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03)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03화(202/300)
203화 승계식 (5)
나는 사욕 이상으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조용히, 유유자적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었다.
하나 불가지 한 힘은 내게 소박한 삶을 쉽사리 허용해 주지 않으려는 것 같다.
야심과 사욕을 배제하며 살아온 내게 무겁기 이를 데 없는 왕관을 씌우려는 걸 보면 말이다.
거울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너른 탈의실.
“어머, 우리 검마! 키가 훤칠해서 그런가 뭘 입혀도 맵시가 유독 산다!”
메디아가 다양한 각도로 이리저리 나를 관찰한다. 그러더니 그녀는 왁스를 짠 손을 비벼 내 머리에 펴 발랐다.
달뜬 미소가 메디아의 입가에 절로 배어 나왔다.
“머리도 이렇게 간드러지게 세팅하니까 완전 아이돌… 지망하려다가 만 느낌이야!”
현자 메디아는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다. 그런 설정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아이돌 지망하려다가 만 느낌은 어떤 느낌이지?’
칭찬인 듯 칭찬 아닌 모호한 비유다.
메디아는 거리를 벌렸다가 좁히며 흐트러진 맵시는 없는지를 확인했다. 있다면 발치로 다가와서 툭툭 다듬어 준 다음 다시 확인.
그 과정을 두 시간을 반복했다. 나는 두 시간 동안 그녀의 마네킹이었다.
“바지 기장은 어때? 제대로 맞아? 남자는 기장이 짧으면 사타구니가 꽉 끼어서 걸을 때 힘들잖아.”
메디아가 물었다. 한쪽 무릎은 꿇은 채 내 바짓단을 접어 주면서. 거울에 비친 구도가 몹시도 위험했다.
“괘, 괜찮습니다.”
“검마 네가 괜찮다면 그런 거겠지만. 혹시나 민망해서 말 안 하는 거면 안 돼! 이따가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민망하면 망신살이잖아.”
“진짜 괜찮습니다.”
메디아는 진심으로 염려하는 눈치였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괜찮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애초에 내가 옷 입는데 왜 메디아가 거들고 있는 거지?’
이모가 조카 옷 사 주러 백화점 데려온 듯한 모양새다. 문제는 그 이모가 너무나 젊어 보인다는 거다. 나이는 일흔에 가까운데.
늘 겉모습에 속지 않으려 해도 메디아의 미모는 남성에게 치명적이었다.
‘젠장. 저 얼굴에 칠순은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고.’
속으로 침음을 흘리고 있는 가운데 탈의실의 문이 열렸다.
“뭔 옷 하나 입히는 데 두 시간을 쓰나?”
들어선 이는 검제였다. 그는 메디아나 나와 같은 정복 차림이었는데, 추가로 흰색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승계식 시작까지 벌써 두 시간밖에 안 남았네, 메디아. 그 전에 해야 할 일정도 있고 말일세.”
“그러니까 더 가꾸는 데 시간을 써야지. 두 시간 후에 우리 검마를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처럼 보이게 해야 하니까!”
메디아는 가는 허리를 양손으로 잡으며 주장했다. 검제가 이마를 감쌌다.
“지금 밖에 세계 각지의 국빈들이 대기 중이네. 승계식 전에 강검마는 그들 앞에 한 번은 얼굴을 비춰야 하는 의무가 있고.”
“이왕 기다리는 거 한 시간만 더 기다리라고 해.”
“삼십 분 안에 끝내게. 그 이상은 안 돼.”
검제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상태를 점검하듯 쭉 한번 훑는 모습. 다음 순간 자글자글한 주름에 맺혀 있던 피로가 맑게 갰다. 검제가 말했다.
“기분은 좀 어떤가?”
“솔직히 실감이 안 갑니다. 아직도 그냥 꿈 같네요.”
“나도 그 기분을 잘 아네, 40년 전에 말이야. 이 옷도 그때 하사받은 것이네.”
검제가 몸 방향을 슬쩍 돌려 보였다. 백의에 劍帝(검제)라는 두 글씨가 금실로 큼지막이 새겨져 있었다.
“고결함을 상징하는 흰색에 찬란함을 의미하는 금으로 영웅의 이명을 새긴 거라네. 자네 것은 곧 뮈라 그놈이 가져오기로 했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내게 부여될 이명을 모르는 채였다. 성 과장이 직접 작명했다던데.
