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13)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13화(212/300)
213화 위기의 전조 (2)
어물쩍 넘어가려던 차에 뜻하지 않던 구세주가 등장했다. 눈에 힘을 팍 준 최설아가 쿵쿵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 귀쟁… 혼! 내가 혼자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랬지!”
최설아는 혼을 가볍게 핀잔 줬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 해명했다.
“얘는 내 먼 친척인데 이번에 새로 아카데미에 편입해 온 애 거든. 검마 생도를 ‘주군’으로 부른 건, 얘 말버릇이야. 달려온 건 아마 지나가다가 길 물어볼 사람을 찾아서 그런 거일 거고!”
논리정연과 거리가 먼 해명이었다. 막말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뱉는 거였다. 그런데 정말로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아, 그렇구나.”
웨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클로이도 같이 고갯짓했다. 두 사람 다 ‘그럴 수 있겠다’라는 기색을 보였다.
‘이걸 넘어간다고……?’
클로이는 몰라도 웨폰은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그런 그가 순순히 수긍한다는 게 나로선 몹시 놀라웠다.
지구에서는 ‘주군’이란 명칭을 입에 담을 일 자체가 없다. 설혹 있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너 그쪽 취향이야?’ 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터다.
다만 여기는 지구가 아니다. 칠성 영웅, 칠걸, 시조의 영웅이란 명칭들도 버젓이 통용되는 세계다. 그런 곳이니만큼 누군가 주군 같은 단어를 입에 올려도 지구만큼 위화감이 크진 않다, 이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 입으로 해명했으면 상황이 이상하긴 했을 거다.
남의 입을 빌리느냐, 마느냐. 의외로 거기서 호소력이 갈리는 것이다.
‘때마침 최설아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내가 말을 덧붙일수록 상황은 계속 꼬였을 거다.
‘애초에 최설아 이 새끼가 혼을 놓친 게 잘못이지만.’
그래도 이번엔 넘어가 주기로 했다. 덕분에 상황이 풀어졌는데 불러내 질책하는 건 너무 몰염치다. 관자놀이에 땀이 송골송골 솟은 걸 보니 저도 잘못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고.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료조가 눈썹에 반쯤 잠긴 눈으로 혼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길 몇 분, 그녀는 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어휴.’
그리해서 사고로 번질 뻔했던 상황은 작은 헤프닝에서 그쳤다. 이참에 혼도 같은 특별 클래스라는 걸 밝히려 했지만 조금 미루기로 생각을 고쳤다. 이 부분에 대해선 최설아와 논의가 필요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혼에겐 인간 상식에 대한 추가적인 교육이 필요해 보인다. 사람 말만 잘해서 될 게 아니었다. 자칫 혼이 ‘자 이거 봐 봐~!’ 하면서 대뜸 마법을 시전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상상만 했는데 등허리가 차가워졌다. 그땐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으리라. 혼이 드래곤인 것도 대번에 들킬 테고, 더불어서 보호자인 최설아도 영웅 협회로 잡혀들어가리라.
‘그러려면 혼을 특별 클래스에 들이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내가 구상 중인 계획에서 혼의 역할은 실로 중요하다. 이런 위험부담을 기꺼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칼날 위를 걷는 도박이긴 하지만, 그런걸 감안해도 혼은 특별 클래스에 필요한 존재였다.
그때 최설아가 자신의 먼 친척, 혼을 등 뒤로 숨기면서 말했다.
“저 주… 천… 아니, 강검마 생도. 혹시 잠깐 시간 됩니까? 그… 특별 클래스 수업 관련해서 논의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잠깐 따라오십쇼.”
강검마 생도. 본인 입으로 말하면서 최설아는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주군이란 단어가 어느새 입에 착 달라붙은 모양.
며칠 전 난 그녀에게 나를 ‘생도’라 부르길 권고했었다. 원래도 이런 불상사를 방지코자 그리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벌써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그래도 좋게 좋게 생각하자. 이번 경험이 좋은 예방주사가 되었다.
상념을 마친 난 최설아의 부름에 응했다.
“네, 김 교관님.”
그러고 보니 최설아, 얘도 참 적응이 안 되네. 이름은 최설아인데 언제까지 김 교관으로 불러야 하는지 원. 나중에 개명하라고 하든지 해야겠다.
