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19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199화(198/300)
199화 승계식 (1)
희생.
군중은 저 짤막한 두 글자가 갖는 무게를 모른다. 그러면서 당연히 영웅에게 강요한다.
그들은 영웅이 저 자신을 불살라 숭고한 업적을 세우길 원하며, 인류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던질 수 있을 거라 여긴다.
뿐만 아니라 영웅의 위명이 높아질수록 ‘희생’이란 단어는 중압감이 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그렇다면 칠성 영웅이 감당해야 하는 희생의 총량은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희생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인가.
사키 코지마는 그 명제에 대해 오래도록 고찰했고.
의외로 어렸을 적의 그가 내놓은 대답은 ‘그렇다’였다. 물론 그 귀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다른 사람 덕분이었다.
‘누군가는 그 무게를 대신 짊어져야 하지 않겠어? 이왕이면 우리가 짊어지는 게 낫지. 뭐야, ‘그 어째서지?’라는 표정은. 당연하잖아! 우리가 힘이 세니까! 더 잘 버틸 수 있잖아.’
호아킨 아카데미의 생도 시절, 알리스 루이즈가 튼실한 팔 근육을 내보이며 했었던 말이다. 당시의 코지마에겐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었다.
말은 누구나 그럴듯하게 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이 뱉은 말을 얼마나 이행하는가이지.
그러나 알리스는 정말로 자신이 뱉었던 말을 견지했다.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이가 있다면 어떠한 험지라도 제 발로 찾아갔다.
영웅으로서 귀감이 되는 행보를 솔선해서 보인 그녀였다. 그리고 그 행동 방침은 코지마와 부부의 연을 맺고서도 이어졌다.
코지마는 아내가 집에 남아 있기를 원했지만, 알리스가 엄한 눈으로 거부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이혼인 줄 알아.’
…그래도 무탈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40년 전, 6군단장 바스몬이 게헤나 게이트 인근에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인류 측 최강 전력 일곱이 징발되었다. 훗날 칠성이 되는 영웅들이었다.
바스몬의 출몰지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마족은 마경과 밀접한 곳일수록 강해진다. 해서 토벌의 핵심은 바스몬을 게이트에서 멀찌감치 떨어뜨리는 것. 그러려면 누군가 미끼가 되어 놈을 유인해야 했다.
가장 강력한 상태의 6군단장과 대치하면서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전장으로 끌어들이는 막중한 소임. 사실상 자살 선언에 가까운 임무였다. 심지어 단신으로 완수해야 했다.
두 명, 혹 세 명이 간다면 행여나 놈이 낌새를 알아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지.’
그에 지크프리트가 선뜻 자원했다. 누군가는 해야만 했고 그렇다면 자신이 하는 게 맞다 판단했다.
다른 여섯은 그를 대체할 순 있을지언정 생환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었다. 당시에도 그는 인류 최강이라 불리던 사내였으니.
뒤늦게 리차 드 뮈라가 자신이 가겠다며 노발대발했지만, 지크프리트가 가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리차의 저돌적인 성미 탓에 계획이 어그러질 수 있었기에.
그렇게 지크프리트가 출정하는 것으로 협의가 끝나는 듯했다.
어슴푸레한 여명이 채 개이지 않은 새벽, 누군가 지크프리트의 초소를 방문했다.
‘내가 갈게, 선배.’
채비 중이던 지크프리트에게 알리스가 강고함을 눈에 담고서 말했다.
‘나 탱커잖아. 이런 건 내가 하는 게 맞아.’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축했다.
‘선배가 돼서 후배를 사지로 내몰 순 없어.’
‘탱커인 나를 놔두고서 선배가 미끼를 하는 이유, 그거 내가 셋째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서라는 거 다 알아.’
알리스는 허리에 손을 얹고서 볼멘소리로 반문했다.
‘배려는 고마운데, 막말로 선배가 잘못되면? 토벌 가능성은 거기서 끝이야.’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지크프리트가 단호한 눈으로 고개 저었다. 알리스는 굽히지 않는 뜻을 강론했다.
‘내가 여기로 차출된 건 이럴 때 나서기 위함이야. 선배가 나서려는 건 엄연히 내 권리 침해란 거지. 그러니까 내가 갈게.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이 이거뿐이란 거, 나도 선배도 알잖아.’
‘…….’
지크프리트는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알리스의 주장이 최선이라는 것을.
‘…코지마는 알고 있나?’
알리스는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이는 모르지. 알았으면 가만히 있겠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못 가게 하겠지.’
‘나는 그렇다 쳐도, 너 역시 코지마한테 원망받을 거야.’
‘알아. 그리고 사실 그이도 알고 있어. 이 역할의 적임자는 나라는 걸. 근데 차마 아무 말도 못 하더라.’
알리스는 문득 창백한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려앉은 어둠이 가시고 태양이 태어난다.
밤의 베일을 벗겨지면서 빛났던 달과 별은 하늘 사이로 잠긴다.
아침을 맞이함과 함께 하늘을 수놓았던 불빛은 제 소임을 다한 것처럼, 사라진다. 조금의 억울함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역할을 다했기에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알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 큰 희생을 줄이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야.’
이 독단적인 희생은 그녀의 주변인들, 특히나 가족에겐 이기적인 결정이리라.
한데도 그녀의 머릿속엔 이 이기적인 선택지만이 맴돌았다. 이유는 단 하나, 영웅이니까.
한참 동안 대지를 적시는 햇살을 조용히 눈에 담아 두면서 알리스가 중얼거렸다.
