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8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81화(180/300)
181화 드래곤 (1)
“뭐야, 왜 아무것도 없어.”
마지막 층에 진입함과 동시에 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기껏 열심히 파밍해 왔건만, 최상층엔 그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백한 달빛만이 창문을 넘어 복도에 스밀 뿐이었다.
순간 나는 허탈감을 느꼈다. 이 귀신 군단을 조성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발로 뛰었는데…….
1분을 넘기진 않았으나 나름 동분서주했다. 다만 그 이상으로 노력하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셈이다.
그럴 바엔 그냥 사시미 들고 냅다 최종 보스를 향해 달렸을 테니까.
내가 귀신 군대를 만들어 온 건 보험과도 같다. 쉽게 말해 필수 덕목은 아니었다.
‘그래도 신나서 만들었는데, 젠장.’
나는 역력한 실망감을 느끼며 4층을 대충 슥 둘러봤다. 그리고 왜 복도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지 깨달았다.
일단 문이 하나만 존재했다. 저 맞은편, 한자 死靈死가 적힌 교실.
짐짓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나와 귀신 군대를 마중했다.
‘3층까지는 복도가 주 필드였다면, 최상층인 이곳은 조금 다른 구성이란 건가.’
그리 생각하면 마냥 헛수고는 아니었다.
버팔로 던전에서도 카우 킹의 방 앞은 마수 하나 없이 조용했으니까.
폭풍전야라고, 본 막 바로 직전은 원래 고요한 법이다. 일종의 장치였다. 적막을 말미암아 긴장감을 극대화할 수 있기에.
괜히 잡다한 놈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이편이 묵직한 연출이었다.
‘언데드 던전에서도 드라우그 조우 전에는 엄청 조용했었으니까.’
내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최종 보스를 목전에 두고 웃음이라…….
이 세계에서 2년 가까이 생활하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리가 맛이 간 모양이다.
좋게 보면 나름대로 적응을 잘했다는 거겠지. 나쁘지 않았다.
끄어어어어어어얽!
내 기분에 동조하듯이 뒤편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전장에 임하기 바로 직전의 우레와 같은 함성.
이리 보니 영락없는 사령 술사였다. 이 또한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나는 귀신 군대를 등에 업은 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심심한 행군이었다.
그럼에도 방심은 금물이다. 가슴속 깊이 심어 둔 1원칙이었다. 그것 쭉 지켰기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니.
감각을 끌어 올려 전방을 훑어봤다. 어느 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사주경계는 뒤에 있는 녀석들이 해 줄 테니 신경을 껐다.
그렇게 200M 남짓한 복도를 무리 없이 주파, 최종 보스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 교실 앞에 다다랐다.
【死靈死】
부식과 마모의 흔적이 군데군데 서려 있는 핏빛 문. 사포처럼 꺼끌꺼끌한 감촉을 느끼며 문을 밀었다.
녹슨 쇳소리. 지독한 악취와 함께 그 너머가 한눈에 들어왔다. 검붉은 배경색의 넓은 공동이었다.
두근, 두근.
그 한복판에 쇠사슬에 묶인 채 맥동 중인 거대한 심장. 더불어 공동을 가득 메운 유령기사들이 기립해 있었다.
수는 어림잡아 삼백. 그들은 하나의 군세로서 저 심장을 호위하고 있었다.
유령기사들의 눈에 전등처럼 불이 켜졌다. 그들이 음침하기 짝이 없는 함성을 내질렀다.
다음 순간, 유령기사들이 흐릿한 형상의 낫을 생성해 쥐었다.
“허…….”
헛웃음이 새었다. 나는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안다.
망자를 베어 거둬들이는 죽음의 천사. A급 마수, 그림 리퍼였다.
특히나 저들이 쥔 낫인 데스 사이드(Death’s Scythe)는 유효타 한 방에 수명을 십 년씩 앗아 간다는 악랄한 마장이다.
플레이 시절에도 놈들보다 마장이 더 유명했을 정도였다.
유저들 사이에선 시간 강도, 줄여서 ‘시강’이라 불렸었지.
반쯤 즉사기에 가까운 저 마장에 유저들은 치를 떨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이 악몽을 관장하는 주체이자, 코어를 지키는 지기들이었다.
예의 언데드들이야 최하급 마수였던 데 반해, 그림 리퍼는 한 놈씩 떼어 놓고 봐도 막강하다.
