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0)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0화(20/300)
20화 중간고사 (1)
작금에 부쩍 내 운에 대해 회의적이게 된다.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인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는 관용구가 떠올랐다.
전생의 기억을 생생히 기억하는 소시민으로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 그렇게까지 죄짓고 산 적 없다고. 진짜로.
백번 양보해서 메인 히로인들과는 어쩌다 엮일 수 있다고 치자. 그녀들을 만난 건 우연을 넘은 기연이라 치부하면 어찌어찌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씨발.’
기어코 발생하고야 말았다. 주인공, 레온 반 라인하르트라면 이야기가 너무 다르다. 결국 내가 선택한 일에서 파생된 것이니 책임도 내게 있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조장이 레온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항의해 무르려 했지만, 이미 승인이 떨어졌단다. 교직원실로 찾아가 알아보니 레이첼 그 여우 같은 년이 내가 조가 없는 걸 알고 이미 자기네 조원으로 신청해 놓은 상태였단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마음 같아선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리 열심히 뛰어다닐 거면 지가 조장 하든지. 왜 책임은 애먼 레온한테 떠넘길까.
SNS로 우연히 봤던 ‘K-조별 과제 실황.’이라는 피드가 뇌리에 스쳤다. 그 당시에는 대학을 안 다녔기에, 공감을 못 했는데 지금은 그 느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좆같았다.
힘이 빠져 의자에 등을 파묻듯 기대자 클로이가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다가왔다.
“검마 군,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아까 그 썅ㄴ… 아니, 그 금발 분이 가고 나서부터 표정이 안 좋아요.”
“그냥 성 클래스 애들이랑 같은 조를 하려니까 긴장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서.”
“성 클래스에도 검마 군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고마워.”
양손을 주먹 쥐고 응원해 주는 클로이. 마음은 가상했으나 내 침울한 마음이 쉬이 달래지진 않는다.
지금이라도 교관님께 말하고 조에서 나올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내 권유로 클로이도 같이 들어온 마당에 나 혼자 슥 나오는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래, 딱 한 번이다.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자.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속한 조는 소위 천상계라 불리는 생도로만 이루어져 있다.
내가 꼬드겨 선뜻 참가하게 된 질서의 가문 아디토레의 클로이, 용 클래스에 있다는 레이첼의 지인, 아카데미 4석이자 창성가의 후계자인 레이첼, 그리고 작중 최강 먼치킨이자 주인공인 레온.
듣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라인업이지 않은가. 다른 생도들은 로비까지 뛰며 조를 구성한다는데 나는 얼결에 가히 아카데미 최강 파티에 합류했다.
‘오히려 좋아.’
나는 존재감 없이 뒷마무리 하는 포지션 정도면 충분하겠지. 30초짜리 스프린터 능력인 내 가호는 그다지 쓸모는 없을 테니까.
후회해 봤자 부질없다. 이리저리 물 위에 떠다니는 부평초 같은 아카데미 생활이지만, 그때마다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해 가며 여기까지 왔다.
물론 레이첼 그년이 맘대로로 조원으로 욱여넣은 건 응징할 생각이다. 회를 뜨겠다는 뜻은 아니고……. 아무리 막 나가도 그런 일로 사시미부터 들이밀진 않는다.
‘대충 정해졌네.’
마음이 정해지자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본 클로이의 얼굴에도 덩달아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클로이, 우리 조 미팅 오후 몇 시였지?”
“어, 아까 그 금발 말로는 여섯 시에 본관 카페에서 보자고 했어요!”
클로이한테 이제 레이첼은 그냥 금발로 통하는 모양이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얼추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
단순한 조별 과제 미팅인데 불구하고 긴장이 됐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레온 때문. 그가 온 첫날은 생도들 사이에 껴서 멀찍이서 본 게 끝이었는데. 막상 내가 플레이했던 캐릭터와 조우한다니 참 설명하기 힘든 고양감이 들었다.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문득 클로이에게 입을 뗐다.
“너는 본관 카페 가 본 적 있어?”
“네! 거기 아보카도 스무디가 맛있어서 자주 가요!”
“그건 얼마야?”
“5만 원 정도 해요!”
말문이 막혔다.
* * *
아카데미 본관 1층 로비에 있는 스타복스 카페 안.
클로이와 나는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카페 안은 풋풋한 십 대 남녀들로 만석. 다행히 조장인 레온이 미팅룸을 예약해 뒀기에, 우리 조는 프라이빗한 룸에서 회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근데.
카운터 앞에 서서 메뉴판을 보고 있자니 절로 이마를 싸매게 된다.
뭐지? 뭔 놈의 아메리카노가 2만 5천 원이지? 심지어 교직원 할인가도 2만 원 돈 수준이었다. 아카데미 부속이 아닌 외주 업체여서 할인율이 낮단다.
아무리 커피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른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수준이다. 이 정도면 내가 일했던 식당에선 오마카세 A 세트 가격인데.
새삼 귀족과 서민의 금전 감각이 다름을 느꼈다.
‘존나 어지럽네.’
내가 침음을 흘리며 메뉴판을 응시하자 클로이가 빤히 내 쪽을 바라본다.
“검마 군은 뭐 마실지 골랐어요?”
“응, 에스프레소.”
“저는 그거 너무 써서 못 먹겠던데.”
“아직 잘 모르는구나. 에스프레소야말로 진정한 어른의 맛이거든.”
“헤, 멋있어…….”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클로이. 에스프레소만 그나마 가격대가 1만 원대라 골랐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나와 달리 클로이는 익숙하게 예의 아보카도 스무디를 주문했다. 가격이 무려 4만 8천 원.
‘미친.’
