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1화(21/300)
21화 중간고사 (2)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난데없이 레온이 내게 어디에서 왔냐고 툭 던지듯 물어본다. 질문의 저의가 무엇일까. 지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게 맞는 건가?
“…….”
미팅룸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나는 미미하게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어 덤덤하게 받아넘겼다.
‘뭐지?’
저 진지한 눈빛, 마치 나를 가늠해 보는 듯한 옅은 건조함이 눈동자에 스며들어 있다. 무슨 의도로 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는 이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 이곳에서의 출신 성분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이다.
애당초 회의 중 자기 소개 시간에 묻지 않고, 일부러 조원들이 다 빠져나간 후, 물어봤다는 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법한데…….
일단은 복잡한 속을 숨기며 그 부분에 대해선 함구하기로 했다. 내 눈이 겹겹이 늘어지자, 레온은 진지했던 표정을 풀며 뺨을 긁적이며 사과했다.
“갑자기 쓸데없는 소리 해서 미안. 검마 너도 나랑 비슷한가 해서.”
비슷하다라…….
이 세계는 게임적 허용 덕에 만국 공통어가 한국어였지만, 엄연히 다양한 인종이 존재한다.
아카데미 생도들만 해도 다들 머리 색이 휘황찬란하긴 하지만 인종에 따라 외관은 상당히 차이가 났다.
당연히 이름부터 강검마인 내 외모는 전형적인 흑발의 동양인, 이에 반해 금발의 벽안인 레온은 서양인의 그것이다. 저 자식이 시력이 0.1 이하가 아니고서야 그걸 구분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뭐, 마인(魔人)도 인종 취급이긴 한데, 그쪽은 워낙 다양해서 이것저것 따지는 게 무의미했다.
레온은 옅은 미소를 걸치고, 짧게 이어진 정적을 깨고 먼저 말을 뗐다.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줘. 먼저 갈게.”
그리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레온. 지금 이 자식을 떠나보내면 위화감에 날밤을 새울 것만 같았다. 큼지막한 내 손이 뒤돌아선 레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레온, 너는 어디서 온 거지?”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날 선 목소리.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해 봤지만, 도저히 가벼운 어조가 나오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밖에. 벽면에 스며들던 정적이 좀 더 짙어진다.
그러자 레온은 딱딱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듯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난 독일.”
그렇게 ‘다음에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서 미팅 룸을 나간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며 생각했다.
저 새끼 뭐지?
* * *
미팅이 끝난 뒤, 나는 저녁도 거른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도저히 입맛이 돌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기우였나?’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줄줄이 되짚어 보아도 마땅히 명쾌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이 없다.
레온이 처음 내게 물었을 때, 나는 영락없이 그 녀석도 지구는 아니어도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게임에 빙의한다는 설정이 나 하나에게만 적용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주인공 정도 되는 인물에게 그런 설정 하나 있는 게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보다는 개연성 있지 않은가.
하지만 검신의 가호를 발현하고 날카롭게 벼려진 예리한 직감이 그 가능성을 전면에 부정했다. 레온은 이 세계의 존재가 분명하다고 무형의 무언가가 속삭이듯 내게 말하는 기분.
하물며 오늘 본 레온의 모습은 말투부터 행동까지 완벽하게 주인공의 그것이었다. 아무리 연기자를 갖다 앉혀 놓는다고 해도 그 정도는 불가능할 것이라 확신한다.
정말 내가 어디 출신인지 물어본 건가? 단순히 국적? 그렇게 속단하기에는 뒷맛이 좋지 않다. ‘너도 나랑 비슷한가 해서.’란 말이 연신 마음에 걸려 목덜미를 화끈거리게 한다. 잡념에 잠기다 이내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인공 레온은 게임 플레이 당시에도 떡밥이 많은 캐릭터였다. 개발사의 의도인지 주인공인 주제에 플레이어에게도 신비주의적인 느낌을 고수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꺼무위키로 간략하게 줄거리 정도는 보는 건데. 스포충을 이렇게 간절하게 찾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나는 쓰게 혀를 찬 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있나.’
예전이었으면 무언가 꼬여 버린 이 상황에 여러모로 멘탈이 나갔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사리를 분별한다. 몸을 처지게 하는 맥없는 감정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차피 레온과 엮이는 건 이번 중간고사 한 번으로 정해 뒀다. 기어코 엮일 것 같으면 메디아에게 찾아가서라도 막으면 될 일이다.
내키진 않는다만, 수석 특혜를 운운하면 한두 번은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게다가 메디아는 내게 묘한 호감을 표하며 든든한 아군을 자처했다. 그 부분을 이용 못 할 것도 없다.
