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9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91화(190/300)
191화 쟁탈전 (1)
강검마가 뱀을 짓이기듯 도륙했다. 비명이 처절하다. 하지만 이 새카만 공간엔 탈출구란 없었다. 바실리스크는 선 채로 난자당하며 살코기가 발라졌다. 반항은 불가능했다. 겸허히 시퍼런 칼날을 받아 내야만 했다.
스겅!
시야의 암전. 바실리스크는 지금 3,423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의식이 사라지기 무섭게 눈이 번쩍 뜨였다. 이번에도 같은 장소와 같은 인간이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일어날 결말도 똑같았다.
이곳은 시간이란 테두리 바깥의 공간이다. 해서 [무통의 가호]의 제한 시간도 여기서만큼은 무한했다. 강검마가 사시미를 휘둘렀다. 무자비한 칼날이 비늘을 쭉 찢었다. 그 안에서 석유처럼 검은색의 내용물이 왈칵 쏟아졌다. 수천 번을 맛봐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매운 격통을 느끼며 뱀의 머리가 떨어졌다. 한 줌 남은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새로운 목숨이 부여됐다. 그리고 바로 사시미가 그 목숨을 빼앗았다.
폭력이 당연시되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 훼손된 세상. 바실리스크는 자신이 깔보았고 우롱했던 인간에게 영혼이 깎였다.
서걱!
뱀이 죽었다. 수천 번 죽었다. 수억 번을 고쳐 죽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희미해질 즈음, 뱀이 택한 것은 구차한 구걸이었다.
“…제발. 이제 정말 죽… 여 줘.”
바실리스크가 강검마에게 애걸했다. 눈 근육이 완전히 풀려 동공이 좌우로 벌어진 채였다.
“말에 어폐가 있네.”
강검마가 피 묻은 사시미를 털며 말했다. 그는 줄곧 무표정이었다. 그 모습은 바실리스크의 말초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지금까지 계속 죽여 줬는데, 죽여 달라고? 아직도 부족한가 보네.”
“그, 그런 말이 아니다. 제발 나를 이 속박에서 해방해 달란 것이다!”
“부탁하는 태도가 영 별로다.”
사실 강검마도 지겨워지던 차라 슬슬 관둘까 싶었다. 그런데 뱀의 반응을 보니 아직 부족한 것 같다. 그는 따분함에 겨운 한숨을 내쉬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놈의 희망 사항에 대한 거절이었다.
“앞으로 몇천 번 더 죽으면서 생각해 봐. 어떻게 조아려야 죽을 수 있을지.”
“자, 잠……!”
무라사메가 바실리스크의 전신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깨끗해진 칼날이 선혈로 다시 더러워졌다.
더 많은 죽음이 되풀이되어, 바실리스크의 정신이 식물 상태가 되자 비로소 칼질이 멈추었다.
진심 어린 하소연은 침묵임을 그제야 깨달은 바실리스크였다.
그가 9,608,251,206,530,847번째 죽음에 이르렀을 때였다.
* * *
혼은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현 상황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보고 있다. 한데도 그 어느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기현상을 넘어선 초상현상의 현장에 있으니 다리가 힘이 풀렸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게……. 고리의 마안.”
전설로만 여겨지던 마안. 그 힘을 그녀는 똑똑히 목도했다. 파괴되기 이전으로 역행하는 주변 풍경. 이것은 시간의 역행이다.
츠즈즈.
때마침 완파되었던 석상은 그 원형을 되찾았다. 공중에 무중력 상태로 재조립되어 가는 최설아. 이후 차가운 돌 표면이 점차 사라져 가며 보드라운 살결이 번져 갔다.
이윽고 최설아가 자신이 박살 났던 자리에 정수리를 찧으며 떨어졌다.
“아얏!”
최설아는 머리를 감싸 쥐면서 신음했다. 말 그대로 머리가 깨질 듯한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녀는 잠깐 그러고 있다가 문득 쭈뼛 소름이 돋았다.
‘아, 맞다. 나 죽었지.’
자각이 생기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최설아는 달달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믿기지 않는 풍경이 고스란히 그녀의 망막에 맺혔다.
‘…이게 사후 세계?’
그녀 자신이 죽었던 장소와 다를 바 없는 장소. 그러나 풍경이 테이프 되감기는 것처럼 역재생하고 있다.
사후 세계라면 으레 삼도천이라든가, 염라대왕과 일대일 면담이라든가 그런 걸 생각했는데, 상상했던 황천과는 너무도 판이했다.
“보, 보라돌이 씨?”
그때 등 뒤에서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처음엔 귀신인가 싶어 눈을 꾹 감은 최설아였으나 듣다 보니 낯익었다. 괘씸하면서도 무척이나 반가운 목소리.