‘코지마, 그이도 영웅이잖아. 내 선택을 분명 이해해 줄 거야.’
* * *
“지금 자네 뭐라고 말했나?”
격분에 찬 목소리는 검제가 아닌 창성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오만상을 사정없이 구기더니 쿵쿵 발을 굴려 절궁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다시 한번 묻겠다, 활잡이. 자네 지금 니벨룽에게 뭐라고 씨부렁거린 거지.”
“리차 선배님께서도 나이가 드셔서 한번 말해선 안 들리시는 겁니까?”
절궁이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지크프리트 선배님이 ‘약해진 것 같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건방진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 아주 선배의 머리 꼭대기에 서려고 하는구나.”
“하, 선배님이야말로 언제부터 지크프리트 선배님과 사이좋으셨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서로 얼굴만 스쳐도 으르렁거리시잖습니까. 대신 화내 주고 그럴 사이는 아닌 걸로 압니다만.”
절궁의 비아냥에 창성은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절궁은 예상했다는 듯, 한 발을 시계 방향으로 물러서며 정권을 피하려 했다.
완력으로는 상대가 없지만, 움직임이 단순한 감이 있는 창성이었다. 풍압을 머금은 주먹이라 봤자 흘리면 그만이다.
덥썩.
절궁의 왼쪽 어깨가 붙잡혔다. 솥뚜껑만 한 손이 상박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어리광은 이쯤이면 그만해라, 활잡이.”
옴짝달싹 못 하는 절궁을 창성이 차갑게 내려다봤다. 그러고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리스를 생각해서 한 대로 봐주도록 하지. 이빨 꽉 깨물어라. 치아 전체를 임플란트로 갈아 끼우기 싫다면.”
찰성의 어깨가 흔들린 그때 녹색 신형이 두 사람 사이에 불쑥 솟아났다.
쿠웅!
우악스러운 파공음. 먼지가 피어오를 정도의 강렬한 충돌이 일어, 이내 샹들리에가 폭삭 주저앉았다.
절궁의 코앞에서 가로막힌 정권. 가느다란 손에 한 움큼 잡힌 손목이 허공에서 부르르 떨렸다.
“고릴라, 너야말로 그쯤 해. 검마도 있는데. 그리고 우리끼리 약속했던 거 잊었어? 면접 심사할 동안은 잠자코 있기로.”
메디아는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녀가 손목을 털자, 그제야 창성도 주먹을 내렸다.
“흥분했군. 미안하네, 메디아.”
“알면 자중하든가. 맨날 저지르고 사과하고. 피곤해 죽겠다, 아주. 그건 그렇고…….”
메디아는 절궁에게 시선을 돌렸다.
“후배님. 너, 다시 한번 그따위로 입 놀리면 그땐 내가 가만 안 놔둬. 오늘은 헤프닝으로 넘어가 줄 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
“그리고 경고하는데, 오늘부로 다시는 검마한테 접근하지 마.”
절궁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휙 돌아섰다. 뒤돈 채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셋을 노려본 후에 조용히 대객실을 빠져나갔다.
상황은 일단락됐다. 분위기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가운데 검제가 내게 다가왔다.
조금 전 수모를 당했기에 얼굴이 굳은 한편 민망한 기색으로 나를 마주했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어른들이 못 볼 꼴을 보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검제가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냈다.
“추태를 보였군. 미안하게 됐네.”
역시. 어김없이 예상대로의 반응이군.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검제님이야 말로 화가 많이 나셨겠습니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으셨으니까요.”
“하하, 괜찮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말 좀 들었다고 부아가 치밀고 그러진 않아.”
그제야 굳었던 얼굴이 좀 풀리고, 검제는 절궁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그가 문득 내게 물어왔다.
“자네가 보기엔 코지마가 나를 몹시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겠군. 안 그런가?”
“솔직히 말해서… 검제님을 원수 보듯이 보는 것 같던데요.”
“그래,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검제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코지마에게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선 그리 크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좋아하진 않을 테지만. 녀석이 가장 분노하는 대상은 내가 아닐세.”
“…….”
“그가 가장 분노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야. 이를테면 자기혐오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이의 선택을 아직도 이해 못 하고 있거든. 코지마는 모든 상황을 감정이 아닌 직관으로 보려 하기 때문이지.”
자기혐오? 소중한 이의 선택? 이야기의 얼개를 모르는 나로선 다소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뒤늦게 검제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민망하다는 듯이 뒷목을 긁었다.
“이거 참, 나이를 먹더니 감상에 자주 젖는군.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게, 승계식이 사흘 후 아닌가. 아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 눈 좀 붙여 두게나.”
* * *
밤이 깊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난 옆으로 누워 벽을 바라봤다.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거려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몇 시간 전에 그 사달도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승계식’이 머릿속을 한가득 채웠다.
나는 몸을 틀어 벽면에 이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노르스름하게 눌어붙은 생활의 흔적. 이 세계에 온 지 어느새 2년이 훌쩍 지났다.
하나씩 그간의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불과 2년쯤 전까지만 해도 회를 썰던 내가, 삼 일 후면 칠성 영웅으로 등극한다.
입학 초창기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그때는 별다른 목적 없이 살아남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앞으론 인류의 존명을 짊어지고 행동해야 한다. 나 개인만을 담는 그릇은 깨졌다.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의무였다.
“…….”
그때였다.
부우웅.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몸을 낮게 떨었다. 나는 사뿐히 침대에서 벗어나 그것을 확인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마님. 제 이름은 빅스빅. 상황이 급한 만큼 본론만 이야기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다시금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료조가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