그래도 운이 지독하게 나빠 또 엮일 것 같으면 그때 가서는 내 손으로 직접 해결을 볼 생각이었다.
메디아 본인은 명예직이라 평가 절하 하긴 했지만, 학원장이라는 입지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 명문인 이곳, 호아킨 아카데미의 최고위직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녀의 입김 한 번으로 대개의 일들은 해결된다는 말씀. 아카데미 원로단이란 견제 수단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 꼰대들은 웬만해선 일선에 나서지 않기로 유명했으니.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서 흰 벽지를 배경 삼아 상태창을 열었다.
파앗―
== ==
[검신(劍神)의 가호]베면 잘릴 것입니다.
◎육신(肉身)의 격 : (5▶7) ▷ 검(劍)의 규격이 완화됩니다.
◎정신(精神)의 격 : 3 ▷ 말과 행동에 위압감이 깃듭니다.
◎무장(武裝)의 격 : 1 ▷ 해금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동화율 : 2.5▶6.8% ▷ 동화율 7% 달성 시 해금 조건이 충족됩니다.
★【???】
[※ 길이가 35+(1) 센티 이하, 폭은 8+(1) 센티 미만의 검일 때만 가호가 발동됩니다.]== ==
정신과 무장의 격은 그대로지만, 그 와중에도 틈틈이 신체를 단련한 덕에 육신의 격은 소폭 상승해 있었다.
무장의 격이야 이번 시험의 보상인 ‘무라사메’를 얻는다면 분명 상승할 터.
위의 세 개는 그만큼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운 항목들이다.
‘음.’
눈을 가늘게 좁혀 상태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동화율의 상승폭만이 너무 가파랐다. 게다가 해금 조건이 임박해 있는 상황. 동화율 상승 기준은 모르겠지만, 이 기세라면 곧 해금 조건에 도달할 터.
수치가 애매한 소수점으로 적혀 있어서, 나름 경험치 정도로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좀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그간 한 거라곤 클로이와 목검 대련 그리고 녹스와 아공간 대련이 전부인데, 상술 된 세 항목의 성장치가 짠 거에 비해 어쩐지 동화율만 따로 노는 느낌이다.
‘경험치 같은 게 아닌가?’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의구심이 드는 건 동화율 밑의 항목. 수치의 변동성이라도 있는 동화율과 달리, 요지부동으로 그 어떠한 단서도 없이 물음표 세 개뿐. 터치해 봐도 삑 하는 알림음을 끝으로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뭐, 숨겨진 능력 비스름한 것 같은데…….’
그러던 중,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려 보니 상태창 하단이 반짝거리고 있다. 나는 핸드폰 스크롤 내리듯 아래에서 위로 손가락을 저었다.
== ==
[무통(無痛)의 가호]통증이 싹 가십니다.
[▷NEW! 가호의 최소 발현 횟수를 충족하여 발동 시간이 조정됩니다.]== ==
“어?”
어안이 벙벙해져 무의식적으로 손이 새롭게 떠오른 문구를 터치했다.
== ==
[※ 발동 시간 : 30▶40초] [※ 재사용 대기시간 : 12시간]== ==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30초였던 극악한 발동 시간이 무려 10초나 늘었다.
발현 횟수가 조건인 것을 봤을 때,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횟수를 충족시켜 다음 단계를 만족하는 모양이다.
‘그동안 뻔질나게 구른 보람이 있네.’
시험이 목전인 이 시점에 사실상 가장 효용성 있는 성과였다. 나 이전의 강검마가 발현한 가호였지만, 괜히 스스로가 뿌듯한 기분에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몇 주 전까지 권태롭기만 하던 생활에 성장 가능성이 부여되자 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다.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 가방에 쑤셔 놨던 사시미 한 자루를 꺼냈다. 검집을 2/3까지만 벗겨 보자 톱니처럼 날이 상해 있었다.
나머지도 전부 꺼내 상태를 확인했다. 딱 한 자루만을 제외한 나머지는 잎사귀 한 장도 못 벨 것 같다. 여분으로 다이쏘에 들러 몇 자루 더 사긴 해야 한다.
다만, 우선은 이번 시험을 통해 양질의 무장을 획득해야 한다. 밥은 굶어도 아이템은 못 참는 것이 플레이어의 참된 자세니까.
* * *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시험 당일이 되었다.
두 번째 회의에서 조장인 레온을 통해 조원들은 각자의 역할을 배정받았다.