최설아가 팩 뒤를 돌아봤다. 얍삽한 귀쟁이. 혼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에 최설아의 눈이 거짓말 보태 세 배쯤 커졌다.
“어? 뭐, 뭐, 뭐야! 귀쟁이 너도 죽은 거야?! 아오, 이 멍청아!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할 게 없어서 저승길 동무를 해? 어?!”
답답함에 최설아가 이마를 감쌌다. 그녀는 자신이 죽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퍽퍽한 핀잔을 들으면서 혼은 눈가를 닦았다.
“전 죽은 적 없어요……. 보라돌이 씨, 당신만 죽었었죠. 근데 그것도 이젠 아니네요. 살아 있습니다, 당신은.”
“야, 귀쟁이. 그… 죽은 충격에 상황 인지가 늦는 건 알겠는데, 그럴 때일수록 상황을 냉철하게 봐야 해. 나 봐 봐. 죽었어도 이렇게 태연한 거.”
“…….”
“다른 건 모르겠고. 지옥만 안 갔으면 좋겠는데……. 천국은 무리라도 그 중간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좀 타협해서 지옥 중에서 그나마 나은 지옥? 이건 욕심이려나?”
“…….”
계속되는 최설아의 헛소리. 혼은 재회의 감동이 팍 식는 걸 느꼈다. 촉촉함을 머금었던 눈시울도 순식간에 건조됐다.
“하아.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참 한결같네요. 보통 그렇게 큰일을 겪으면 사람이 변할 법도 한데…….”
혼은 폭 한숨을 흘렸다. 그녀는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킴으로써 설명을 대신했다. 한차례 갸웃한 최설아도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어? 어!”
최설아는 아연한 얼굴이 됐다. 등을 보이며 서 있는 검은 머리, 그리고 희번덕이는 사시미 두 자루. 그녀가 제일 처음으로 느낀 건, 격렬한 당혹스러움. 이후엔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혼이 했던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한다. 죽었다 깨어난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 하나는 확신한다.
“주… 군…….”
저분이 죽었을 리는 없다. 그리고 자신은 저분과 같은 장소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곳은 사후 세계 따위가 아닌, 산 자의 영역이다.
‘나 살아 있구나.’
그 삼단 논법으로 말미암아 최설아는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 안에 무언가 가득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빌런이 되고 재가 됐던 ‘감정’이란 불씨가 재점화됐다. 그녀는 죽었다가 부활했다. 단어 그대로 다시 태어났기에 인간성마저 돌아온 것이었다.
최설아의 손끝에 쿵쿵 뛰는 심박이 느껴졌다. 심장이 뛴다. 다만 되살아났다는 기쁨보다도 더 거대한 유열이 피를 달궜다. 주군을 향한 순수한 경외심이었다.
“아, 힘들다.”
그 순간, 강검마가 목을 이리저리 스트레칭하더니 불쑥 뒤돌았다. 코를 훌쩍거리는 최설아의 모습. 입술을 흐물거리며 뭐라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보고 있자니 찌푸렸던 눈살이 펴지는 기분이었다.
‘…죽었던 최설아가 되살아났으니 인과율이 얼마나 어그러졌을진 상상도 안 되는군.’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건 최설아가 사지 멀쩡하단 것이었다. 그거면 됐다.
강검마가 옅은 미소로 말했다.
“여기 지긋지긋하다. 후딱 정리하고 돌아가자.”
혼은 작게, 최설아는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나를 포함해 최설아와 혼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로 말을 맞췄다. 엄청난 사변을 겪었던지라 다들 지쳤기 때문이다. 물론 마냥 쉬진 않았다.
그 며칠 동안 난 바실리스크 토벌 사실을 메디아에게 보고했다. ‘고리의 마안’ 같은 민감한 부분은 쏙 빠뜨렸다. 그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할 엄두가 안 났다.
메디아는 새삼스럽게도 펄쩍 뛰었다. 그런 일을 어떻게 자신한테 한마디 없이, 웬 생짜 교관이랑 갔냐면서.
메디아가 최설아를 당장 불러서 추궁하려는 걸 말렸다. 그녀의 감봉을 염려해서는 아니었고, 까딱하면 혼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도 메디아는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다. 뚱한 표정으로 입을 댓 발 내밀긴 했지만.
참고로 혼은 여전히 최설아네 집에 머물고 있다. 그녀의 과업은 끝났다. 한데도 혼은 마경으로 복귀하는 게 아닌 아카데미에 남는 걸 택했다.
얼핏 듣기론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갔다던데. 간간이 최설아가 귀쟁이 때문에 돈이 깨진다고 투덜 문자를 보내왔다.
