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0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09화(208/300)
209화 나만의 작은 교실 (1)
세인이 말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어떤 걸 고를 것임?”
“……?”
아벨은 순간 머리가 띵했다. 밸런스 게임이 무엇인가. 두 선택지가 비등한 가치를 지녔을 때, 어쩔 수 없이 한 쪽을 선택하는 것. 한마디로 균형이 맞지 않으면 게임 자체가 성사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검마와 이어지기 vs 세계 멸망
원래 아벨의 성격이었다면 눈살을 콱 찡그린 다음, 한 소리 했을지도 모른다.
한쪽의 가치가 월등히 크다…라기보단 결이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여기서부터 밸런스 게임의 본질에서 완전히 엇나갔다.
그러나 아벨이 할 말을 잃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그보다도 후자의 선택지가 불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멸망.
마족과 마수가 범람하는 이 세계에서 그 낱말이 주는 힘은 강력하다. 실제로 700년 전, 인류는 한 차례 멸망 위기를 겪었기에.
사람들은 장난으로라도 저 불경한 소리를 입에 담지 않는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마법과 가호란 미지의 힘이 난무하는 세계다. 이곳에선 이런 말 한마디에도 힘이 깃든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아벨도 그중 하나였다.
세인은 그걸 밸런스 게임을 한답시고 툭 내뱉었다. 아무리 재미 삼아 하는 놀이라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세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없이 진지한 눈빛. 장난 따위가 아니라는 듯한 눈빛에 아벨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
주변을 잠식하는 침묵. 그렇게 잠시간이 흐르고, 이내 세인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님이 내 사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만하네. 세계 멸망이란 선택지 앞에서 고민할 정도면.”
세인의 말에 아벨은 생각했다. 짧은 정적이 오해를 만든 건가?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아벨이 우물쭈물했던 건 단순히 입술이 떼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세인은 아벨이 ‘세계 멸망’에도 불구하고 강검마와 이어지고 싶어 한다고, 이렇게 오해한 듯하다. 착각 아닌 착각이었다.
아벨은 항변하려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이 더 빨랐다. 세인은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님이 그 정도 마음이면,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겠음,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뭐… ‘윗놈’들한테서 대가는 많이 치러야 하겠지만, 결국 내 숙명은 ‘바깥에서 온 존재’의 행복임.”
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아벨이었다. 윗놈? 바깥에서 온 존재? 행복? 지레짐작으로 세인은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 그 정도로만 어렴풋이 해석됐다. 나머지는 여전히 모르겠고.
‘그리고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약간 넋두리 형식으로 말하는 듯한 세인의 어조에 아벨은 불안함을 느꼈다. 흡사 모든 걸 털어 내고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벨은 더듬더듬 되물었다. 혀가 입안에서 헛돌았다.
“자, 자, 잠깐만. 너무 앞뒤 설명이 없어서 그러는데.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벨의 말에 세인은 한 점 미소를 머금으면서 대답했다.
“얼마 안 있어 알게 될 것임. 본래라면 님은 모르는 게 약이었을 사실인데, 상황이 좀 많이 얽혔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님이 알 수밖에 없어졌음.”
“……?!”
세인은 그 말을 남긴 뒤, 마저 걸음을 옮겼다. 왔던 길 그대로 홀연히 돌아가는 모습.
아벨은 팔이라도 뻗어 붙잡아 볼까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공포에 가까운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위로 뺐다. 어두운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날카로운 안광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쏠린 곳에는 세인이 걷고 있었다.
아벨의 눈엔 세인이 그 망라한 시선들을 전부 감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장면에 아벨은 문득 가슴에 슬픔과 연민이 함께 떠밀려 왔다.
“유세인, 너나 강검마의 가족한텐 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거야…….”
아벨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사소한 대화가 어떤 미래를 안겨다 줄지 모른 채.
* * *
같은 시각, 호아킨 아카데미 인근 호텔.
절궁은 벽면 전체를 아우르는 창가 쪽에 서 있었다. 수십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호텔 방은, 그 한 명만을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절궁은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남은 손으론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그자의 설득은 실패로 끝난 건가, 히나.”
절궁의 등 뒤에 있던 사키 히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예.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사키 히나는 목청을 가다듬고서 간신히 다음 말을 이었다.
“천검 강검마 님은 신체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너무 완숙하십니다. 제 가호로는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외부적인 방법으로 천검님을 설득하기란 무리일 성싶습니다…….”
