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9화(19/300)
19화 바람 잘 날 없다 (4)
녹스 녀석의 모습을 보니 어제의 대련 이후로 마음이 제대로 꺾인 듯 보였다. 자그마한 불씨가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긴 한데, 끽해야 성냥 정도의 적의였다.
병실을 들를 때, 혹시 몰라서 윗옷 안주머니에 사시미 한 자루를 챙겼다. 낌새가 보이면 바로 베어 버릴 생각으로.
그래도 되도록이면 좋게 좋게 대화로 끝낼 생각이었다. 녀석의 집안은 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어쌔신 집단. 제아무리 나라도 그 녀석들 전부를 상대할 순 없다.
그래서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한마디 해 주고 나왔다. 방해할 생각이라면 아디토레를 멸문시켜 버리겠다고.
당연히 가오가 다분한 겁박이었다. 가호 사용 한도가 30초인지라, 가문 구성원 전부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뭐, 30초 안에 열 명 정도는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만, 그건 최악의 경우고 언제나 살상은 지양하고 싶다. 사람을 베는 감각에 더 이상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기에.
녀석의 파리했던 낯빛에 비추어 봤을 때, 그 한마디의 효과는 제대로 먹혀 들어간 듯하다. 전생에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마음이 무너져 내린 인간의 모습.
유쾌하지는 않았다. 한평생 천재라 추앙받던 소년의 의지를 깨부순 당사자가 나였으니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병원에서 빠져나와 옷에 밴 약 냄새를 털었다.
뉘엿뉘엿했던 노을의 아스라한 보랏빛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노을을 쳐다봤다. 분명, 며칠 전까지는 저 장관에 감동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어떠한 감상도 안 느껴진다.
‘익숙해진 건가?’
나는 짧게 혀를 차며 멍울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유독 피곤한 하루였다. 저녁은 대충 라면으로 때우자고 생각하면서 교내 마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이었다.
고개만 돌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거리다 침대에서 벗어났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행동하는 게으른 일과의 시작.
‘주말이 좋긴 해.’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곤 늘어지게 하품했다. 푹 자서 피로가 풀렸는지 물에 젖은 솜뭉치 같던 몸이 가벼워졌다.
최근에 이 정도로 곤히 자 봤던 적이 대체 언제였을까.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머리맡에 놓인 생수를 집었다.
곧바로 벌컥벌컥 털어 마셔 입가심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라는 아재스러운 탄성과 함께 입가를 쓸어 물기를 닦았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꼬락서니가 딱 숙취에 찌든 현대인의 모습이었다.
‘맥주 마시고 싶네.’
머리통이 찌릿할 정도로 한 500cc 한 잔이 생각났다. 전생에는 가게 일 때문에 뒷정리하면서 종종 생맥 기계에서 뽑아 마셨는데.
혀를 어루만지는 맥주 거품을 시작으로 목젖을 청량하게 때리는 톡 쏘는 기포.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소매로 침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팔자란 게 참 기구한 것 같다.
작년까지만 해도 맥주도 마시면서 평범한 삶을 살았는데, 어느새 비일상의 태풍의 눈에 서 있었다.
어제만 해도 눈앞에서 두 미소녀가 칼부림 섞인 드잡이질을 하지 않나. 생각해 보니 정작 나도 내가 썰어 버린 당사자에게 찾아가 멸족시켜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하고 온 참이었다. 입에서 피식 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도 대가리가 어떻게 된 건가.’
손으로 머리를 헤집으며 잡념을 털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일들에 연연할수록 의도치 않게 더 휘말릴 뿐이다. 녹스는 이제 별일만 없다면 신경을 꺼도 될 것 같고, 문제는 레이첼인데…….
기적의 가호에 의거한 그녀의 성격은 욜로 그 자체.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플레이 당시에도 주인공인 레온에게 끈적하게 먼저 다가와 놓고선, 막상 메인 히로인 아벨보다 늦게 함락되는 인물이었다.
가장 엮이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휘말려 버린 것 같은데. 호구처럼 피해 다니는 건 사양이지만, 마땅히 대처법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건 차차 생각하고.’
앞으로 해야 할 게 많았다. 이 주 후로 임박한 첫 중간고사 준비가 우선이다. 아무래도 보상이 B급 무장 ‘무라사메(叢雨)’인지라,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다.
