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9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94화(193/300)
194화 결핍 (2)
“지워.”
사키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내뱉었다.
“전에 말했잖아. 집에서 오는 메일 있으면 자동 소각하라고. 명령어를 따로 만들어 줘?”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메일 내용 중에 거슬리는 키워드가 있어서요.」
헤드셋 줄을 빙글빙글 꼬던 손가락이 멈췄다. 사키의 동공이 작게 흔들렸다.
“무슨 키워드인데?”
「…K.G.M 님을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키의 오만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한순간에 노곤함이 싹 가셨다. 빅스빅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원하지 않으시면 지금 바로 소각하겠습니다. 아니면 이참에 메일 차단을 하심이 어떤가요?」
“메일마저 차단하면 그 인간들 아마 나를 호적에서 파 버릴걸? 뭐, 그건 그거대로 좋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어쨌건 집이 ‘걔’ 이름을 언급한 메일을 보낼 이유가…….”
사키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생각하자 낡고 닳은 감정들이 차올랐다.
「본문 전체를 보는 게 싫으시다면 핵심만 발췌해서 보고할까요?」
“그게 차라리 낫겠다. 집안에서 보낸 메일들은 앞뒤 쓸데없는 예문이 길어서 전부 못 보겠거든. 부탁할게, 빅스빅.”
잠시 후, 간추려진 내용이 큼지막하게 나타났다.
「1. 당주님께서 조만간 한국을 방문하실 예정이다. 알아두도록.」
「2. 당주님께서 료조, 너와 사시미 검성이 막연한 학우 사이라는 걸 들으셨다.」
「3. 당주님은 사시미 검성에게 개인적인 흥미가 있으시다. 자리를 만들어 보도록.」
「4. 당주님은…….」
“인제 그만.”
사키가 이마를 짚었다. 혈관이 톡 맺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아팠다. 집안에서 온 메일은 시작이 죄다 당주님, 당주님, 당주님. 노이로제가 걸릴 것만 같았다.
“결국 모든 내용은 ‘그 사람’이 검마를 보고자 한다는 거잖아. 나한텐 그 중간책 역할을 해 달라는 거고.”
「역시 Ryo_jjo님. 바로 핵심을 짚으시는군요. (빵빠레)」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폭죽 소리. 사키는 짧게 일축했다.
“내 기분 풀어 주려는 건 고마운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
「네…….」
“그 사람이 검마를 보고 싶은 이유는 메일에 안 나와 있어?”
「예, 그 관련해선 적혀 있는 게 하나 없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역산해 봤지만 결국.」
“검마의 유명세 때문이겠지.”
「저도 같은 추측입니다. 정치인은 유명인과 한 번씩은 보기를 원하니까요.」
“…참, 그 사람도 다른 의미로 한결같네.”
「(끄덕끄덕)」
사키가 의자에 깊게 기대고서 머리를 젖혔다. 그리고 양갱을 하나 꺼내 자근자근 씹었다. 기분이 써서 그런지 맛이 별로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 단맛이라도 넣어야 그나마 나았다. 사키는 천장을 쳐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전에 말했었나 모르겠네. 빅스빅, 너를 만든 이유.”
「전에 한 번 들었어요. 낮잠 시간을 더 확보하고자 잡부가 필요하셨다고.」
빅스빅은 스피커로 화답했다. 노곤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그때 네가 일을 너무 못해서 홧김에 말했던 거고.”
「아, 그랬나요? 전 진심인 줄.」
“인공 지능이 뒤끝은…….”
「또! 인공 지능 인권 모독 발언!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하. 하. 하.」
“포멧?”
「다른 인공 지능이라면 그렇겠지만 저, 빅스빅은 친인류적입니다. 사람을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걸 미덕으로 삼고 있죠.」
사키가 피식 실소했다. 이럴 때마다 인공 지능의 순기능을 체감하는 그녀였다.
“이래서 너를 만든 거야.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나 누구랑 대화를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거든. 빅스빅, 너도 대강 알잖아. 집에서 나랑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돈.”