* * *
최설아를 따라 말없이 걷길 십여 분.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휘둘러 본 최설아가 가슴을 쓸었다.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은 녀석은 주먹을 말더니 혼의 정수리를 콩 찍었다.
“야, 이 귀쟁아! 내가 아직 밖에서 싸돌아 다니지 말랬지?! 너 방금 큰일 날 뻔했던 거 알아, 몰라?”
“…제…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어쭈,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대들기는! 너 안 되겠다.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야.”
“이이, 이건 엄연히 계약 위반이에요!”
“계약 위반은 무슨. 너 오늘 점심에 들어간 건 투쁠 한우가 아니라, 닭이었냐? 우리 계약은 분명 하루에 한 번…….”
그렇게 시작된 입씨름은 이내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그저 멀거니 지켜만 봤다.
‘어째 얘네 둘은 볼 때마다 한우 갖고 싸우네.’
평화의 상징인 한우가 두 사람한텐 싸움의 기폭제였다. 한우를 쟁취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둘 사이의 치열한 논쟁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보통 같았으면 산통을 깨는 둘의 싸움을 말렸을 테지만, 오늘의 난 잠자코 있었다. 별 이유는 없었다.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고.’
…공방이 오고 가길 또 몇 분. 최설아는 혼을 가로수 밑에 벌충을 세웠다.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번쩍 든 혼의 모습. 논검의 승자는 최설아였다.
“이 수모… 가만두지 않겠어요…….”
혼은 작은 소리로 꿍얼대며 최설아를 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설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내게 말했다.
“맞다, 저 귀쟁이 때문에 까먹을 뻔했네. 주군, 보고 사항이 있습니다.”
“보고 사항?”
“네, 사실 이건 ‘호아킨 아카데미 비상 대책팀’ 내에서만 도는 이야기인데. 주군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호아킨 아카데미 비상 대책팀. 정예 교관진만 소속될 수 있다는 이른바 비밀 작전 본부. 최설아는 그곳의 소속원이었다.
참고로 어떻게 대책팀에 들어갔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실로 최설아다운 대답이 돌아왔었다.
‘당시에는 빌런 연합 소속이어서 이중간첩 느낌으로 들어갔었습니다! 전에 주군께 켁- 죽은 데미안 교수 추천으로요!’
최설아의 화법이 이렇다. 불법을 무슨 무단횡단한 것처럼 말하는 재주. 그 뻔뻔함은 빌런의 허물을 벗고서도 안 고쳐진다. 이건 그냥 최설아의 천성이었다.
어찌 되었건.
“뭔 일이길래 표정이 그렇게 질려 있어.”
내가 물었다. 최설아가 싹 반색하면서 말을 잇는다.
“게헤나 게이트 인근에서 마인들의 출몰이 빈번하다고 하답니다.”
내가 눈살을 찡그렸다.
“마수도 아니고, 마인? 게네들이 왜 게이트 인근에서 알짱거려.”
“그것까진 아직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저희 팀 안에서 도는 이야기로는 게이트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왜, 검제님도 요새 안 보이시잖아요. 그게 게이트 순찰을 도시느라 늘 자리를 비운다고 하시더라고요.”
“……음.”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승계식 이후로 검제님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는데. 그간 게헤나 게이트 근방을 순방하고 계셨다니. 나는 쓰게 실소했다.
‘칠성 영웅은 은퇴하셨지만, 누구보다 최전선에서 활동 중이시구나.’
반면 나는 아카데미 생활과 칠성을 병행한다고 내심 찡찡거리기 바빴다. 새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동시에 결심을 굳혔다. 미뤄뒀던 단기 목표 ‘다섯 번째 편린’을 찾는 일정을 오늘로 앞당겨야 할 것 같다.
내가 입을 열었다.
“최설아, 너 나 대신에 특별 클래스 만드는 거 절차 좀 밟고 있어라. 혼이랑 나 오늘, 내일 자리 좀 비워야 할 거 같으니까.”
“설마 바로 가시게요? 근데 주군도 아시다시피 게헤나 게이트까지는 아공간 워프로 못 가요. 게헤나 인근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접경지까지 가야만 해서 육로로는 엄청 피곤하실 텐데.”
“그래서 혼이랑 간다는 거잖아.”
“예……?”
나는 말없이 벌 서고 있는 혼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이번 여정은 날아서 가야 할 듯하다.