문자로 물어보자 1급 기밀이란 답신이 돌아왔다. 성 과장은 다만 기대할 만하다는 식의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그땐 며칠 밤을 새운 터라 신경을 껐지만, 막상 당일이 오니 궁금해졌다.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검제 말로는 ‘검’이란 글자는 무조건 붙는다고.
하나 그렇게 따지면 선택지가 몹시 한정적이다. 검은 가장 보편적인 예 병기이다. 그만큼 많은 영웅이 검이나 칼을 무장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검’자가 들어간 영웅 이명이 유독 많았다. 이미 포화 상태였다.
그 좁은 선택의 폭 안에서 성 과장은 무슨 이명을 지었을까. 이명은 두 글자인 걸로 명문화됐으니 ‘사시미 검성’은 아닐 테고. 설마 내 본명인 ‘검마’는 더더욱 아니겠지.
혹여 그렇다면 칠성 첫 일정으로 성 과장 병문안부터 할 생각이다. 그렇잖아. 먹는 약이 잘못되지 않고서야 그런 발상을 떠올릴 리 없다.
새로운 칠성 영웅의 이명이, 검의 마귀? 사람들이 참 신뢰를 느낄 만하다. 든든하긴 하네, 내 이명만 아니라면.
“…….”
문득 속이 텁텁했다. 맞춤복이라 피부에 착 달라붙은 탓인가. 숨을 가다듬고는 메디아와 검제의 실랑이를 관망했다.
그렇게 치열한 입씨름 끝에 검제가 승리했다. 메디아의 개인적인 욕심은 검제의 타당한 논리를 뒤집지 못했다.
“크흠!”
승자의 미소가 걸리려던 찰나, 검제는 입가로 주먹을 가져다 대고서 헛기침했다. 메디아가 자신을 째려보며 엄지손톱을 자근자근 씹고 있었기에. 후환이 두려운 검제였다.
“자, 그럼 슬슬 나가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백의는 승계식 바로 직전까진 도착할 테니, 일단 정복 차림으로만 나가지.”
검제가 앞장서서 걸었다. 나와 메디아는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그는 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검제는 천천히 뒤돌더니 나를 마주 바라봤다. 나보다 높았던 눈높이는 어느새 낮아져 있었다.
“옷에 먼지가 좀 묻었군.”
검제가 내 어깨를 툭툭 털어 주며 말했다. 다만 방금까지 메디아가 매무시를 다듬어 줬기에 먼지 한 올 없었다.
“처음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군그래.”
“그러게 말입니다.”
“노파심에 하나 일러두지. 지금 이 문 너머에 있는 자들은 뱃속에 칼 하나씩은 품고 있는 인간들이야. 겉으로는 자네의 편인 척, 뒤로는 자네를 물어뜯을 치들이란 말이지.”
“그렇군요.”
“자네에게 칠성을 물려준 후로는 내 전만큼 자네를 도와줄 수가 없네. 요컨대 뒷방 늙은이 신세라는 거지. 앞으로는 젊은 자네가 혼자 헤쳐 나가야 해. 물론 메디아도 옆에 있겠지만, 결국 자신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없는 먼지를 털던 그의 손이 이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빛이 나를 응시한다.
나는 이마를 한번 긁었다.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검제의 미소는 짙어졌다.
“그래, 남자는 역시 백 마디 말보다 과묵한 게 나아. 허허, 걱정은 나만 한 것 같군. 자네는 이토록 의연한데 말이야.”
검제는 내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서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밀었다. 문 틈새가 점차 벌어진다.
끼이익-
가늘게 보이던 너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척 보기에도 귀족이나 높은 사람들이었다.
세계 각지의 고위 인사들이 총집합한 현장. 그들은 한창 저마다의 수다를 떨고 있어 문이 열린 지도 모르고 있었다.
스위스 대통령 게인즈만이 계속 문 쪽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우리의 등장을 알아챈 건 그 한 사람뿐이었다.
게인즈가 내게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흔들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올렸던 손을 심장과 가까운 가슴팍에 얹었다. 그러고서 내 이름을 불렀다.
“검마님.”
장내를 맴돌던 북적한 소란이 가셨다. 뒤늦게 수십의 시선이 하나로 뭉쳐지더니 이쪽을 향해 넘어왔다.
정치 괴물들이 한데 모인 자리. 그들이 눈자위는 비릿하게 번들거렸다.
게인즈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저 게인즈, 새로운 칠성께 문안 인사를 올립니다.”