말하는 내내 사키 히나는 침착을 가장했다. 실상은 다리가 오들오들 떨려 서 있기도 버거웠지만.
“알겠다. 나가 보거라.”
절궁의 축객령에 히나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의 성격대로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한마디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 알겠습니다, 총리님. 부디 좋은 밤 되시길.”
불안함과 의아함, 떨떠름함이 동시에 차올랐지만 일단 히나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퍼뜩 방을 빠져나갔다.
한순간 휑해진 너른 호텔 방. 절궁은 시선만 창밖으로 던지면서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어 술의 잔향 때문인지 그가 쓰게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숨어 계실 겁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그림자 덩어리가 사뿐히 떨어졌다. 그 덩어리는 천천히 인간의 형태를 갖추더니 껄껄 웃었다.
“허허, ‘까마귀의 가호’를 극한까지 활용했는데 바로 알아차리시다니. 역시 절궁께선 달라도 좀 다르십니다그려. 몰래 더 있었다간 자칫 미간에 화살이라도 맞았을 것 같습니다.”
아디토레의 당주, 알’타이르. 그가 수염을 쓸면서 다가왔다. 절궁이 싸늘하게 씹어 뱉었다.
“잘 아시는 분이 멋대로 제 방에 오셨군요. 나이가 너무 드셔서 이젠 사리 분별이 둔해지신 겁니까?”
절궁의 태도는 위상을 참작해도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하물며 알’타이르의 나이는 절궁보다 예닐곱은 많았으며, 지위 면에서도 크게 뒤처지진 않았다. 무려 그림자 집안의 당주인 그였으니까.
절궁의 이런 하대는 명백한 무례였지만 당주는 허허- 하고 말았다. 애초에 몰래 들어온 건 자신이었으므로.
“암살자로서의 관행이라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군요.”
말투는 공손해도 알’타이르는 턱을 슬슬 긁적였다. 절궁이 미간을 좁혔다.
“관행도 지나치면 심판을 받습니다. 잡담은 이쯤 하고, 저를 찾은 연유는 뭡니까. 지크프리트 선배의 명령입니까?”
“절궁께서 큰 착오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저희 아디토레는 질서의 가문입니다. 누군가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단체가 아닌, 저희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집단입니다.”
“그럼 말해 보십시오, 이 야밤에 감히 한 국가 수뇌의 침소를 무단으로 침범한 이유를. 혀를 잘 놀려야 할 겁니다. 큰 문제로 번지기 싫다면.”
절궁 사키 코지마의 엄포. 그에 당주의 입가에 걸렸던 사람 좋은 미소가 싹 가셨다.
“소문이 돕디다. 절궁께서 영웅 협회까지 넘보려 한다는 소문이요.”
“…….”
녹은 얼음이 절그럭 소리를 내며 술잔에서 굴렀다. 알코올 냄새가 옅어졌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일 경우, 욕심이 너무 지나치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당신은 이미 칠성 영웅인 데다가 당신 말처럼 일국의 정상입니다. 거기에 영웅 협회까지 넘보려 하시다니, 과합니다.”
알’타이르의 말에 절궁은 위스키를 마저 목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서 짧게 일축했다.
“뜬소문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죠.”
“그럼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십 년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주인일 바엔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세상엔 상도라는 게 있습니다, 절궁. 이미 창성께서 차기 협회장으로 유력하신데 외인이신 당신이 끼어들다뇨.”
절궁이 코웃음 쳤다.
“리차 드 뮈라 선배는 머리보단 몸이 먼저 나가는 분 아닙니까. 그런 요직에 걸맞지 않습니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절궁께서 판단하실 일은 아니지요.”
“지금 말장난이나 하자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알’타이르가 눈을 위험하게 빛냈다.
“충고하러 온 겁니다, 절궁. 이 이상으로 선을 넘지 마시오. 더 간다면 우리 아디토레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겠소. 내 할 말은 이걸로 끝이오.”
알’타이르는 뚜벅뚜벅 문으로 향했다. 문 바로 앞에 다다른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거운 음성으로.
“이왕 충고하는 김에 하나 더 말하겠소. 새로운 칠성인 천검, 그분께도 더 접근하지 마시오.”
쨍그랑. 이윽고 위스키 잔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유리 파편을 날렸다.
절궁이 사납게 외쳤다.
“당주! 무례도 정도껏 하세요. 감히 나 사키 코지마에게 그따위로 말하는 겁니까? 하던 질서나 지킬 것이지, 당주의 그 말이 가장 질서를 훼손하는 말이란 걸 명심하시오.”
