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0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07화(206/300)
207화 흔적 (3)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둔재였다. 어느 방면에서도 뛰어나지 못했다. 마을 어른들은 그가 변변찮은 사내가 될 것이라 여겼다.
다만 오싹하리만치 서늘한 남자의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어려 있는 듯했다. 여기에 검은 눈과 머리는 불길함을 배가시켰다. 그런 그를 어른들은 큼큼 헛기침하며 그를 피했다.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남자는 묵묵했다. 텃밭을 갈궈도 흉작, 다 썩어 문드러진 과일만 골라 채집.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그렇게 그는 하는 수 없이 마을의 공용 양식을 축냈다. 시간도 같이 죽였다.
몇 년이 흘렀다. 남자가 소년기에 접어들 무렵, 어른들이 그를 불러냈다. 그리고 검, 창, 활, 둔기. 무기를 종류별로 좌르륵 늘어놨다.
노파가 남자에게 턱을 까딱였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는 몸짓이었다. 남자는 빤히 노파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뻗었다.
남자가 택한 무기는 검이었다. 이유가 크게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나쁘지 않다, 그뿐이었다. 이 선택이 자신의, 아니 인류의 앞날을 어떻게 뒤바꾸게 될지 모른 채.
곧바로 남자는 검 한 자루만 달랑 쥔 채 전장으로 끌려갔다. 이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제국의 징집령 때문이었다.
인마대전이 갑작스럽게 발발했다. 해서 당시, 제국은 마을마다 젊은 사내를 거둬들였다. 이는 군대를 편성하기 위함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암암리에 논의, 이후 남자를 전선으로 내몬 것이었다. 고아에다 둔재인 그이기에 어느 것도 잃을 게 없었으므로.
한데도 남자는 마을을 원망하지 않았다. 솔직히 아무런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이렇듯 남자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는 ‘의지’가 쏙 빠져 있었다. 그런 점에 마을은 그를 둔재로 여겼었고, 미안하지만 얼마 안 가 죽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남자는 전장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단순히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모습을 비추면 즉시 전세가 뒤집힐 정도.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재였다.
남자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지만, 재해처럼 난폭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왕군의 전열이 박살 났다. 지나온 전장은 늘 피 안개가 자욱했다. 적의 피로 일은 혈무였다.
전쟁이 계속되는 십수 년 동안 남자는 날로 강해졌다. 마치 한계가 없다는 듯이 그의 무력은 신위에 근접했다.
남자를 따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흘러, 이내 셀 수 없이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그는 그중 일곱을 솎아내어 제자로 삼았다. 후일 칠성 영웅의 모태가 되는 7영걸이었다.
종국에 달해 둔재라 불렸던 남자는 인류의 희망이 되어 있었다. 반대로 마왕군은 그를 증오함과 동시에 두려워했다.
인간과 마족은 입 모아 남자를 이리 논하였다. 하늘의 편애를 받는 존재라고.
남자는 이에 긍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둔재가 맞았다. 부여된 힘에 비하면 바늘처럼 극히 일부만 상용하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그 일부의 힘도 통제와 발현이 쉽지 않았다. 남자는 깨달았다. 이것엔 자신 말고 다른 적임자가 있다고…….
* * *
라이칸은 마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이곳은 마경 게헤나다. 사방에 내리깔린 것이 곧 마력. 무한한 수급이 가능하기에, 라이칸은 순식간에 방대한 양의 마력을 끌어냈다.
반면 마경의 환경은 인간에게 독성이었다. 이 농축된 마력에 게거품을 물고서 쓰러지는 게 정상이었다. 한데…….
후우웅.
어둠이 짙어진다. 빛도 함께 흩어진다. 끝없이 차오르는 어둠을 신성한 기운이 맞받아친다.
라이칸은 녹빛 귀화가 흐르는 눈을 앞에 두었다. 검을 든 인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라이칸은 전율했다.
무한한 마력 앞에서도, 인류의 절반을 말소시킬 수 있는 자신의 앞에서도.
발로르 호아킨은 결코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기를 쓰지도 않았다. 행동의 연유엔 ‘의지’ 따위는 없다. 그저 적을 향해 다가간다.