게인즈는 머리를 깊게 숙였다. 그의 돌발 행동에 사람들은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
그들은 눈알만 뒤룩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서로 서로에게 조용히 고개를 까딱였다. 그 빳빳한 목대를 굽히지 않겠다고 의견을 통일하는 것처럼.
그때 회장의 모퉁이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철왕 가의 마오 랑, 강검마님의 칠성 등극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마오 랑은 단숨에 이목을 사로잡았다. 당혹과 경악이 뒤섞인 눈길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었다 내리며 귀족적인 예를 다했다.
그 곁에 있던 올 뮤트 칸 엘리자베스가 경례를 올렸다. 눈썹께에 딱 붙인 손날은 각이 살아 있었다.
“미합중국을 대표해, 이 칸 엘리자베스가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웅성웅성. 어수선해진 분위기. 정치인들의 이마 선에 삐질삐질 식은땀이 맺혀 갔다. 눈알들이 방향 잃은 구슬처럼 굴러다녔다. 암묵적으로 맺었던 룰에 유격이 생긴 상황.
한 청년이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눈까지 질끈 감으며 끝내 입을 열었다.
“올란드 가의 장남, 베하른입니다. 새로운 칠성께 무구한 영광이 있기를.”
“……!”
한 청년 귀족이 포기한 자존심은 장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질세라 누군가 탕탕 제 가슴을 치며 자신을 어필했다.
“러시아의 총리, 도요예프 쿠린입니다. 저희 러시아는 검마 님께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합니다.”
“저, 저, 저는 이탈리아 부오나 가문의 차녀입니다! 저희 역시…….”
그렇게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소개 시간이 찾아왔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밉보일 바엔 자존심을 허무는 걸 택한 그들이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내게 검제가 낮게 속삭였다.
“지금은 기분이 어떤가.”
“…….”
감상에 앞서 자리한 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진솔함을 담아 대답했다.
“나쁘지 않네요.”
* * *
…자기소개로 두 시간을 꽉 채워 갈 무렵.
쿵쿵 투레질과도 같은 발 구름 소리가 들리며 대리석 바닥이 들썩였다. 그 작은 진동에 검제는 눈살부터 구겼다.
“시간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군. 정확히 승계식 5분 전에 오고 말이야.”
창성이 어깨로 인파를 밀치며 다가왔다. 그와 충돌한 이는 철퍼덕 나동그라졌고, 스친 이는 멀리 밀려났다.
그럼에도 외마디 항의조차 없었다. 저 야수 같은 사내한테 입을 놀렸다간 강냉이를 반납해야 할 테니까.
창성이 산적처럼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크하하하! 늦지 않았으면 된 거 아닌가? 그리 빡빡하게 굴지 말게나, 니벨룽.”
“가장 중요한 건 챙겨 왔겠지?”
“물론이지.”
창성은 내 앞에 섰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흰색 보따리를 내밀었다.
“자네의 백의일세. 부하 자랑 같겠지만 성 과장이 머리 좀 굴린 모양이야. 문구를 보면 눈이 번쩍 뜨일 걸세.”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백의를 건네받았다. 꺼끌꺼끌한 천의 질감이 손바닥에 스몄다.
마른침을 삼킨 뒤에 백의를 펼쳐 보았다. 과연 뭐라 적혀 있을지 걱정하며.
“어…….”
나는 아방한 눈으로 커다란 두 한자를 보았다. 옆에 있던 메디아가 거들었다.
“와! 괜찮은데!? 그치, 우리 검마한텐 이 정도 이명은 지어 줘야지. 어떻게 생각해, 검. 제. 양. 반?”
“괜찮군.”
“불만 많은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말아 줄래? 솔직히 말해 봐. 이명이 너무 멋져서 샘이 나서 그렇지?”
“내가 그리 속 좁아 보이나.”
“응.”
“…….”
검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절궁도 회장에 입장했다.
“시간이 됐군. 다들 감세.”
검제가 턱짓하자 사람들이 지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그들은 전원 귀족 혹은 고위 인사였다.
쿵쿵. 밖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가 이곳까지 전해졌다. 언뜻 심장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검제는 한 발짝 뒤로 빠져 내게 백의를 덮어 주었다. 견장의 무게가 어깨를 가볍게 압박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내 뒤가 아닌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검제가 내게 말했다.
“앞장서게.”
그의 은은한 목소리가 짧은 정적 속에서 다시 한번 울렸다.
“뒤따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