“모름지기 질서란 하늘(天) 아래에서 평등한 법. ”
알’타이르가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그에 맞춰서 너울거리던 그림자가 형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스스스.
널찍한 호텔 방에 일순간 서른이 넘는 인기척이 채워졌다.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의 눈에서 붉은 양안이 길게 흘렀다.
알’타이르가 말했다.
“한데 그 하늘을 떠받드는 것이 질서가 아니면 뭐란 말이오?”
“당주… 그대가 하는 말은 천검, 그자가 하늘이란 뜻인가?”
“그분의 별호부터가 하늘의 검이잖소. 과대 해석은 아니라 생각하오만.”
시리게 빛나던 당주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니 질서 걱정은 접어 두고 당신 처신이 잘하시오, 사시미에 목이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천검께선 나와 달리 인내심이 강하신 분이 아니니.”
* * *
정말 오랜만에 랑 클래스로 들어섰다. 본격적인 공사에 앞서 아카데미 생활을 조금이라도 누리라는, 메디아의 조언 덕분이었다.
사실 칠성이 된 이 시점에서 ‘영웅이 되는 수업’을 듣는다는 게 참.
비유하자면 장성급이 병사가 되는 법을 배우는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도 되도록 수업에 참여할 생각이다. 첫 스승님이 했던 말, 학교란 단순히 지식이 아닌 유대를 쌓는 곳이란 말을 가슴에 새겼기에.
하여 나는 기꺼운 마음가짐으로 클래스로 온 것이었다. 다만…….
“끼야야야야! 천검이다, 천검! 사인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저 진짜 옛날부터 팬이었거든요.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천검님?”
“천검! 천검! 천검! 천검! 천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니, 지금 수업 1분 전이잖아. 이래서는 다음 수업은 고사하고 하루가 통째로 날아갈 판이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라고?’
클래스, 학년 여하를 막론하고 몰린 생도들. 어찌나 많은지 산소가 부족해 숨이 턱턱 막혔다. 교관님들이 와서 저지해야 할 만한 상황.
문제는… 이 인파에 교관들이 더러 끼어 있다는 거다. 생도들은 그렇다 쳐, 근데 당신들은 여기 일터잖아. 이래도 되는 거야? 월급 루팡이 여기 산재한다.
‘그리고 제발 ‘천검’ 복창 좀 그만하라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태생이 지구인 나로선 이명으로 불리는 게 낯설다 못해 수치스러웠다.
본명도 익숙해진 지 얼마 안 된 참인데, 더 낯부끄러운 이명이라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환장하겠네.’
사람들에 둘러싸여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던 찰나. 쩌렁쩌렁한 호통이 문 방향에서 들려왔다. 내게 집중됐던 이목이 일순 분산됐다.
“수업 시작이다! 다들 원위치로!”
자랑스러운 랑 클래스의 주임이신, 이원빈 교관께서 들어온 것이다. 저 매끈거리는 민머리가 유독 빛나 보인다. 눈이 부셨다.
이원빈 교관은 생도 틈바구니에 숨어 있던 교관들을 타박하곤 교통정리를 시켰다. 덕분에 우당탕했던 소란이 물먹은 솜처럼 폭삭 세가 줄었다. 전에 들은 바론 이원빈은 교관 중에서도 입지가 꽤 있는 편이라지.
지금 보니 그럴 만했다. 정말이지 생도들의 모범이요, 교관으로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정도 소요가 진정되자 이원빈 교관이 두리번두리번 눈치를 봤다. 그는 곧 조심스레 내게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저… 천검님.”
“강검마면 됩니다. 적어도 아카데미에서만큼은 저는 명백히 교관님 아래잖습니까.”
“……!”
“교관님마저 저를 불편하게 대하면 아카데미 다니기가 너무 힘들 것 같거든요. 그러니 부디 편하게 대해 주세요.”
이원빈 교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살짝 감동한 얼굴. 나는 피식 웃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럼…….”
이원빈은 성량을 들릴 듯 말 듯 낮췄다. 멋쩍은 미소는 덤으로.
“이따가 사인 하나만 따로 부탁해도 되겠나? 조카가 자네 팬이라서 말이야. 아, 그리고! 해 주는 김에 나한테도 하나 해 주면 정말 고맙겠군, 하하!”
흐뭇하게 올라갔던 내 입꼬리가 축 처지는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