물론 난 싹 다 무시했다, 대꾸할 가치를 못 느껴서.
“…….”
머리를 팔로 받치고서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잡생각에 빠졌다. 바실리스크를 처치하고 노획한 ‘낙룡의 마석’도 뷜란트한테 맡겼겠다, 잠시 뇌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요새 너무 앞만 보고 달리긴 했으니까.’
그래도 그 덕에 편린을 네 개나 얻은 상황. 당분간은 심기체를 가다듬는다. 그래야 이후에 지치고 않고 달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자니 정신이 노곤했다. 창 너머에선 서녘의 노을이 주황색 물감처럼 하늘을 염색했다.
‘며칠 새 저녁 바람이 더 차가워졌네.’
곧 11월이었다.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초입이 맞물리는 절기다. 그렇게 되면 호아킨 아카데미에서 사계절 전부를 보내 보는 거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입학할 때만 해도 살아 보겠다고 고군분투했었는데…….”
나는 쓰게 웃으며 침대를 박찼다. 여유를 갖는 건 좋지만 뺀질거리는 건 성미에 안 맞았다.
해서, 모처럼 아카데미 훈련장에 방문해 볼 생각이었다. 회원권이 비쌌으나 큰맘 먹고 냈다. 언제까지고 연무장을 기웃거릴 수가 없었다. 왜냐면 연무장을 방문할 적마다 생도들이 어떻게 알고 우르르 떼지어 왔으니까.
남생도들은 내 움직임 하나하나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담아 두었으며, 여생도들은 꺅꺅 소리를 내질렀다. 헐레벌떡 도망이라도 치면 끈질기게 추격했다.
천성이 사람 많은 장소를 꺼리는 나로선 몹시 난감했다. 주목받는 것도 싫고, 여생도들이 보내는 끈적한 눈빛도 부담됐다.
그래서 쾌적한 환경을 위해 비싼 돈 들여 훈련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목적은 실력 증진보단 ‘육신의 격’ 향상이었다.
“오늘도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거기마저 생도가 득실거리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미약한 불안을 느끼며 난 훈련장으로 향했다.
* * *
호아킨 아카데미의 훈련장.
아벨이 팔다리를 쭉쭉 늘려 몸을 풀었다. 간만의 훈련이기에 근육을 충분히 이완시켜 줘야 했다.
요즈음 아벨은 검술 훈련보다 유연성을 키우는 데 신경을 기울였다. 그래서 시작한 게 필라테스. 샤일이 입에 침이 마르게 추천했었다.
반쯤 속는 셈 치고 해 봤는데, 의외로 잘 맞았다. 그래도 검을 놓으면 감각을 잃으니 근 이 주 만에 훈련장을 찾았다.
“이 정도면 되겠다.”
스트레칭을 마친 아벨은 검을 쥐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손마디에 착 감겼다. 더불어 그녀는 귀신의 집 대소동 날 검리를 하나 터득했다. 눈에 보이는 성장은 최고의 동기 부여였다.
‘여기서 더 발전하면 나도 언젠간.’
아벨이 뿌듯한 웃음을 흘리며 자세를 취할 때였다. 누군가 털레털레 훈련장에 걸어 들어왔다.
‘…사키?’
아벨이 놀란 눈으로 사키를 쳐다보았다. 사키는 힐끗 바라보곤 아벨과 멀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쟤가 훈련장을?’
아벨은 사키의 성격을 알고 있다. 같은 클래스였던 시절에도 그녀는 체력 훈련을 극도로 꺼렸었다. 구보 뛰는 시간마다 양호실로 달려가서 잠만 잤던 사키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훈련장을 왔다고? 아벨은 돌연 창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노을이 서쪽으로 저물고 있었다. 태양은 동에서 서로 진다.
‘해가 서쪽에서 뜨지도 않는데!?’
아벨이 다시 사키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우왕좌왕하고 있자 사키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뭘 빤히 그렇게 봐? 왜, 내가 훈련장 오니까 해가 서쪽에서 뜨나 확인한 거야?”
아벨은 뜨끔했다. 정곡을 깊숙이 찔리니 반문조차 할 수 없었다.
사키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는 아벨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주섬주섬 무장을 꺼냈다. 훈련용 활이었다. 아벨의 훈련 무장과 같은 등급인 C급 활.
그녀는 활시위를 당겼다 놓으며 무장 상태를 점검했다. 길이 좀 덜 들어 뻑뻑해도 썩 나쁘진 않았다.
“아벨.”
“어, 응?”
사키는 터벅터벅 다가와 아벨과 마주 섰다. 그리고 대뜸 한마디 내뱉었다.
“한판 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