“…전용기 타고 가시면 되는데 굳이… 요?”
“일 없다.”
“네…….”
* * *
게헤나 게이트 인근 지역.
[ 접 근 금 지 ] 통제선이 삼엄하게 일대를 휘어 감고, 외부인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했다.협회 직원들은 형광봉으로 지나다니는 차를 막아서 일일이 검문했다. 직원들의 노고에 영웅들도 한 몫 거들었다. 그들은 무장을 한 채 일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살얼음판의 현장. 긴장으로 경직된 얼굴들을 눈에 담으며 성 부장이 차에서 내렸다.
“오, 왔군. 성 부장.”
검제가 늙은 입꼬리를 당기며 반겼다.
“격조하셨는지요, 검제님.”
“건강했다마다. 아, 그리고 ‘천검’이라는 이명. 정말 좋은 이름이다 싶었는데 듣기론 자네가 지었다지?”
“예. 부협회장님이 어쩌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히 검마 님의 이명을 지을 수 있게 됐었습니다.”
“뮈라, 그 뇌도 근육으로 된 놈이 정말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판단을 했던 모양이군. 하여간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고.”
“…하하하.”
성 부장은 난감한 기색으로 그저 웃었다. 검제님이 대놓고 상사의 앞담화를 하시는데,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성 부장은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 검제님, 전해 듣기로는 요 며칠간 마인들이 출몰했다고요?”
“맞네. 사흘 전에 ‘다크 엘프’ 세 놈이 우리 측 영웅을 습격했어. 내가 나서서 토벌은 했지만, 그 때문에 현장 경계를 한 층 끌어올린 걸세.”
성 부장은 소름이 오르는 걸 느끼며 말했다.
“다크 엘프는 무리 활동을 하는 놈들 아닙니까. 그런데 셋만 움직였다는 건…….”
“‘정찰조’일 수도 있다는 거지, 본격적인 공세에 앞선.”
“그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여기를 비운 다음, 다음에 정식적으로 부대를 편성해서 다시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다크 엘프들이 무리 지어서 온다면 위험하십니다.”
다크 엘프는 마족 중에선 특이하게 무리 생활을 하는 마인이었다. 본디 마인은 개체별로 생활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다크 엘프들은 여타 마족과는 판이한, 즉 인간과 흡사한 생태를 보인다.
생각해 보자. 한 놈 한 놈이 괴물인 마인이 무리 지어 기습한다면 어떻겠나? 그것도 정찰조까지 꾸려 제대로 습격을 준비하고 있는 거라면?
‘아무리 검제님이 계시는 현장이라도 이곳은 위험해.’
칠성급 전력이 적어도 셋은 필요했다. 그러나 검제에게선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럴 순 없어. 게이트의 유격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어. 지금은 고작 몇 센티지만 이대로면 올해를 넘기기 전에 큰일이 날 수 있어.”
“…….”
“게다가 이런 험지에 올 수 있는 영웅들을 끌어모으면, 치안의 불균형이 생겨. 자네도 알지 않나.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이들은 영웅 중에서도 흔치 않아. 못해도 시니어급. 그중에서도 상위급이어야지만 가능할걸세.”
게헤나 게이트는 마력의 농도가 짙다. 따라서 그에 맞는 훈련을 받은 자들만 엄선하여 이곳으로 파견을 보낸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비치된 인력이 서른 안팎인 건 이 때문이었다. 하물며 이들도 영웅 협회 측에서도 유능한 인재들을 싹싹 긁어모은 것이다.
공식적으로 각국에 지원 요청을 한다면? 인원은 대거 투입되겠지만 필연적으로 게이트의 이변이 새어 나갈 터. 그렇게 되면 비밀리에 조사하는 의미가 퇴색된다.
‘미치겠군.’
성 부장은 답답함에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상황은 긴박한데 환경은 열악했다.
막막함을 느끼고 있던 그때, 성 부장의 본능이 감응했다. 그는 확 고개를 들어 일대를 휘둘러 보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 검제도 마찬가지. 그는 즉시 검을 뽑았다.
게이트의 영향으로 색이 발한 회백색의 수목림. 그리고 그런 잿빛 어둠 사이로 붉은 점이 한 쌍, 두 쌍, 세 쌍…. 이윽고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증식했다.
누군가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다크 엘프다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