만약 맨몸으로 왔다면 내게 승기는 없었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나는 실소했다. 머리에 나사가 풀린 탓은 아니었다. 그저 이 기가 막힌 우연에 어이가 없을 따름.
사람들이 이래서 보험에 혈안이 되는구나 싶었다.
낫을 쥐고서 접근하는 놈들을 보며 혼잣말했다.
“공격 한 번에 수명 십 년씩이라.”
끄어어어어어어어얽……!
귀신들이 보호막처럼 나를 둘러쌌다. 그 어떠한 접근도 허용치 않겠다는 기세로.
탁.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귀신들이 목줄이 차인 맹수처럼 도약하기 직전의 자세를 취했다. 으르렁- 희게 이를 드러냈다.
나는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수명을 다한 녀석들 상대로는 무쓸모잖아.”
‘탁’. 공동에 메아리치는 살갗이 쓸리는 마찰음. 그와 동시에 내 군세가 적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양측 진영은 공동의 중앙에서 충돌했다. 천에 달하는 발걸음에 공동에 지진이 났다.
그 울림이 개전의 신호탄이었다.
그림 리퍼들이 갈퀴처럼 낫을 쓸어 넘겼다. 상아색 기운이 맺힌 숫제 날이 귀신을 베어 내고, 또 베어 냈다.
놈들은 잘 훈련된 군대처럼 준열했다. 돌발적으로 벌어진 전쟁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휘두르는 낫엔 하나의 목적성만 담겨 있을 뿐이다.
‘코어를 지킨다.’
해서, 심장을 향해 접근하는 귀신들을 낫으로 가로막았다.
그러나 격전의 양상은 사신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무던히 낫질해도 귀신은 쉼 없이 몰아쳤다.
“끄에에에에에엙!”
귀신들은 사냥개처럼 날뛰었다. 그들은 유효타를 온몸을 받아 내며 물어뜯었다.
전력이 사신들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수만 우세할 뿐 나머지 전부 뒤떨어졌다.
그럼에도 이쪽은 이쪽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림 리퍼는 모기처럼 붙은 적을 떨쳐 내려 제 몸에 대고 낫질했다. 흡사 자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귀신은 동물적인 몸놀림으로 낫을 회피하고, 다시 이빨을 들이밀었다.
내 군세는 목숨이 끊긴 지 오래인 귀신들이다. 그러니 수명을 깎는 낫질에도 거리낌 없이 대들 수 있었다.
죽음을 불사하기에 지저분한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묵직한 한 방이 아닌 가벼운 여러 방으로 체력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그 소치(所致)가 드러났다.
사신들이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했다. 내 군대가 승기를 잡았다는 방증이다.
기세를 몰아 귀신들은 더 기민한 공격을 가했다. 소리를 지르며 불침 맞은 야생마처럼 발을 놀렸다.
그들은 적진으로 침투해 전열을 무너뜨렸다.
귀신 대 사신.
인외의 존재들의 전장을 나는 가만히 구경했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자동 사냥을 즐겼다.
쿠웅……!
마지막 사신이 쓰러졌다. 그제야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서 걸음을 옮겼다. 덩그러니 홀로 박동하는 심장을 향해서.
스르릉.
이제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 * *
[NEW! 히든 퀘스트 ‘호러 메이즌: 호아킨 참사가 빚어 낸 악몽’을 달성하여, 보상이 증여됩니다.] [▷ ‘소통(疏通)의 가호’가 정령급으로 격상되었습니다.] […….] […….] [Tip: 단 1번, 시간 선을 넘어 과거·현재·미래의 인물 중 한 명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 신중히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시고요, 아시겠나요? (…….)]
* * *
“아.”
아론 별채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던 다섯이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깊은 잠에서 눈을 뻐끔거리길 무섭게 그들이 거칠게 호흡했다. 야외인데도 숨을 헥헥 쉬었다.
그들은 밀폐된 장소에서 갓 빠져나온 사람처럼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뭐라 형용키 힘든 감각. 음울한 밤바람이 그들 사이를 휘몰았다.
기묘한 정적을 깬 것은 웨폰의 목소리였다.
“너, 너희들은… 귀신… 아니지……?”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에 전원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땀을 뻘뻘 흘렸다. 조금 전 다 같이 겪은 기묘한 현상 때문이다.