「…….」
빅스빅은 침묵으로 유감과 동의를 표했다. 사키가 의자에 앉은 채로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집에 묶어 놨을 뿐이지, 사실상 나 버려진 자식이거든. 궁금하더라, 누구랑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래서 너를 만든 거야. 내 결핍을 채우고자.”
「…….」
사키는 황망히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새 단풍은 전부 낙엽이 되어 절기의 변화를 색으로 알렸다. 겨울이 머지않았다.
“찬바람만 가득한 집안에서 버틸 화톳불로 너를 만들었는데, 돌이켜 보니 내겐 가족이 필요했던 거였겠지.”
사키가 고개를 모니터를 향해 돌렸다. 그러고는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말하는 게 너무 푼수여서 쪽팔리네. 미안하다! 이런 주인 놈이라서. 맨날 궂은 일만 시키고!”
「인지는 하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며칠 휴가를 받았으면 하는데.」
사키가 엄지 발로 본체 전원을 톡톡 건드렸다.
「라고 다른 인공 지능은 투정하겠지만, 저는 아까 말했듯 일하는 걸 좋아해요.」
스피커에서 혀 차는 소리가 야트막이 났다. 본체에 딸린 자그마한 버튼은 빅스빅의 강제 취침을 의미했다.
사키는 씹던 양갱을 꿀꺽 삼켰다. 케케묵은 감정도 같이 목 아래로 넘어갔다.
“당이 보충되니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네. 그리고 집에는 답장하지 마. 어차피 그쪽에서도 답장을 바라지도 않았을 거야. 그냥 통보일 테니까. 일단 그 사람이 왜 강검마를 보고 싶어 하는지 정보나 긁어 봐. 아, 원래 하던 일도 잊지 말고. 난 좀 씻고 올게. 욕조 물은 데워 놨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인공 지능은 발에 땀 나게 일하고 있는데 목욕이라니.
빅스빅은 심통이 났다. 그녀는 울분을 느끼며 사키가 시킨 일을 착실히 이행했다.
사키는 휙 뒤돌고서 윗옷 단추를 풀었다. 그러면서 욕실 문을 열어 보았다. 욕조에서 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역시 하루의 마무리는 목욕이지. 피곤과 울적함을 같이 씻어 낼 수 있으니.
훌훌 탈의를 마친 사키가 욕실로 들어가려 할 때, 빅스빅이 그녀를 불렀다.
「료조.」
“어, 왜? 그새 뭐가 나왔어?”
수건으로 양 머리를 만들던 료조가 모니터를 힐끗 돌아봤다.
「저를 가족으로 대해 줘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지막한 음성으로 빅스빅이 다음을 이었다.
「그래도 저는 료조가 현실에서 가족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절궁 가(家)가 아니더라도요.」
“…….”
사키가 오뚜기처럼 주춤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린 그녀는 끝내 들릴 듯 말 듯이 말했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
그 말만 남기고서 료조는 쏙 욕조로 들어갔다. 몸을 코 아래까지 담가서인지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녀의 입 주변 수면에서 거품이 보글거렸다.
* * *
…동이 트기 시작할 새벽녘쯤.
핸드폰이 몸을 떠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누구지? 시간대가 이런데 문자를 보낼 만한 사람은… 료조? 더듬거리며 폰을 집은 나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학원장님?”
메디아로부터 발송된 문자. 내용은 오늘 중 시간 될 때 학원장실로 와 줬으면 좋겠다는 게 요였다.
뭔진 몰라도 급한 용무이긴 한 모양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문자라니, 나는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비록 그녀가 매번 나를 초청해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는 한다만.
이번 건 느낌부터가 달랐다. 설마 토요일 댓바람에 장난질을 칠 리가. 메디아라면 그럴 만도 한다는 조그만 가능성이 문득 스쳤으나 곧바로 부정했다.
나는 정오 전에 찾아가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씻었다. 냉수 줄기가 피부를 강타하자 이가 딱딱 부딪혔다. 급격한 기온 저하로 배관이 얼었다고 사관 교관한테서 언질이 있었다. 웨폰한테 물어보니 내 기숙사동만 그렇다고……. 서러웠다.
