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0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06화(205/300)
206화 흔적 (2)
열일곱 살 즈음이었나. 물론 현재 말고 전생의 이야기다.
아무튼.
나는 길을 잃었었다. 다만 내 방황은 학교를 안 다니는 정도의 싱거운 수준이었다. 성미 상 악한 짓은 못 하는 터라, ‘방황’의 대체 용어가 없을 뿐.
방황하기엔 뒤늦은 시기인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질풍노도가 극성인 나이에 오히려 그 휘몰아치는 폭풍을 잠재웠다.
당시, 난 십 대의 감성을 죽이고 어른 흉내를 내면서 살았다. 철 들은 척, 무관심한 척. ‘척’으로 점철된 소년기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그랬던 까닭은 집안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의 환경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낙관적으로 봐 줘도 쓰레기였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세세한 사정 설명은 넘어간다. 기억하기도 끔찍한 과거사를 들추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구질구질한 가정사를 듣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잖은가. 그래도 굳이 부연하자면…….
혹자가 상상하는 밑바닥 시궁창 인생. 그 지저를 뚫었다고 보면 된다. 단순히 가난했다면 이해했을 테지만, 오죽했으니 하는 소리다. 계급 사회와 마귀 놈들이 판쳐도 거기보단 낫다.
문명 사회의 음영은 마경보다도 그 어둠이 짙다.
어쨌건 그 말도 못 하는 가족 때문에 나는 중학교 졸업식, 그날로 집을 뛰쳐나왔다. 더는 그 집구석에 붙어 있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가출이었다. 정확히는 일반적인 가출이 아닌 출가였다.
그렇게 길거리를 떠돌았다. 막상 집을 나오긴 했는데, 갈 만한 곳이 마땅찮은 탓이었다. 보호 시설을 찾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의탁할 친인척은 전혀 없었다.
돈도 없었다, 돈이 벌릴 구멍도. 한국은 청소년의 경제활동을 엄격히 금하기 때문이었다.
모두한테 내쳐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그마한 투정도, 그렇다고 치기 어린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세상은 내게 조금도 다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정신은 자꾸만 허해져 갔고, 삶의 의미조차 잃어 갔다. 그리고 스승님과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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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놈이, 거기서 비 다 맞고 뭐 하고 있냐?’
뒷골목에서 쭈그려 앉은 채 담배꽁초나 쭈물거리던 내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왼쪽 옷소매는 비바람에 힘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남자는 오른손에 쥔 우산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 대던 장대비가 그제야 폭력을 멈췄다.
나는 남자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음성으로 씹어 뱉듯 말했다.
‘뭐야, 꼰대. 같잖은 신파극 찍을 거면 딴 데로 가. 괜히 혼자 잘 있는 사람 건들지 말고.’
부러 낸 날카로운 태도는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상대가 악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의 난 경계부터 했었다.
‘요놈 보게. 완전히 물에 빠진 생선 꼴을 하고서는 눈 부라리는 거. 뭐, 그래도 눈빛 하나는 독이 바짝 올라 있구나.’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희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리고 말이야. 그런 기세 좋은 말 할 거면 배에서 소리나 좀 안 나게 하든지. 얼마나 크면 가게 안에서도 들리냐? 그렇게 우렁찬 꼬르륵 소리는 또 처음 들어 본다.’
‘…가… 게?’
남자는 턱을 까닥여 내가 기대고 있던 벽돌 벽을 가리켰다.
‘네가 옆에 둥지 튼 그 자리. 거기 내 가게야.’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 밤바다’. 상당히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영 손님이 없더라니.’
가게 이름을 보니 나 때문에 장사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거기 계속 죽치고 앉아 있으면 장사 안 되니까, 다른 곳으로 가든가 해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휙 돌아섰다.
투두둑.
매몰찬 빗방울은 다시 내게 폭력을 행사했다. 장대비가 동그란 고랑을 만들고, 물보라를 튀겼다.
찰방.
남자는 몇 발짝 옮기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깨너머로 내게 말을 던졌다.
‘그리고 인마, 눈알에 힘 좀 풀어라. 눈만 보면 20년 동안 칼 쓴 사람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네가 더 잘 찌르게 생겼네.’
‘…꼰대, 칼잡이야?’
‘칼잡이는 칼잡이지.’
나는 남자의 차림새를 유심히 보았다. 말끔하게 다려진 새하얀 상하의. 군청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모습은 누가 봐도 일식 요리사였다.
남자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아무튼 장사 방해할 거면 빨리 가라. 아니면 가게에서 비나 좀 피하고 가든지. 내일 비에 퉁퉁 부은 시체를 치우고 싶진 않으니까.’
