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9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92화(191/300)
192화 쟁탈전 (2)
훈련장이 침묵에 잠겼다.
아벨과 사키, 그녀들 사이를 냉랭한 바람이 휘저었다. 적막에 먼저 입술을 뗀 건 아벨이었다.
“한판 붙자고? 왜?”
사키는 말없이 활시위의 길을 들이고 있었다. 답은 정해졌고 너는 말만 하면 된다는 반응. 더불어서 이유 따위는 묻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벨의 얼굴에 황당함이 차올랐다. 처음엔 떨떠름했지만, 좀 지나자 어이가 없었다.
‘그래, 사키는 원래 저랬지.’
아벨이 사키를 불편해하는 까닭은 저 독선적인 태도에 있었다. 이렇듯 그녀는 자신의 용건만 툭툭 뱉곤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비단 아벨에게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모두를 똑같이 대했다.
평등한 홀대에 생도들은 사키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멋있다고 보는 생도가 수두룩했다.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를 냉대하니 그녀 앞에선 만민 평등이었다.
그나마 웨폰과 있을 때는 유사 대화를 나눴지만, 거기까지. 할 말이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사키는 기본적으로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곤 말이다.
‘…걔랑 있을 적엔 항상 웃곤 하지.’
아벨은 눈매를 좁히며 사키를 바라보았다. 꺼림칙한 감정이 성대까지 올라 목구멍을 긁었다.
아벨이 고압적으로 팔짱을 끼고서 반문했다.
“난 개인 훈련하러 온 거거든? 이유도 말 안 해 주는 대국은 승낙해 줄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리고 이렇게 목적성을 갖고 훈련장 찾아오는 거, 상당히 불쾌해.”
사키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자의식 과잉은. 아벨, 네가 요새 훈련장에 온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난 맨날 왔어. 한판 붙자는 건 지금 막 정한 즉흥적인 결정이고. 이유는 뭐… 그것까지 말하긴 귀찮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하.”
기가 차 버린 아벨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게 어떻게 부탁하는 사람의 말투지? 되레 저쪽이 부탁받은 듯한 퉁명스러운 기색이었다. 아벨의 얼굴에 자그마한 균열이 일었다.
‘마음 같아선 확 승낙해서 저 태도를 계도해 주고 싶지만…….’
덥석 받아들이기엔 사키의 의도대로 흘러간다. 그러면 결국 그녀에게 휘말리게 되니까. 더구나 자존심의 문제도 있거니와 영문도, 목적도 묘연한 데다 명분마저 명확지 않았다.
대련의 진정한 취지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이건 그 어떠한 것도 충족되지 않는 대련이었다.
‘여기선 차라리 거절을 놓는 게 맞아.’
아벨이 그리 마음을 굳힐 무렵이었다. 훈련장에 또 한 사람이 들어섰다. 바로 유세인이었다.
“쟤는 또 왜……?”
이건 또 이거대로 의외였다. 사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훈련장이란 장소와 거리가 먼 이가 유세인이다. 그녀의 등장은 사키 역시 뜻밖이었는지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안 그래도 애매했던 분위기가 한층 더 묘해졌다. 아벨과 사키의 시선이 몰린 가운데, 세인이 좌우지간 둘의 중간에 섰다. 세인의 눈동자는 여전히 거멓다. 그와 같은 홍채 색은 강검마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관계성이 있으니까. 유세인과 강검마는 친척이라는 설정이었고 검은 눈 덕분에 모두 믿었다.
세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곤 분위기를 대번 읽었다는 듯 옅게 웃었다.
“내가 심판 해 줄 수 있음.”
세인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곧 호루라기를 꺼내 물었다.
…왜 저런 걸 들고 다니는 거지? 아벨과 사키는 같은 의문이 어렸다. 좌우지간 심판까지 나타난 상황. 세인이 아벨과 사키를 눈빛으로 보챘다.
‘시작 안 함?’
이렇게 된 이상 내빼면 그쪽이 지는 모양새였다. 경황없기도 잠시, 이내 아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조금 막무가내긴 해도 상황은 대련을 종용했다. 비록 대련의 목적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피할 이유도 딱히 없기에.
아벨은 칼자루를 두 손을 감싸 잡았다. 길게 호흡을 흘리며 기세를 정돈했다. 검날이 그녀를 좌우로 가르듯이 정중앙에서 우뚝 섰다. 암묵적인 수락이었다.