이런 부분은 ‘그분’과 한없이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저 사내는 반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그분께 선택받은 기분은 어떤가?”
라이칸은 입꼬리를 올리며 기쁨을 드러냈다. 뚜벅뚜벅 걸으면서 발로르가 일축했다.
“보면 모르나. 결국엔 팔 하나를 집어삼켜지고 있다. 나는 선택받은 게 아니다. 어쩌다가 이 빌어먹을 저주를 지니고 태어났을 뿐이지.”
“하하하!”
라이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천둥소리가 일었다. 그를 중심으로 시퍼런 벼락들이 청소하듯 주변을 휩쓸었다. 라이칸이 말했다.
“그거 아나? 마족과 인류는 본질적으로 동류라는 것을. 나는 전쟁 동안 인간의 수많은 악행을 보아 왔다. 이따금 네놈들의 어둠은 마족 이상이더구나. 이처럼 어둠과 빛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니더냐?”
“나는 마족이 선행을 하는 걸 본 적 없다.”
라이칸이 재차 실소를 터뜨렸다. 일대 전체가 가늘게 진동했다.
“발로르 호아킨, 그대는 정말 대화할수록 재밌는 사내야. 오늘로써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영영 사라진다는 게 다만 아쉬울 따름이군.”
“걱정마라, 라이칸. 지옥으로 떨어지면 이미 죽은 마족들이 네 말동무를 해 줄 터이니.”
발로르가 이내 라이칸을 향해 질주했다. 단 한 번의 도약. 라이칸은 그 도약에 대응하지 못했다.
번개마저 유린하는 경악스러운 속도. 영검 그람이 기다란 빛줄기를 흘렸다.
서걱!
눈 깜짝할 새에 라이칸의 왼팔에 혈선이 그였다. 그의 팔이 떨어지기 전, 발로르가 검을 낮게 휘둘렀다. 다리를 노리는 검격. 하지만 이번에는 반응하는 라이칸이었다.
쿠구구구구!
수천 다발의 뇌격이 지면에 내리꽂히고, 광범위하게 짓이겼다. 발로르는 퍼뜩 거리를 벌렸다. 검을 휘저어 뇌창을 베어 냈다. 그의 팔과 다리는 번개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얼핏 인과가 역전된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번쩍번쩍 푸른 섬광은 시야 전체를 하얗게 차단했다. 굉음은 고막을 찢어 발로르의 귓불을 피로 적셨다. 그런 와중에 수억 개의 뇌 창살이 또다시 날아왔다.
발로르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번개가 거슬렸다.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로 피하곤 있으나 이대로는 끝이 없을 터.
‘그렇다면.’
다음 순간 발로르의 왼팔이 더 빠르게 타들어 갔다. 발로르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영검 그람을 올려 쳤다. 전격이 허공에서 어슷 썰렸다.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험준한 산맥들이 빙산처럼 녹아내렸다. 영검 그람이 빚은 사변이었다. 원래도 신속했던 발로르의 검격은 이젠 눈으로 쫓는 게 무의미한 경지였다.
쿠르르르릉.
추적추적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름처럼 미끌미끌한 붉은 비가 노면을 흥건하게 덮었다. 그럼에도 인간과 마인은 여상한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다.
군데군데 석유색의 검은 구체가 허공에 맺혔다. 물리의 차원을 넘어선 전투로 시공간의 흐름이 얽혔다.
마경이 비명을 지른다. 투둑투둑. 하늘에서 덩어리들이 낙천한다. 초월자 둘로 인해 발생한 죽음의 행렬.
그때 발로르는 눈을 내렸다. 타들어 간 왼팔은 이내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었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시간이 얼마 없다.’
이대로라면 연기는 다리까지 전이 된다. 기동성을 잃는 건 양상을 크게 기울일 변곡점이었다. 패색이 짙어질 것이었다.
‘끝을 본다.’
발로르가 허리를 구부리고 오른발을 뒤로 물렸다. 왼팔의 검은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그늘이 드리운 얼굴에선 두 줄기의 귀화가 새어 꼬리를 내뺐다.
라이칸은 그런 그를 보며 직감했다. 이게 이 사투의 끝이리라.