도검 계열 장검이긴 해도 사실상 무장이 없는 것과 다름없는 내게는 감지덕지다. 또한, 가호의 규격에 벗어난 것도 메리트라면 메리트. 뭐, 나중 가서 정 손에 안 맞으면 대장간에 맡기면 될 일이다.
시험의 내용은 클래스 구분 없이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뤄서 마수 무리를 토벌하는 것. 아카데미에서 치러지는 실습이나 시험은 대개 협동 위주였다.
개개인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우 간의 신뢰가 더 중요하다나 뭐라나.
뭐, 덕분에 조원만 잘 만나면 버스 타고 꽁으로 보상만 얻어 갈 수 있으니 이득이려나.
참고로 중간고사에서 토벌할 마수는 상반신이 물고기, 하반신은 인간의 모습을 한 D급 마수 ‘머맨(merman)’이다. 쉽게 말해, 잉x킹이 이족 보행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씨발.’
게임으로 봤을 때도 존나 불쾌하게 생긴 마수였는데, 실제로 볼 생각을 하니 치가 떨렸다. 한평생 생선을 잡아 왔는데, 다리 달린 생선들을 마주한다 생각하니 욕지거리가 입안에 맴돌았다.
차라리 인어인 ‘머메이드(mermaid)’였으면 눈이라도 호강하지.
‘근데 걔네는 마인(魔人)이었지.’
마족의 주축 세력인 ‘마인’들. 그들에 비하면 마수들은 사실상 집 지키는 개 정도 되는 개체다.
700년 전, 인류와 휴전 협정을 맺고 지금은 잠잠하긴 했어도.
인류사에 무전(無戰)의 역사는 없다는 말이 있듯, 크고 작은 대립은 왕왕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반세기 전, 독단으로 휴전선을 넘은 마왕의 6군단장 ‘바스몬’.
시조의 영웅, 발로르 호아킨의 손에 봉인된 1군단장 ‘라이칸’을 부활시키겠다는 뭔 개같은 명분을 내세우며 단신으로 쳐들어왔단다.
인류는 그를 대적하기 위해 영웅 중 최강자들로만 구성된 칠성(七聖) 영웅들을 출전시켰고, 일주일간의 밤낮 없는 혈투 끝에 칠성 영웅이 승리한다.
그러나 승자 측인 칠성 영웅 일곱 중 검제, 현자, 창성, 절궁을 제외한 셋이 바스몬의 손에 명을 달리했다.
마족들은 바스몬의 독단적 행동으로 치부해 책임을 면피했고, 인류도 더 문제 삼아 봤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휴전의 끈이 끊길까 유야무야 넘어갔더랬지.
‘인류 최강 일곱이 붙어도 마왕의 간부 한 명에게 셋이 죽어 버릴 정도면…….’
심지어 바스몬은 ‘그 녀석은 우리 중 최약체였지.’라는 클리셰 속성을 보유한 군단장이었다. 새삼 홀몸으로 1군단장 라이칸을 봉인한 발로르 호아킨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근데 문제는 3년 후에 마왕을 포함한 마족들 전체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점이다.
“…….”
갑갑한 마음에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마른세수를 한 후, 짝 짝 안면을 때렸다.
이 험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중간고사만 염두에 두기로 했다.
일단 발품이라도 팔아서, 괜찮은 조를 구해야 한다. 원래라면 귀족님들 자제는 나 같은 특진생을 같은 팀으로 끼워 줄 리 없겠지만.
작금의 나는 아카데미 내에서 꽤 유명 인사이지 않은가. 어차피 조용하게 넘어가기 힘든 3년 생활, 이 점을 셀링 포인트 삼아 보다 편안하게 지내는 거로 목표를 조정했다.
생각을 마치고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몸을 다시 침대에 파묻었다. 성장기는 자도 자도 잠이 부족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거짓말처럼 나를 조원으로 끼워 주는 생도는 그 누구도 없었다.
첫 시험은 편하게 버스 좀 타보겠다는 계획은 고사하고, 자칫하면 낙제당할 수도 있는 상황.
어째서? 진지하게 스스로 자문해 봤다. 자감이었을까. 곰곰이 되짚어 보니 녹스 때의 처사가 너무 심했던 게 화근이 아닌가 싶다.
