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9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97화(196/300)
197화 갈등 (3)
전·현생을 통틀어 내게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내 첫 스승님. 솔직히 내게 가르침을 준 사람이 그 인간 하나였기에, 굳이 ‘첫’이란 수식어가 무색하긴 하다.
그래도 그 양반은 꼭 ‘첫’을 강조했었다. 연유는 모른다. 그냥 그렇다는데 물꼬를 트기도 귀찮아서, 그러려니 넘겼다.
여튼, 그 양반이 내게 가족의 역할을 해 주었던 건 부정하기 힘들다. 열일곱에 집을 뛰쳐나온 나를 거두고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일까지 가르쳤으니까.
그래서인지 내 사상과 가치관은 첫 스승님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양반이 잔소리가 좀 많아야지. 잠깐 쉬기라도 하면 이맛살부터 구기던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했던 말들은 확실히 뇌리에 새겼다. 인상 깊었던 말도 여럿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 개중 한마디가 떠올랐다.
-무턱대고 들이대는 이성을 조심해라.
곱씹어 보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첫 스승님은 당연하지 않게 말했다. 그 점이 상당히 그럴듯해 묘한 설득력이 있었지.
이유 없이 호감을 표하는 이성? 불순한 목적성이 다분해 보인다. 잘생겼으면 또 모르지만, 나랑은 관계없는 이야기다. 전생도, 현생도 미남 축에는 못 끼는 얼굴이니.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신기하네요. 뭐랄까, 연예인을 바로 코앞에서 보는 기분? 말했듯이 저 당신의 엄청난 팬이거든요.”
그렇기에 눈앞 여인의 노골적인 추파는 확실히 거슬린다. 탁 트인 차림도 그렇고, 손짓 몸짓. 어느 하나 의심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다.
백번 양보해 취향이라 치자. 그러나 ‘시스템’은 그 가능성마저 배격하려는 듯하다.
[정신에 외부의 무단적 침입이 감지되었습니다.] [상대를 유혹하려는 목적의 독성 가호입니다.] [다만, ‘정신의 격’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겉으로 티는 안 내고 있지만 내심 황당함을 느꼈다. 일단 저런 종류의 가호가 있다는 것과 그 간섭을 ‘정신의 격’이 자동으로 튕겨 냈다는 것. 에러가 났었던 아고르 때와는 정반대였다. 아마도 정신의 격이 전보다 몇 단계는 상승했기 때문이지 싶다.
여러모로 편리할 것 같긴 하다. 시답잖은 외부적 자극은 이제 신경 꺼도 된다는 거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허탈감을 느꼈다. 반대로 말하면, 웬만한 것들엔 자극조차 못 받는 몸이라는 거니.
‘하아.’
텁텁함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와중에도 묘령의 여인은 작정하고 꼬드기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무어라 계속 주절거렸다. 그럴 때마다 상태창은 삐비빅! 거리며 시끄럽게 여인의 아양을 경고했고.
나는 여인을 빤히 응시했다. 그제야 그녀는 입을 가리던 부채를 착 접어 얼굴을 완연히 드러냈다.
확실히 미인이긴 했다. 하나 감상은 거기까지. 아벨이나 사키, 레이첼 같은 애들과 다닌 탓에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나였다. 암만 예쁜 사람이라 한들, 별다른 감흥은 못 느꼈다.
여인이 ‘넘어왔구나’ 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살포시 고운 손을 내밀었다. 손등을 보이는 걸 보니 악수 요청은 아니고.
입맞춤이라도 하라는 것 같은데. 난데없이 나타나서 이것저것 말 걸더니 귀족적인 제스처라.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렀다. 그리고 마저 가던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슥 지나치자 여인이 흠칫했다.
“왜, 왜지?”
모종의 계획이 수틀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여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그녀가 내 등에 대고 소리쳤다.
“잠깐만요! 제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나요? 말했잖아요! 당신의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고개를 반만 돌려 여인을 쳐다봤다. 싸늘한 눈총에 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에게 씹어뱉듯 말했다.
“한 번은 봐준다. 근데 두 번은 없어.”
“……!”
내 엄포에 여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씹더니 돌연 코웃음을 쳤다.
“하, 료조 그년이 남자 하나는 제대로 물었네. 가호도 안 통할 정도면 말 다 했…… 커억!”
채 말이 끝나기 전, 부채가 바닥에 떨어졌다. 여인은 목을 감싸 쥐고서 꺽꺽 새된 신음을 흘렸다.
‘이, 이건.’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감각. 이윽고 균형이 허물어진 사키 히나는 복도 바닥에 코를 박으면서 기었다. 주저앉은 채 침방울을 뚝뚝 흘리는 모습.
사키 히나는 간신히 눈을 들었다. 한순간에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으으.
주박처럼 몸을 옭아매는 검붉은 기운. 이건 살기였다. 그것도 물리적 형상이 보이는 압도적인 기백이었다.
사키 히나는 직감했다. 망막에 맺히는 저자는 인간과 괴리된 존재다.
절궁가의 일원에다 시니어급 영웅인 자신을 손 하나 안 쓰고 무릎 꿇렸다. 살기를 흘리는 것만으로 손쉽게 자신의 목숨을 박탈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강검마의 입이 열렸다.
“한 번은 실수일 수 있다.”
“꺼으읅.”
“그런데 두 번째는 실수가 아니지. 그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을 그따위로 부른 만용.”
사키 히나의 동공이 점차 흐릿하게 이완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끝내 호흡이 멎는다.
‘수, 수, 숨이 아, 안 쉬어…….’
한시라도 빨리 이 살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그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을 때였다.
“히나.”
저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강검마와 사키 히나의 눈길이 절로 그 방향으로 모였다.