“대련 방식은?”
사키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화살통을 어깨에 걸었다. 화살촉은 전부 선명하게 곤두 서 있었다.
“말해 뭐 해, 호아킨 아카데미잖아. 당연히 아공간 대련이지.”
* * *
“이건 또 뭔 상황이야……?”
훈련장에 도착한 직후 입 밖에 나온 말이었다. 들어서기 전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래도 별생각 없이 입장했는데 도저히 안 어울리는 세 사람의 조합이 나를 반겼다. 아벨, 사키, 그리고 세인.
하물며 내가 들어섰을 땐 간이 아공간 장막이 전개된 상태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아공간 대련. 언뜻 보건대 대련자는 아벨과 사키. 호루라기를 문 세인이 심판인 것 같았다.
‘대련치곤 힘이 너무 들어갔는데?’
둘 사이에 사납게 튀기는 불똥 하며, 눈에서 뿜어지는 시퍼런 예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긴장감이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살기? 전의? 아니, 저건…….’
투쟁심이었다. 한데 그 정도가 조금 과한… 굳이 비유하자면 먹잇감을 쟁탈코자 이빨을 드러내는 맹수 같았다. 뭔진 몰라도 거머쥐고자 하는 대상이 단단히 겹쳐 버린 모양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기류가 이토록 매서울 수 있나 싶었다. 눈빛들이 집착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상대방을 꺾어 기필코 쟁취하고 말겠다는.
‘갑자기 오한이…….’
내가 은근슬쩍 훈련장을 빠져나가려던 차, 마침 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벨과 사키는 온 신경이 서로를 향해 있기에 내게 눈을 둘 겨를이 없을 터. 세 사람 중 세인만이 나를 눈치챘다.
세인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하도 형형색색의 눈을 봐 왔더니 도리어 이질적이었다. 다만 그건 내게 있어 세인이 가장 미묘한 인물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인과의 짧은 눈싸움이 결착이 났다. 그녀가 호루라기를 머금은 채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 모양만으로 내게 말했다.
‘어디 감? 싸움의 원인이 봐야지, 누가 보겠음?’
“…뭐?”
대답할 새 없이 호루라기가 찌르르 떨렸다.
[지금부터 아벨 폰 이벨룽과 사키 료조의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영웅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 *
개막을 알리는 기계음이 떨어진 순간, 아벨이 도약했다. 궁사와의 싸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로의 간극이다. 거리가 벌어지면 이쪽이 한없이 불리해진다. 허나 뒤집어 말하면 거리를 좁혔을 때 그만큼 우세를 점한다.
지척까지 세 걸음 만에 다다른 아벨이 검을 낮은 궤도로 휘둘렀다. 아공간 대련이다. 검격에 망설임을 두지 않고 허를 찌른다.
‘다리만 제압하면 거리 싸움은 불가능해.’
우측 하단을 노리는 검날. 사키가 오른발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검날이 지면과 가까워진 찰나, 떠올랐던 발이 검의 빗면을 지르밟았다. 검끝 몇 마디가 바닥에 심어진 모양새.
아벨이 헛숨을 삼켰다. 그녀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 생도는 몹시 드물다. 기껏해야 강검마와 레온, 둘뿐일 것이다.
‘보고 반응한 게 아니야.’
이건 예측한 거다. 실제로 사키는 아벨의 사소한 행동에서 이 동작을 유추했다. 호흡, 근육의 꿈틀거림, 어깨의 움츠림. 타고난 인체 버릇을 눈으로 읽고 사전에 먼저 움직이면 아무리 빨라도 대응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모든 건 사키였기에 가능했다. 가공할 만한 동체 시력에 취합과 계산을 초 단위로 해치워야 했으니까.
‘젠장.’
정신이 번쩍 든 아벨이 고개를 쳐들었다. 사키가 코앞에서 화살을 겨누었다. 피해야 한다. 근거리에서 화살이 날아오면 거기서 대련 끝이었다. 그러나 공격은 엉뚱한 방향에서 날아왔다.
퍽.
무거운 타격음. 사키의 왼발이 그녀의 배에 직격으로 꽂혔다. 아벨의 상반신이 앞으로 쏠리듯이 말렸다. 금방이라도 화살을 쏠 것 같았던 건 눈속임이었다.