‘…….’
‘그리고 어차피 오늘 장사 글러 먹었겠다. 거지 한 명 들여도 달라지진 않겠지.’
나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일어났다. 내 걸음은 어느새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남자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새겼다. 그러곤 가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날, 그는 어쩌면 내게 더 많은 것을 열어 주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신랄하게 부려 먹을 새로운 일꾼을 얻은 거일 수도.
아닌 게 아니라, 그 양반은 내게 시도 때도 없이 폭언을 퍼부었다.
‘너 때문에 도미가 완전 걸레짝이 됐잖아! 너 이게 얼마짜리 생선인지 알아? 너한테 죽은 생선한테 사과해라. 제 부족한 실력 때문에 두 번 죽여서 미안하다고’
‘내가 칼 그렇게 말아 쥐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어?! 봐 봐. 검지를 딱 세워서 사시미 날 위에 얹으라고! 그래야 살이 균등하게 잘린다고, 새꺄!’
‘손도 두 개인 자식이 어째 하나인 나보다 엉성하게 칼을 쓰냐? 그따위로 쓸 거면 나한테 기부해!’
‘너 요새 손님들이 칭찬 좀 한다고 우쭐해 있는 모양인데. 그럴 때일수록 겸손해야 해. 벼는 익을수록 숙인다는 말 몰라? 사시미의 세계는 끝이 없다는 걸 명심해라.’
끊임없는 잔소리를 못 참고 바락바락 대들었던 적이 있었다.
‘귀에서 피 나오겠네! 그리고 맨날 부를 때마다 새끼, 인마, 얀마. 이름으로 두고 왜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거냐고!’
‘너야말로 나랑 지낸 지 두 달이나 됐는데 아직도 꼰대라고 부르는데, 너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건 뭔 싸가지냐?’
‘그러면 꼰대 말고 뭐라고 부르는데? 이름으로 불러 줄까?’
‘스승님이란 좋은 표현이 있지 않으냐.’
‘…스승은 염병.’
‘허허, 이 새끼, 이거. 이만 셔터 내려라. 오늘은 생선 배가 아니라 네 배를 따 주마.’
‘경찰 아저씨! 여기 전직 조폭이 사람 잡아요……!’
요란스러운 하루하루의 반복. 그렇게 그와 함께한 지 어언 일 년 가까이 됐던 초겨울이었다.
사장님이 뜬금없이 물어 왔다.
‘너는 억울하지도 않냐?’
사장님은 내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였다. 그는 길거리를 거니는 학생들을 보고 있었다.
‘억울? 뭐가요? 사장님이 나를 박봉으로 우려먹는 거?’
‘말만 존댓말을 쓰면 뭐 하나. 여전히 싸가지는 밥 말아 먹었는데. 그런 거 말고. 너도 쟤네처럼 교복 입고 학교 다니고, 그런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지 않냐? 그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빗자루로 가게 앞을 마저 쓸며 대답했다.
‘억울할 건 또 뭡니까. 나랑 쟤네는 그냥 사는 세계가 다른 건데.’
내 말에 사장님은 살짝 슬픈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그는 엄하게 말했다.
‘너도 하등 다를 거 없이 평범한 십 대다, 동등한 권리를 지닌.’
‘대낮부터 약주라고 하셨수?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고 그래요.’
‘너 나중에 꼭 학교에 가거라. 대학이든, 대학원이든, 아카데미든.’
‘갑자기요? 아니, 그리고 저 학력이 중졸이라서 대학 입학도 안 되고, 어차피 공부에도 관심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유대를 쌓는 법. 그건 동갑내기 친구들과 섞여야지만 배울 수 있는 거야. 너처럼 사회성 없는 놈은 더더욱.’
‘…….’
‘만약 정말로 네가 학교에 가길 원한다면… 내가 무리해서라도 꼭 보내 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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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서야 알 것만도 같다.
“오거라, 발로르 호아킨.”
사장님이 무슨 뜻으로 그리 말씀하셨는지.
“나 라이칸을 죽인 다음 인류의 존속을 도모해 보거라. 하면 그대는 모든 영웅의 시조가 되리라.”
* * *
사방이 탁 트인 마경 게헤나를 두 존재가 걷는다. 각기 꼬나쥔 검을 서로에게 겨눈 채.
우우웅…….
대기가 떨리자 짐승울음 같은 소리가 났다. 초월적인 두 존재감에 사위가 전율했다 마치 빛과 어둠의 충돌을 알리는 전조처럼.
콰르르릉!