돌연 웨폰이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이 별채의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이, 씨발!”
웨폰이 기겁하며 냉큼 거리를 벌렸다. 드물게 험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강렬한 낱말이 정신 상태를 대변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문짝을 뻥뻥 걷어차도 모자랐다.
그들은 말없이 별채 입구를 쳐다봤다. 깔끔한 건물이었으나 그 마각은 실로 흉측했다.
애당초 입장도 안 했음에도 홀렸다.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얼굴들에 차오른 이 경악과 공포가 죄다 거짓이란 말인가.
그건 생생한 악몽이었다. 다만 언제가 그 시작점이었는지도 알기 힘들었다. 그 부분에선 꿈과도 성질이 비슷했다.
끼이익-
별안간 대문이 열렸다. 전원 동상처럼 흠칫 굳었다.
그나마 아벨만이 간신히 힘을 돋워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저 흉가에선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숨죽인 채 입구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벅.
발 하나가 문 틈새로 내디뎌졌다. 아벨이 칼날을 한 뼘 뽑았다. 그녀의 눈빛이 검날처럼 차갑게 빛났다.
지독한 침묵 끝에 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음성이었다.
“이래서 흉가 체험은 하지 말라고 한 건가. 개피곤하네.”
문을 연 이는 강검마였다. 그가 지친 기색으로 슬슬 걸어 나왔다.
그 광경에 모두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격화됐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바스러졌다. 다섯 중 셋이 풀썩 주저앉았다.
솔직히 이게 꿈의 한 장면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하지만 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안도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강검마니까. 꿈일지 모른다는 불안감보다 심리적 안정의 비중이 컸다. 경계심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땀과 흙 때문에 옷이 더러웠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강검마에게 다가갔다.
“검마, 너 저기 안에서 뭐 하다 온 거야?”
강검마가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퇴마?”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부원들과 나는 그날을 주제로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 ‘왜’, 아카데미 내에 그런 것이 생겼는지. 여러 의견이 오갔고 그럴싸한 가설과 근거를 추려냈다.
던전이란 모름지기 마력이 응집된 공간이다. 환경이 낡고, 어둡고, 음습할수록 마력이 잘 모인다.
그리고 아론 별채는 그 모든 조건에 부합한다. 오래됐고, 응달이며, 외곽 중의 외곽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카데미에 마력이 스며들었는가.
그 실마리는 『호러 메이즌: 호아킨 참사가 빚어낸 악몽』에서 찾았다.
그날, 3군단장 베스나가 마력을 임계치까지 방출했다.
그 잔여 마력이 바람을 타고 허공을 떠돌다 아론 별채에 뭉쳐진 것.
더군다나 참사가 일어났던 선거장은 북동쪽, 아론 별채는 서남쪽이다.
마력이 버무려진 바람이 분다면 고스란히 노출될 정방향 위치다.
‘어째서 귀신 소굴로 전락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그러면서 호러 메이즌 던전의 보상을 되새김질했다.
-단 1번, 시간 선을 넘어 과거·현재·미래의 인물 중 한 명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소통의 가호의 등급 상승과 함께 떠오른 문구.
통역기 대용으로만 쓰일 줄 알았던 가호가 의미심장한 떡밥을 던졌다. 당부까지 덧붙이면서.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 신중히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시고요.
말마따나 무턱대고 사용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3년 후의 내게 사용해서 ‘인류는 망했니?’라는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거니까.
깊게 고민할 것 없이 이건 터무니없는 능력이었다.
‘시기랑 누구한테 쓸지 더 고민해 봐야겠네.’
롤린~
날카로운 발신음이 전화기에서 울렸다. 최설아가 보낸 문자였다.
[최설아: 주군… 전에 저한테 맡기신 용가리 있잖아요…….]최설아에게 혼을 의탁했었다. 남자인 내가 데리고 살 수는 없으니 먹여 주고, 재워 달라고.
최설아는 혼자 사는 게 편하다며 칭얼거렸다. 상냥한 미소로 사시미를 보여 줬다. 그러자 흔쾌히 끄덕이며 혼을 보듬듯 챙겼다.
하여 최설아에겐 나흘에 하루 정도 혼의 상태를 보고 받는다.
“근대 얘 말투가 왜 이래.”
그때 다시 한번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최설아: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