인 녹스의 ‘홍륜도’ 앞에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것도 어제까지. 녹스는 졌다. 아니, 지기만 했으면 다행이지. 그 녀석의 분위기가 일변하자 수 초도 안 돼서 횟감처럼 무참히 썰려 버렸다.
살이 썰리는 건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꺾인 격통은 몸을 일으킬 의지를 상실시켜 버린다.
‘밤이었으면 달랐을까?’란 생각도 해 봤지만, 강검마와 칼을 맞부딪힐 생각을 하자 몸의 관절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씨발!”
녹스는 이를 아드득 갈며, 옆 선반을 세게 내리쳤다. 바스켓에 담긴 사과, 바나나를 비롯한 과일들이 엉켜 덜컹, 크게 튀어 올랐다. 철제 선반이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그래, 죽일 수 있다. 녹스의 본분은 어쌔신. 아디토레 전체의 힘이라면 강검마, 그 자식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으리라.
녹스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것은 단 하나의 집념이었다.
‘그 녀석을 죽이고 클로이를 데려와야 한다.’
클로이는 아디토레의 종속이다. 게다가 그녀의 암살자로서의 잠재력은 녹스 자신의 근사치 이상이었다.
그렇게 그가 눈에서 복수의 불꽃을 서늘하게 태우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노크 소리가 흰 벽면에 스며들었다.
“누구냐!”
미간을 좁힌 녹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문 너머로 내질렀다. 대답을 대신하듯, 병실 미닫이문이 드르륵, 무정하게 옆으로 밀렸다.
“나다.”
강검마였다. 녹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턱뼈가 튀었다. 방금까지 활활 타오르던 전의가 강검마의 얼굴을 보는 것과 동시에 사위었다.
“너, 너, 넌.”
무의식적으로 말이 더듬어진다. 자칫하면 혀가 씹힐 정도로 이가 부딪쳤다. 가까스로 잇몸에 힘을 줘 입을 다물었다.
강검마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르고 터덜터덜 녹스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옆에 비치된 의자 하나를 쭉 빼 털썩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디토레가 돈이 많긴 한가 봐? 병실 장난 없네.”
아랑곳하지 않고, 목덜미를 긁적이며 병실 내부를 훑는 모습. 그뿐인 행동일 터인데, 녹스의 이마가 송골송골 촉촉해졌다. 이마에 고인 식은땀이 줄기를 이뤄 흐르기 시작했다.
“이거 먹어도 되냐?”
“…….”
강검마가 눈짓으로 선반 위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를 가리키며 물었다. 녹스의 턱이 작게 끄덕여졌다. 무척추 반사란 게 무엇인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땡큐.”
알이 실한 사과 하나를 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문다. 맛이 좋은지, 입 주변에 과즙이 튀어도 무시한 채 사각사각 이빨질을 반복했다.
입매만 꿈틀거릴 뿐, 녹스의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느끼는 건 순전한 공포. 녀석을 마주하자 속이 배배 꼬이며 도리어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녹스가 입을 틀어막자, 강검마는 표정 변화 없이 바구니에 담긴 과도를 쥐었다. 설마, 끝을 보려고 온 건가? 몸은 반응 대신 흠칫 굳어 버린다.
그 모습에 강검마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사과를 하나 꺼내 껍질을 살살 깎기 시작했다. 너머가 비칠 정도로 투명하게 깎인 사과 껍질은 마치 비단결과도 같았다. 넋을 잃고 보게 되는 신들린 칼 놀림.
“밥이 안 넘어가면 과일이라도 좀 먹어 둬라.”
곧이어 매끈한 구형의 과실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 와중에도 녹스는 몸을 움찔거렸다. 쓸데없이 강검마의 행동 하나하나에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해 댄다.
“뭐, 괜찮아 보이니까 난 간다.”
강검마는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 의자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했다. 녹스의 시선이 재빠르게 강검마의 뒷모습과 선반 위의 과도를 번갈아 훑었다.
‘지금이라면.’
녀석은 무방비하다. 녹스는 슬금슬금 선반 쪽으로 천천히 팔을 뻗었다. 환자복이 피부에 쓸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 강검마는 문을 반쯤 연 채로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렸다. 녹스는 스산한 눈동자를 받아 냈다.
“아, 그리고.”
“…….”
“만약 내게 복수할 생각이라면.”
건조한 음성에 병실의 공기가 비산한다.
“아디토레의 씨를 말려 주마.”
탁―
문이 닫혔다.
선반 위에 놓인 사과가 여덟 조각으로 쪼개져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