잠시 후, 음료를 받아 들고서 반투명한 유리로 된 미팅 룸에 들어갔다. 길게 뻗은 직사각형 탁자에 엔틱한 느낌이 물씬 나는 내부. 우리는 엉거주춤 최대한 구석 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아무도 안 왔네.”
“그러게요. 10분 전이라 그럴까요?”
“뭐, 그럴 수도.”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문이 열렸다.
“어, 검마랑 꼬맹이. 미리 와 있었네?”
레이첼이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반갑게 손 인사했다. 그녀를 뒤이어 들어오는 남학생 둘. 한 명은 레이첼이 말했던 자신의 지인 그리고 레온 반 라인하르트.
레이첼의 지인은 투톤헤어를 한 껄렁한 인상의 미남. 까딱 목 인사를 하고서 비어 있는 자리 중 한 곳에 다가가 털썩 기대 앉았다.
‘양아치?’
곧이어 내 시선이 자석에 끌리듯 레온에게 향했다. 가까이서 본 레온 반 라인하르트의 상판은 정말.
히로인들이 어째서 그와 눈만 마주쳐도 플래그가 꽂히는지 자연스레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태양처럼 일렁이는 금발에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눈. 게다가 저 외모에 성격까지 상냥하니 여자들이 안 자지러지고 넘어갈 수가 있나.
잠시 감탄성을 흘리는 와중, 레온이 방긋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
이지적인 목소리에 완벽하게 깃든 격조. 나는 레온이 건넨 손을 맞잡았다.
“강검마다.”
그러자 방긋, 기분 좋게 웃어 보인 후 자리에 앉는다.
“며칠 전에 치른 아공간 대련은 인상 깊었어. 검마 네가 같은 조원이라 든든하다.”
교과서적인 주인공 말투. 하지만 레온이 말하니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자기 소개부터 할까?”
“찬성!”
열심히 빨대를 우물거리던 레이첼이 손을 번쩍 들어 긍정했다. 옆에 앉은 그녀의 지인도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장인 나부터 소개할게. 나는 성 클래스에 소속된 레온 반 라인하르트야. 어쩌다 조장을 맡게 됐네. 부족하지만, 이번 시험 기간 동안 잘 부탁해.”
“나는 다들 알 테니까 내 소개는 패스!”
레이첼이 킥킥 웃으며 소개를 넘기고 양아치에게 시선을 향했다.
“용 클래스 소속 스피드 웨폰이다.”
스피드 웨폰이라… 설명을 기똥차게 할 것 같은 이름치고는 과묵한 캐릭터였다. 앞서 레온이 설명했던 것처럼 클로이가 자신을 소개했다.
낯을 가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씩씩하게 소개하는 클로이의 모습에 레온을 제외한 모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모두가 시선을 홱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입을 뗐다.
“클로이와 같은 랑 클래스 소속 강검마다.”
소개를 끝내자 레온이 나를 향해 눈웃음을 한번 짓고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마우스로 몇 번 클릭하자 노트북 상단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홀로그램 영상을 투사한다. 지구가 아니란 걸 새삼 다시 느끼는 순간이다.
홀로그램 영상은 우리가 시험을 치를 섬의 지도였다.
오른쪽 하단에는 섬의 면적을 나타내는 수치가 적혀 있었다. 163.6km²이라는 엄청난 면적의 섬이었다.
현존 최고의 아카데미라 그런지 일개 1학년 중간고사의 스케일마저 남달랐다.
레온은 조원들에게 모두 잘 보이는지 물어보고선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점심시간에 우리 반 주임 교관님이 조장들에게 파일을 배포해 주셨어. 우리가 이번에 시험을 치를 스코풀리(Scopuli) 섬의 지도야.”
레온은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서 설명을 이었다.
“먼저 시험 당일에 우리는 아공간 게이트로 이 섬으로 이동하게 될 거야. 다만, 게이트만 아공간일 뿐 저 섬 자체는 실제 공간이라 마수한테 외상을 입을 수 있으니까, 그 점 유념해 두고.”
그렇게 말하면서 레온은 키보드를 두드려 홀로그램을 한층 확대시켰다.
“우리한테 할당된 구역은 동북쪽 바닷가인 저곳이야. 우리 조를 포함해 세 개의 조가 저 구역에서 ‘머맨’을 사냥하게 돼. 한정된 마수 개체 수를 어느 조가 더 많이 토벌하는지가 이번 시험의 관건인 거지.”
안정적인 톤과 듣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재주. 과연 주인공의 재목이다. 나는 옆에서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자, 질문 있는 사람?”
레온이 고개를 돌려 의중을 묻자, 말없이 듣던 스피드 웨폰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스코풀리 섬이라면 ‘머메이드’도 출몰하는 지역인데, 그에 따른 위험성은?”
“그 점은 교관님들이 사전 답사를 끝마치셨기 때문에 안심해도 돼.”
“그렇군.”
“다음 질문?”
의외로 클로이가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같은 구역에 배정된 조 간의 기습이나 전투는 없나요?”
누가 암살자 집안 아니랄까 봐 역시 생각하는 방식이 참 특이하다. 클로이의 질문에 레이첼과 스피드 웨폰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레온은 주인공다운 웃음을 싱긋 짓고서 답했다.
“이번 시험의 취지는 엄연히 마수 토벌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생도 간의 전투는 실격 처리될 가능성이 있어. 대답이 됐을까?”
이해했다는 의미로 클로이는 고개를 두어 번 작게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시험까지 일주일, 합심해서 꼭 좋은 성적을 거머쥐자.”
레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트북을 정리하는 레온을 뒤로하고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미팅룸을 나섰다. 나는 자리가 맨 구석이었기에 앞 사람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내가 문 앞에 선 순간, 뒷정리를 끝마친 레온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어, 왜?”
“검마, 너는 어디에서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