미려한 정복 차림의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지독한 살기에도 그는 자약한 기색이었다.
강검마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멀끔한 미중년의 사내는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글서글해 보이면서도 어스름을 일으키는 냉막한 눈빛. 넘실거리는 살기를 여유롭게 뚫고 다가온다.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강검마는 눈을 가늘게 떠 한참을 주시했다. 느껴지는 적의는 없다. 그리고 여기는 아카데미의 본관이니 적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을 테니.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기에 살기부터 거둬들였다. 그러자 복도를 가득 메웠던 검붉은 덩어리들이 흐트러지더니 곧바로 산화했다.
“흐어, 흐어…….”
사키 히나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망가진 호흡이 좀처럼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한데도 그녀는 어떻게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희열보다 예를 차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초… 총리님.”
사키 히나는 매무새를 급히 다듬고서 허리를 굽혔다. 어느새 지척까지 온 절궁은 눈을 얇게 좁혔다.
빠르게 상황을 가늠한 그는 곧바로 강검마 발치에 우뚝 섰다. 그리곤 대뜸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저희 측 사람이 민폐를 끼친 것 같군요. 사키 가문을 대표해 사의를 표합니다. 혹여 배상을 원하시면 제 비서께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나는 당황해서 사내를 바라봤다. 저 요부와 같은 측 사람이면 이맛살을 구기며 을러댈 줄 알았는데.
나를 공대하며 저자세로 나오니 조금 난감했다. 정확히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떨떠름한 내 눈빛을 읽었다는 듯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일본의 총리대신을 맡은 사키 코지마라고 합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강검마라고 합니다.”
사키 코지마, 절궁이 싱긋 웃었다. 그는 격식 없는 투로 말을 이었다.
“하늘 아래 생도님의 존함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자기소개는 저 같은 이류나 하는 것입니다. 정상에 있는 사람이 할 만한 게 아니죠.”
메디아는 절궁을 공공의 적처럼 말했었다. 한데 그는 지금껏 대면한 어른 중에서 제일 깍듯하게 나를 대한다. 자식뻘인 사람한테 꼬박꼬박 경어를 써 가며.
‘그런데.’
내게 껄떡대던 여자가 뒤편에서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살기를 흘렸을 때도 발버둥만 쳤지 이 정도로 질려 있진 않았다.
그렇다는 건……. 저 여자는 죽는 것보다 이 남자를 더 두려워한단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자기 사람이 헐떡대는데도 그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뱉지 않고 있다. 보통 정상이라면 ‘이건 좀 심하지 않았냐?’ 정도의 반응은 보일 법도 한데 말이다.
물론, 종용한다고 사과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걸 빌미로 추궁했다면 사시미를 뽑았을 테니까.
‘그건 그렇다 쳐도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이상하긴 하단 말이지…….’
스멀스멀 위화감이 차오르는 가운데 절궁이 내게 말했다.
“먼저 귀빈 대객실로 들어가시죠. 저는 딸아이 좀 비서에게 맡긴 다음 뒤따르겠습니다. 히나가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그리고 검마님께 무례를 저지른 점도 가면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군요, 하하.”
나는 힐끗 히나라 불린 여자를 봤다. 스물 안팎으로 보이는 딸이라면, 료조의 언니인 건가? 분위기가 정반대라 전혀 눈치를 못 챘다. 뭐, 다시 보니 조금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료조는 설정상 절궁가의 외동딸인 걸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모바일 게임의 설정집이 항상 들어맞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절궁가 자체가 베일에 싸인 가문이기도 했고, 엇나간 설정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엔 무리가 있었다.
“검제님과 학원장님이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아마 오래 자리를 비우면 무슨 일 있나 하고 나오실 테죠. 그럼, 설명이 길어지잖습니까. 먼저 들어가십시오.”
나는 잠깐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음이 찜찜하긴 해도 대놓고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의 깊게 지켜보는 수밖에.
나는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리던 사시미를 그만 놓아 주었다.
* * *
절궁은 방금까지 강검마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히나.”
그 상태로 절궁이 이름을 불렀다. 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덤덤함을 연기했다.
“독단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어떠한 벌충이라도 받겠습니다.”
절궁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영혼 없는 눈으로 굽어보더니 그녀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잘했다, 히나.”
“…네?”
“다만 아쉽구나. 좀 더 노력해서 ‘그’를 확실히 포섭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네 노고는 잊지 않으마.”
“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네겐 기대가 크다. 그러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방법을 마련하거라.”
할 말을 마친 절궁은 뒤 돌은 채 물러나라 손짓했다. 히나는 그 축객령을 달게 받으며 자리를 피했다.
…혼자만이 있는 복도에서 사키 코지마가 몇 보 더 걸었다. 그렇게 어느 액자 앞에 다다른 그는 초상화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구(舊) 칠성 영웅, 알리스 루이즈』
절궁이 액자에 천천히 손을 갖다 대었다. 그는 소복이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 닦았다.
“여보, 당신이 죽은 후로 어언 40년이야. 근데 그거 알아? 이제 차츰차츰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어. 칠성 전원이 함께 세상을 구했는데도 말이지. 결국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검제의 이름뿐이야. 아마 나나 창성, 현자는 수 세기 안에는 사라질 위인들이겠지. 왜냐하면…….”
사키 코지마가 혼잣말을 계속했다. 마치 화폭 속의 여인과 대화하듯이.
“이 세상은 일인자만 기억하거든. 만민의 뇌리에 각인되는 건 오직 정상에 군림하는 자. 그런데… 만약 그 정상을 손아귀에 쥘 수 있다면. 그자도 같이 영생을 구가하는 거야.”
그의 입가에 빙결처럼 차가운 냉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날이 머지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