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15)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15화(214/300)
215화 위기의 전조 (4)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소년. 장로는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장로가 발작했다.
“바, 바바, 발로르 호아… 킨! 네, 네놈이 어째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냐! 심지어 더 젊어져서는!”
발로르 호아킨은 마경에서도 소문이 무성한 자였다. 수 세기 전 1군단장 라이칸을 토벌한 뒤,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초월자. 그의 검은 눈과 마주친 마족 중 살아남은 이는 극히 적었다.
생존했다 한들,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
‘거… 검은 눈의 인간은 피해야 해……. 그, 그… 자는 인간이 아니야. 악마도 아니지……. 그는 신이야… 검은 신이라고!’
지금의 다크 엘프 장로, 로그 700년 전에 로그가 풀린 눈으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장로 엘프는 발로르 호아킨의 변덕 어린 자비로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정확히는 구걸하여 살아남았다. 다시는 인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해 보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났다. 다크 엘프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검은 욕망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장로, 로그의 검푸른 낯빛이 창백하게 죽었다. 언뜻 서 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측근 엘프가 그런 장로에게 속삭였다.
“장로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자는 시조의 영웅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칠성 영웅에 등극했다는 소년일 겁니다.”
“아.”
“‘천검’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군단장 두 명을 베었다는.”
탁했던 장로의 눈동자에 다시 이채가 스쳤다. 측근은 입을 더 가까이해 장로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장로님. 군단장들이었다고는 하나 전부 불안정한 상태였고. 더구나 이곳은 게헤나 게이트 근처이고, 수적으로도 저희가 훨씬 많습니다. 다만 문제는…….”
말을 끊고서 측근은 눈을 슬쩍 들었다. 상공을 빙글빙글 배회하던 그림자가 서서히 거대해져 갔다. 그 형체가 모두의 눈에 담긴 순간, 그것이 착지했다.
쿠우웅.
자욱했던 흙먼지가 짙어졌다. 꾸물꾸물 흐릿한 풍경. 인간형으로 변신한 혼이 강검마와 나란히 섰다. 이에 성 부장이 어벙한 눈을 하고서 물었다.
“처, 천검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소녀분은 설마… 드, 드래곤입니까?”
“예, 뭐. 자세한 설명은 추후에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강검마가 눈썹을 긁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검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검제님께선 후방을 맡아주십쇼. 대략 오십 남짓인데, 이 친구, 그러니까 드래곤과 함께하면 수월하실 겁니다.”
검제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대뜸 드래곤과 합공하라니. 이게 뭔 신나라 까먹는 소리인가. 그러나 저 눈, 강검마의 눈빛은 고요했다.
‘믿고 따르라는 건가.’
검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후방은 내 어찌해 보지. 앞을 부탁하네.”
“감사합니다.”
강검마는 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혼, 너는 검제님 옆에서 도와주면 돼. 기회 봐서 사람들도 마법으로 구해 주면 더 좋고. 할 수 있지? 잘하면 내가 투쁠이 아니라 쓰리쁠 한우 사 줄게.”
끄덕끄덕. 혼이 맹렬하게 주억였다. 침방울이 튀었다.
“예!”
강검마는 씩 웃었다. 그러곤 반쯤 뽑은 사시미를 마저 꺼냈다.
“죽여라!”
측근 엘프가 외쳤다.
쐐애애애액.
우렁찬 소리가 나오던 측근 엘프의 입이 푸르죽죽한 피를 쏟아 냈다. 그 몸은 실 끊긴 목각인형처럼 허물어졌다.
측근 엘프는 울대에 다이쏘 사시미가 꽂힌 채 즉사했다. 그는 부족에서 제일가는 전사였다. 그리고 3천 원어치 죽음을 선고받았다.
“……!”
“내가 오늘 느낀 게 있는데.”
강검마가 한 발짝 나아간다. 두 자루의 사시미를 역수로 돌리며 말한다.
“난 역시 말보단 칼부터 나가는 게 좋더라.”
강검마의 입가 웃음이 진해졌다. 무라사메와 만년사리의 칼날도 화사한 미소를 새겼다.
* * *
발소리가 들렸다. 산보하듯 경쾌한 발소리는 죽음의 선율이 되었다.
“끼야야아아아아아!”
여자 엘프가 앙칼진 비명을 질렀다. 강검마는 기습적으로 사시미를 찔러 넣었다. 뒷덜미에서 칼날이 삐죽 돋아나더니 다시 쑥 빨려 나왔다.
“꺼어어어어얽…….”
여자 엘프는 신음을 앓다가 허연 눈자위를 드러냈다.
“젠장, 안 보여!”
곁에 있던 남자 엘프가 바락바락 기함 쳤다. 눈동자를 기민하게 움직여도 인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저기 있었잖아. 근데 왜 지금은 없지? 생사가 달린 의문이 어린 찰나, 칼날이 그의 관자놀이를 후볐다.
푸욱.
반쯤 들어간 사시미가 머리통을 헤집고서 나왔다. 남자 엘프는 제 죽음을 인지조차 못 한 채 죽었다.
“오와 열을 맞춰서 화살을 갈겨! 완드로 무장한 녀석들은 마법을 퍼붓고!”
간부 엘프가 지시했다. 그의 목은 핏줄이 거미줄처럼 솟은 채였다.
“화, 화살. 화화, 화살을 쏴라! 쏴라!”
엘프 무리는 아비규환의 전열을 가까스로 다듬고서 화살을 쏘았다.
피융! 피융! 피융!
마법이 실린 화살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총탄에 버금가는 속도, 환영 마법도 섞여 화살 한 개가 십여 발의 도탄을 그렸다. 셀 수 없이 많은 화살이 장대비처럼 몰아치고, 또 몰아쳤다.