빗방울이 점차 굵어졌다. 조각조각 토막 난 마경은 와중에도 시공간을 왜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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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
발로르의 신형이 흐트러졌다.
* * *
라이칸이 휘청이더니 허/리가 분리되었다. 그의 상반신이 바닥을 구르다가 멈췄다. 전격은 허공으로 파스스 자그마한 불티만 남기더니 사라졌다.
이윽고 라이칸의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서녘으로 저물던 태양이 반으로 쪼개진 모습. 대지는 여전히 용암처럼 자글자글 들끓었다.
라이칸은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혈전의 승자, 인간이 서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비척비척 간신히 기립한 채였다.
발로르는 울컥 핏물을 연신 게워 냈다. 전신 여기저기가 상해 있었다.
그는 입가의 핏물을 훔쳤다. 그러고서 비틀비틀 발을 떼었다. 검날 끝을 노면에 박아 넣으며 영검 그람을 지팡이 삼았다.
라이칸과 가까이 다다른 발로르는 그를 굽어보았다. 그의 턱끝에 뭉친 핏방울이 똑똑 라이칸의 얼굴에 떨어졌다. 탁한 숨소리, 창백한 안색과 엉망이다 못해 걸레짝이 된 몸 상태.
그럼에도 발로르는 땅을 밟고 서 있다. 눈빛은 흔들림 없이 서늘했다. 명명백백한 승자의 풍모였다.
라이칸이 침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너…마저도 그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는 것이냐…….”
발로르는 허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라이칸의 눈이 서서히 회백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래. 그것도 그렇지… 이 정도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종…말을 막을 순 없을 테지.”
“하나만 묻지.”
발로르가 말했다. 목소리는 녹이 슨 것처럼 닳고 닳아 있었다.
“마왕군, 너희가 말하는 그분. 동시에 내게 이 빌어먹을 힘을 준 그자는 어디 있나.”
그의 말에 라이칸은 옅게 웃었다.
“그분은 홀로 신 전부를 괴멸시켰다. 그에 위기를 느낀 이 세계는 그분을 이곳에서 추방했지. 해서 우리와 같은 곳에 있지 않으시다. 한데 왜 그걸 묻는 것이냐.”
“찾아 죽일 생각이다. 라이칸 네놈의 주인이라면 필경 인류의 적일 테니. 더불어 내게 이 저주를 내렸으니 그에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제아무리 신들을 도륙 낸 존재라 할지라도.”
라이칸으로선 신성을 모독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미소는 오히려 진해졌다.
“재밌구나. 몹시 재밌지만, 네놈은 그분을 죽일 수 없다. 그분과 맞서는 건 용사만이 가능하지. 그건 너도 아는 사실이지 않나, 발로르 호아킨? 다만 그분을 뵙고자 한다면 방법은 알려 줄 수 있지.”
그때 발로르의 무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눈동자가 커진 모습을 보며 라이칸이 아주 느리게 그 의문에 답했다.
“우로보로스에게 받은 마안의 고리를 사용해라. 그럼, 그분이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
“라이칸, 너는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전부 털어놓는 거지.”
“어리석은 물음이구나. 말했듯 나는 너를 벗으로 인정했다. 하여 나는 말하는 것이다.”
“…….”
“마족은 인간을 죽인다. 그에 우리는 조금의 후회도 자비도 없지. 그것이 불변의 순리이다. 하나, 그 정의를 세운 건 누구겠나. 어쩌면 우리는 그저 더 위의 존재의 농간에 놀아나는 병정일 테지.”
발로르 호아킨은 한숨 쉬며 재차 물었다.
“고리의 마안을 사용한 뒤엔 그자를 어떻게 찾으면 되지.”
“이 역시나 우문이구나. 그릇된 신을 숭배하고 오길 비는 건 너희 인간이 매일 하는 게 아니냐. 한데 진정한 절대자인 그분은 어떻겠나? 진정으로 뵙길 간청하다 보면, 그분께서 네게 찾아올 것이니.”
호흡을 고른 라이칸이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분의 흔적을 쫓는 여행을 떠나거라, 그 시작은 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할지니. 지금의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발로르 호아킨.”
발로르는 조용히 역수로 잡은 검을 올렸다. 뒤이은 요란치 않은 피륙음.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