추가 공격은 곧장 날아왔다. 사키가 활을 몽둥이처럼 우악스레 휘둘렀다. 회피를 위해선 검을 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래선 싸움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다.
해서 아벨은 기꺼이 어깨 한쪽을 내주었다. 늑골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싸한 통증이 오른팔에 마비를 일으켰다.
“크윽.”
머릿속에 천둥소리가 울렸다. 하마터면 정신을 놓칠 뻔한 아벨은 퍼뜩 검을 잡아끌었다. 쑥 딸려 나온 검날이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왔다.
사키의 가슴에 혈선이 새겨지더니, 핏줄기가 치솟았다. 팔 하나를 내어 준다는 건 예상치 못했다.
아벨은 기세를 몰았다. 높게 비행했던 검날이 고점을 찍고 떨어졌다.
사키는 기대듯 허리를 뒤로 뺐다. 검날이 그녀가 있던 자리를 수직으로 갈라 버렸다. 넋 놓고 있었다면 사지가 반반씩 분할됐을 만한 검격.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살았다.
사키는 섬뜩함을 느끼며 황급히 자리를 박찼다. 아벨이 따라붙었다.
‘거리를 벌린다.’
가까이선 가망이 없었다. 다음 동작 예측도 한두 번뿐이었다. 상대는 아벨이다. 눈속임 같은 잡기술을 몇 번이고 허용할 리 만무했다.
체력, 반사 신경, 기술. 그 모든 것에서 뒤처진다는 걸 사키는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서도 대련을 신청한 것이었지만.
그게 승리를 포기한단 의미는 아니었다.
‘딱 한 번이면 돼.’
사키가 아벨을 피해 내달렸다. 그녀는 달리면서 화살을 거듭 내쏘아 아벨을 견제했다.
아벨은 초반엔 화살을 피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냥 검을 휘저어 튕겨 버렸다. 가호가 깃든 화살이었지만 그녀 또한 가호를 발현했다. 사키와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가호를.
공방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사키의 움직임은 점점 굼떠지는 데 반해, 아벨은 훨훨 날아다녔다. 한쪽 어깨가 분쇄됐다고 하나 승기는 아벨 쪽으로 기울었다.
거리가 금세 좁혀졌다. 이윽고 검날이 사키의 뒤통수를 향해 쇄도했다. 아득한 격차가 느껴지는 엄청난 신체 능력. 하지만 관성은 그 속도에 비례하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을 노렸다.’
사키는 사이드 스탭을 밟았다. 그녀의 발이 빙판길 위처럼 미끄러졌다. 머리 위로 눈먼 칼이 지나갔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파공음이 그친 즉시, 사키는 거의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바로 화살을 쭉 당겼다.
시위가 입술 중앙에 닿음과 동시에 당긴 힘을 풀었다. 날 선 화살촉이 번뜩이며 미간을 노렸다.
아벨은 맹렬하게 달려오는 중이었기에 피할 틈은 없을…….
까득!
사키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화살을 앞니로 까득 깨문 아벨의 모습. 입가에 피가 흥건했다.
달음질의 관성 때문에 회피와 반격은 불가능. 그렇다면 이빨로 물어 버리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아벨의 안광은 독이 바짝 올라 있었다.
곧바로 사키는 화살을 날렸다. 불안정한 궤도로 쏘아졌기에 아벨은 어렵지 않게 피하거나 쳐 냈다.
힘없이 나가떨어진 화살들은 바닥, 벽면, 사물 등에 이리저리 튕겨 댔다.
아벨은 몸을 날렸다. 잘 갈린 검날에 빛이 번졌다. 그 코앞에 사키가 뒤로 나동그라져 있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대의 자세에 아벨이 승리를 장담한 순간이었다. 아벨의 동공이 커졌다.
“아벨, 너는 말이야. 너무 앞만 보고 달려.”
사키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뒤도 좀 보고 살아야지. 안 그러면 지금처럼 뒤통수 맞는다?”
탕. 탕. 탕. 사방팔방에 반사된 화살 한 발이 아벨의 뒷덜미를 노렸다. 검날이 매끄럽게 낙하한 건 그와 동시였다.
“지더라도 너무 억울해하진 말고. 여기서부턴 운의 영역이라 생각하자.”
“……!”
감지되지 않은 화살, 벽력처럼 내리치는 검날.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두 소녀는 서로의 운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