벼락이 내리친 순간, 라이칸이 움직였다. 산산이 부서지며 터지는 지면. 폭발적인 도약으로 한순간에 발로르 호아킨과 거리를 좁혔다.
바싹 달라붙은 라이칸이 번개로 빚은 뇌검(雷劍)을 휘둘렀다. 샛노란 궤적이 인간의 목울대를 노렸다. 필멸자라면 통상 반응조차 못 할 경이로운 속도. 비유 따위가 아니라 라이칸의 모든 움직임은 벼락 그 자체였다.
하지만 발로르의 눈동자는 정확히 그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그의 감각은 예지에 가까웠다.
시간이 의미를 잊은 그 찰나의 순간, 발로르가 영검(英劍) 그람을 추켜올렸다.
흑과 백, 백과 흑. 상반된 두 성질이 한 점에서 충돌했다.
삐이이- 폭음 대신 백색 소음이 터져 나왔다. 가공할만한 충격 때문에 소리는 그 기능과 관념을 상실했다.
발로로는 그대로 허리를 뒤틀었다. 크게 휘둘러진 영검 그람이 빛을 끌었다. 빛의 괘선에 숫제 공간이 파먹히듯 에였다.
섬뜩한 검날의 이동을, 라이칸은 자연스럽게 전격 마법으로 방어와 반격을 동시에 가했다. 낙뢰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체인 라이트닝.」
다시 한번 울리는 천둥소리. 이제부턴 본능의 영역이었다. 판단을 거세하고 몸이 이끄는 대로 반응해야 한다.
발로르의 검이 벼락을 걷어냈다. 깎여 나간 번개 몇 가닥이 공기를 찢었다. 그러면서 뇌검은 영검 그람으로 맞부딪쳤다. 노면을 짓밟은 두 초월자의 발밑 어귀가 벌겋게 녹아내렸다.
라이칸이 검을 짧게 당겼다가 쭉 찔러넣었다. 방어가 아닌 반격을 강제하는 공격. 발로르는 숨을 집어삼키곤 오른손을 치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돋아나는 빛기둥. 하늘을 꿰뚫은 기세로 뻗어나간 검기는 이내 구름을 토막 냈다.
두 초월자는 제자리에서 공방을 주고받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일대는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지축은 엇나가 시소처럼 기우뚱거리며 한쪽으로 쏠렸다.
라이칸은 감탄했다. 정말이지 필멸자로 두기에 아까운 존재지 않은가. 무엇보다 저 굳센 결의와 강인한 힘. 공격을 가한 자신의 팔이 되레 경직될 듯하다.
이 자는 상식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라이칸은 경외를 느끼며 더 경악스러운 낙뢰를 쏟아 냈다.
「라이트닝 퍼니쉬먼트.」
콰르릉! 콰릉! 쿠르르릉!
번개가 계속해서 몰아쳤다. 허공에 수백, 수천, 수억…. 노랗다 못해 시뻘겋게 달궈진 섬광이 번쩍였다. 주변 전체를 뒤덮은 피와 육편의 동산이 잿더미로 화해 흩날렸다.
발로르가 오른팔을 횡으로 흔들었다. 새하얀 파장이 셀 수 없이 많은 전격을 집어삼켰다. 어지럽게 맞물리는 가운데 발로르는 다시 용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순백의 광선이 라이칸의 어깨 너머를 스쳤다. 그의 발치 옆이 아지랑이처럼 투명하게 일렁였다. 발로르의 검격이 공백을 생성한 것. 마력으로 채워졌던 대기는 진공상태로 변해, 공허한 메아리가 맴돌았다.
라이칸은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순간 오싹함을 느끼다가 곧 실성한 이처럼 광소를 터뜨렸다.
“역시구나. 이런 너마저 용사가 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애석할 따름이야.”
“…….”
“그러나 간 보기는 이제 되었다.”
라이칸의 눈에서 녹빛 안광이 새어 나왔다. 발로르도 검날로 라이칸을 겨누면서 마주 선언했다.
“그만 끝을 보자, 라이칸.”
왼팔에서 피어오른 연기에 발로르는 팔근육과 뼈를 사라 먹혔다. 라이칸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분’의 힘은 발로르 호아킨, 네 육신으로조차도 버티지 못하는구나. 참으로 대단하면서도 잔혹한 힘이야. 그래도 보여다오.”
발로르는 태연한 기색으로 바스러지는 제 왼팔을 바라봤다. 그는 생각했다. 팔 한쪽. 사용할 힘의 대가로선 지극히 싼 값이라고.
라이칸이 말했다. 광분에 겨운 목소리로.
“신조차 베는 역천의 권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