첫 회의 이후로 레온에 대한 의문이 계속 스쳤지만, 굳이 시험이 코앞인 이 시점에 들추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시험이 끝난 후, 그때 가서 물어도 늦지 않으리라.
그러한 의념과는 별개로 레온은 특출난 안목으로 조원들 개개인의 특성에 걸맞게 역할을 할당했다.
백병전에 특화된 레이첼이 진형의 선두를 맡고, 스피드와 기척 차단에 기반하여 클로이가 정찰 임무를 수행한다. 의외로 무투파일 것 같던 스피드 웨폰은 힐러 포지션이었다.
지휘관으로서 통솔해야 하는 레온은 중앙에서 사령탑을, 나는 운 좋게도 후방 엄호 담당이었다. 단순하게 말해서 그냥 뒤에서 시야 확보 정도만 해 주면 되는 역할.
아카데미에서의 첫 시험인 만큼, 연무장으로 나서기 전에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 뒀다. 메뉴는 연어 샌드위치. 부엌칼을 쓰지 않아도 되는 완제품 중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였다.
나는 샌드위치를 전부 먹어 치운 뒤 클로이에게 빌렸던 장미칼 한 자루와 입학 전 샀던 다이쏘 사시미를 꺼내 내려다보았다.
‘오늘로 이것도 마지막이겠네.’
새로 사긴 해야겠지만, 괜스레 불편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비록 누군가에겐 싸구려 날붙이 하나일지라도, 나는 예전부터 칼을 갈아야 할 때마다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리고 이 사시미는 내가 이 세계에 내던져지고 처음 샀던 칼인 만큼 애틋함이 두 배였다.
잠시 다가왔던 애잔한 마음을 털고 그것들을 챙겼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무장에 들어서자,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웬 개선문처럼 생긴 게이트가 넓은 흙바닥의 절반을 차지하며 우뚝 솟아 있었다.
뻥 뚫려 있어야 할 통로에는 보랏빛의 아공간이 커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위압감 넘치는 자태를 넋 놓고 구경하고 있을 때, 오른편에서 조원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여기!”
“검마 군!”
“왔어?”
조원들은 이미 전원 합류한 상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쪽을 향했다.
‘와.’
가까이 다가서자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S급 무장, 방천화극(方天畫戟)을 어깨에 들쳐 멘 레이첼. 달 모양의 서슬 퍼런 칼날과 2M는 족히 될 것 같은 위용. 실제로 보니 입이 벌어진다.
클로이의 무장은 일전에 봤던 카타나. 레온은 시기상 아직 성검이자 마검인 ‘발뭉’의 선택을 받기 전이었기에, 고풍스러운 장식이 박힌 양날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감탄성을 흘리며 무장들을 훑던 내 시선은 자연히 스피드 웨폰에게 옮겨졌다.
‘……?’
양아치 같은 녀석이 리코더처럼 생긴 피리를 목에 걸고 있다.
“리코더?”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자 스피드 웨폰은 말없이 사납게 노려본다. 옆에 있던 레이첼이 그를 대신해 내게 속삭이듯 말을 뗐다.
“저거, 저래 봬도 치유 계열 무장 중엔 몇 개 없는 S급이야.”
“저게?!”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반응이 웃기다는 듯 레이첼은 키득거리며 웃는다.
기적의 가호에서는 어째서인지 서포터 계열 무장의 드롭률이 극악했다. 헤비 과금 유저들도 몇천을 태워서 겨우 뽑은 게 A급일 정도.
‘S급 치유 계열 무장을 보게 될 줄이야.’
근데 모양새는 좀 많이 빠졌다. 생긴 게 딱 초등학교에서나 쓰던 리코더다. 룩도 성능이라는 말이 있는데…….
턱을 쓸며 리코더를 이리저리 살펴보자, 기껍지 않은지 스피드 웨폰은 몸 방향을 홱 틀었다.
이름만 듣고 말 많은 설명충일 거라 생각했는데, 인상부터 해서 참 많은 선입견을 깨부숴 주는 캐릭터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연무장을 메운 동급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왁자지껄, 여유롭게 떠드는 조는 우리 조를 포함해 몇 개 안 되었고, 대부분은 긴장한 기색으로 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제 곧 시간이네.”
레온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모두 너무 긴장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자.”
강한 의지가 담긴 레온의 말에, 조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지금부터 2034년도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시작하겠습니다.]예의 이지적인 음성이 시험 시작을 알렸다.
[아공간 게이트가 가동됩니다.]지이잉―
[가동이 완료되었습니다.]그 말과 동시에 게이트에서 넘실거리던 보랏빛 막이 파도처럼 우리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