뭐든지 ‘적당히’가 안 되는 성격인지라 좀 과하게 대응한 경향이 없잖아 있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두려움의 대상 비슷한 게 되어 있었다.
나뿐 아니라, 클로이에게도 조 권유가 없었다. 아마 레이첼과의 갈등이 원인이지 않을까. 그 일 이후로, 같은 반 생도들은 묘하게 그녀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하긴, 나 같아도 문답 무용으로 대화 대신 커터칼부터 빼 드는 친구는 곁에 두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일에 내가 얽혀 있으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야 원래부터 아싸였는지라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만, 클로이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름 잘 적응해 완만한 교우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아침에 아싸 취급.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클로이에게 물었다.
“클로이, 조 권유하는 생도는 아직도 없어?”
“아, 네. 아직은 없네요, 헤헤.”
헤실거리는 미소를 걸고 머리를 긁적이며 답하는 클로이.
“너는 좀 불편하지 않아? 뭐, 나야 원래부터 애들이 꺼리긴 했는데, 클로이는 친구도 좀 사귀고 그랬잖아.”
“아! 저는 괜찮아요! 검마 군만 있으면…….”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괜찮다는 말이 마냥 거짓말은 아닌 게, 클로이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낯빛이 밝았다.
그래, 클로이는 이런 얘였지. 나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럼 이번 시험은 나랑 같은 조 하자. 앞으로 세 명은 더 구해야겠지만, 일단 둘 다 아직 조가 없는 상황이니까. 괜찮지?”
“아, 아, 네! 당연하죠!”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더니 배시시 한 미소를 짓는다. 같은 조 제의를 한 건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클로이는 내가 확실하게 인정하는 전력이다. 동행한다면 내가 솔선해서 칼을 뽑아 들 일은 없을 정도로. 솔직히 대인전이야 30초 안에 끝낼 수 있다지만, 시험은 1시간 안에 더 많은 머맨을 처치해야 한다. 아무리 빨리해도 30초 안에 목표치를 채울 순 없을 터다.
그렇게 클로이와 시험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낯익은 불청객이 불현듯 들이닥쳤다.
“검마 쿤! 나 놀러 왔어!”
레이첼. 그때 일 이후로, 며칠은 잠잠하다 싶었는데. 달갑지 않은 손님의 방문에 나는 진이 빠진 얼굴이 됐다.
“왜 또 온 거지?”
“엥? 그냥 놀러 왔는데?”
옆자리에선 클로이가 금방이라도 드잡이질을 할 듯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손이 주머니로 향하는 게 벌써 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오늘은 그냥 가라. 지금 안 그래도 바빠서 너 상대해 줄 시간이 없다.”
“검마 쿤, 너무 매정해!”
“…그, 검마 쿤이라고 좀 안 부르면 안 될까?”
레이첼은 혀를 삐쭉 내미는 것으로 화답한다. 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휘휘 손짓했다. 이제 좀 가라는 의미였다. 귀가 먹었는지, 그녀는 반대로 내 옆에 바싹 달라붙는다.
“검마, 너는 이번 시험 조 구했어?”
의도한 건지 장난인지 절묘하게 아픈 곳을 찌르는 레이첼.
“아니.”
“오, 정말? 그러면 우리 조 들어올래?!”
느닷없는 제안에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나한테 왜? 나 아니어도 너랑 같은 조 하려는 애들은 줄을 설 텐데.”
“걔네는 재미없잖아. 왠지 너랑 하면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거든.”
“나 이미 클로이랑 같은 조 하기로 했어.”
“괜찮아! 마침 두 자리 비어 있거든.”
구미가 당기긴 했다. 상대가 레이첼이라는 게 좀 그랬지만, 옛 성현의 말씀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하셨다.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카데미의 4석께서 친히 해 주는 제안이다. 안 그래도 이대로면 첫 시험부터 성적이 아슬아슬할 참이었다. 선택지가 많지 않은 상황.
클로이에게 의사를 물었다. 레이첼 때문에 기껍진 않은지 미간을 좁히긴 했어도 내 부탁에 마지못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한다.”
“오케이! 대신 무르기 없기야!”
레이첼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걸쳤다. 곧바로 그녀는 조장한테 연락한다며 핸드폰으로 문자를 한다. 그 모습에 불현듯 의문이 스쳤다.
“근데 조장이 누구야?”
“레온 반 라인하르트라고, 누군지 알지?”
이런 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