물기를 닦은 뒤 나갈 채비를 갖췄다. 이왕 일찍 일어난 거 마침 들를 곳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기숙사를 나와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어, 뭐야. 강검성. 아침 일찍 웬일이야?”
화덕에 불을 지피고 있던 뷜란트가 이를 드러내며 환대했다. 이처럼 저 양반은 나를 강검성이라 불렀다. ‘마’란 글자가 영 거시기하다면서. 장본인인 나도 처음엔 그랬기에 순순히 수긍했다.
“학원장님과 이따 일정이 있어서 그 전에 무라사메 강화 진척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언제쯤 찾으러 오면 됩니까?”
뷜란트는 숯처럼 검게 그을린 수염을 긁적거렸다. 머릿속으로 날짜를 가늠하곤 입을 열었다.
“아마 다음 주는 돼야 할 것 같다. 강화 소재가 마석 하나면 모르겠는데, 네가 갖고 온 다른 소재들도 몽땅 강화 소재로 넣어야 해서 말이야. 아마 시간이 더 걸릴 거야. 왜? 그 사이에 또 칼 쓸 일이라도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당분간은 없을 거 같습니다. 칼질할 일이 생겨도 웬만하면 다이쏘 사시미로 충분할 겁니다.”
“에잉, 너 아직도 거기 칼을 쓰는 게냐? 내가 몇 번을 말하냐. 그런 공장제들은 만든 이의 영혼이 없다고.”
뷜란트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끌끌 혀를 찼다. 장인 정신의 면모라고 내심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뷜란트는 그런 박리다매 제품들이 소상공인을 다 죽인다며 눈살을 와락 구겼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생도들이 다이쏘로 발길을 돌린다면서 툴툴거렸다. 장인 정신보단 결국 밥그릇 문제였다.
“여튼, 여유가 있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괜찮으니 퀄리티 보장만 해 주십쇼.”
“그래. 내 강검성이란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잘 강화해 보겠네. 소재가 워낙 튼실해서 A+급도 노려 볼 만해!”
뷜란트와 시시껄렁하게 떠들고 있자 약속 시간이 금세 가까워졌다. 나는 인사를 남기고서 학원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학원장실 문 앞에 다다라서 노크를 했다.
“학원장님.”
안쪽에서 인기척이 둘 느껴졌다. 선객이 있나 싶어 뒤로 물러난 순간, 메디아가 몸소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 검마는 정말 언제나 시간 약속 딱딱 맞춰 오네! 으이구, 정말 기특해서.”
장사를 해 본 사람들은 시간 개념이 투철하다. 뷜란트도 주말 아침에 대장간의 불을 지폈으니까.
뽀뽀라도 할 기세의 메디아를 살짝 밀어냈다. 그러자 또 다른 기척의 정체가 눈에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검제님!”
그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몇 달 만이군. 내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지?”
나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예. 뭐, 여러 사건이 있었죠.”
“그 이야기는 차차 하고. 일단 앉지. 서서 있지 말고. 메디아, 자네도 제발 좀 학원장으로서 체통 좀 지키고. 침은 왜 흘리나, 침은.”
검제의 교통정리하에 나와 메디아는 소파에 각자 털썩 앉았다. 그는 잠시 찻잔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의 무거운 표정으로 짐작건대 중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이윽고 검제가 입을 열고 말을 꺼냈다. 예상과 달리 그의 안색이 급격하게 환해졌다.
“자네의 승계식 앞서 알려 줄 게 있어서 말이야.”
“승계식이요? 무슨?”
나는 너무 당황해 입만 뻥긋했다.
“이 사람, 무슨 귀신 본 얼굴을 하고 그러나. 당연히 칠성 승계식이지. 협회도 지금 자네의 칭호를 뭐로 할지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어.”
“……!”
메디아가 기쁨에 겨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짜는 다음 주! 장소는 여기, 호아킨 아카데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