강검마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원거리 공격하는 애들은 항상 내 움직이는 범위를 줄이려고 하더라. 5군단장도, 3군단장도.”
화살 비 탓에 하늘은 일식이 일은것처럼 어두웠다.
“근데 너희 같은 귀쟁이들 공격에 맞을 것 같나.”
강검마는 오른발, 왼발을 쿵-쿵- 번갈아 노면에 심었다. 순간의 어둠이 그의 머리에 녹듯이 내려앉았다.
검은 하늘 아래 검은 인간이 서 있다. 강검마가 차가운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서걱!
칼날이 번뜩였다.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쳐냈다. 어찌나 빠른지 사시미가 지나간 자리에 스무 개의 은빛 잔상이 남았다.
성냥개비처럼 나가떨어지는 화살들. 예리한 화살촉은 피부를 핥아보지도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튀겼다. 강검마 주위로 마치 둥그런 결계가 형성된 것처럼 보였다.
검은 눈동자는 화살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수는 존나게 많지만.’
두 자루의 사시미가 화살대에 그인 붉은 선을 건드렸다.
‘마법을 베어 버리면 그냥 장난감이지.’
마법이 산화하고 화살이 부러졌다.
“무, 무슨……!”
양껏 화살을 낭비하고서야 간부 엘프는 깨달았다. 잘못되어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그는 원거리 공세를 중지시킨 다음, 검을 잡고 몸소 내달렸다.
“나, 그렘필드. 로그 장로님의 오른팔이자 가장 먼저 죽은 내 아우의 원수를 갚아 주- 컥!”
다이쏘 사시미가 나불거리던 주둥이를 터널 개통했다.
“아… 악마 같… 은 새끼…….”
다크 엘프의 덕담. 강검마는 인심 좋게 사시미를 하나 더 던져 주었다.
새로운 칼끝이 먼저 박힌 칼자루의 끝동을 톡- 두드려 밀어내고서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렘필드는 아우보다 나았다. 다이쏘 사시미 x2. 그의 목숨값은 아우의 두 배인 6천 원이었다.
강검마의 아량에 간부 엘프는 감격의 피눈물을 흘리며 죽었다.
다크 엘프들은 석상처럼 굳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과장이 아니라 공기가 서늘했다.
강검마가 산발이 된 머리를 툭툭 털며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장로 엘프를 올곧게 바라봤다.
“안 와?”
장로, 로그가 검지를 들어 삿대질했다. 그 손가락이 바람 앞 고목처럼 힘없이 떨렸다.
“네, 네 이놈. 어째서 발로르 호아킨이 아님에도 그와 같은 힘을 쓰는 것이더냐!”
“내가 그 인간 제자거든.”
“뭐, 뭔?!”
강검마가 눈웃음을 쳤다. 검은 동공엔 각각 살의와 광기가 맴돌았다.
“여튼, 올 생각 없으면 기다려. 내가 갈 테니까.”
강검마의 발이 재차 고랑을 팠다.
“으랴아아아아! 죽어라!”
공포의 관성으로 엘프들도 마주 몸을 날렸다. 강검마가 사시미를 놀렸다. 한 번의 칼질. 대나무처럼 사선으로 썰린 대열이 우르르 무너졌다.
엘프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열렸다. 그들이 마법을 뽐낼 새 없이 강검마가 칼을 휘둘렀다. 열 명분의 고함과 비명이 퍼졌다.
엘프 다섯이 반격을 가했다. 활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서 허리춤에 찬 검을 들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근접전에서 원거리 무기를 고집하는 건 오판이었으니까.
그러나 엘프들은 검날을 한 뼘밖에 뽑아내지 못했다. 팔뚝과 허벅지에 어느새 새겨진 푸른 혈선 때문이다.
중심이 무너진 엘프들이 휘청였다. 그 찰나의 틈. 사시미가 빗장뼈를 차례차례 쪼갰다. 다섯이 죽었다.
후방에 있던 엘프 무리가 마법을 영창했다. 강검마도 그에 맞춰 움직였다. ‘차력의 가호’를 발현, 튕기기 직전의 손가락이 가지처럼 잘렸다.
이어 강검마가 훌쩍 뛰어올랐다. 그가 엘프 무리의 한복판에 내려섰다. 면면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리려다 분산됐다. 사시미가 엘프들의 안구를 더 빨리 훑은 것이다. 바로 다음, 시력을 잃은 엘프 여섯이 절명했다.
강검마는 칼을 더럽힌 피 기름을 바지춤에 닦았다. 미끌미끌한 손은 대충 입가에 문질러 훔쳤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자, 장로님……!”
엘프들이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들의 등 뒤로 칼날이 물 찬 제비처럼 떨어졌다.
서걱!
수적 우위는 무의미하다. 오십 남짓한 엘프는 단 한 명에 의해서 절반이 되었다. 칼질이 계속될수록 그 수는 더더욱 줄어들 것이다.
스겅!
엘프들이 잇따라 죽어 나가는 가운데 장로 엘프가 고개를 떨구었다. 찐득한 핏물이 바닥에 가득했다.
“낄낄낄낄.”
장로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 발로르 호아킨 그리고 라이칸. 그들이 마음을 합쳤다는 건 익히 들었다만, 그 결과물을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미친 듯이 웃던 장로는 한참 난전 중인 검제를 향해 외쳤다.
“니벨룽의 후손이여! 비록 지금 우리 다크 엘프는 멸종을 맞이하겠지만, 두고 보거라! 이 악마의 검은 인과 마를 가리지 않으리라!”
검제는 반만 뒤돌아 강검마를 쳐다봤다. 새치 성성한 눈썹이 모였다.
‘천검… 자네.’
강검마가 엘프를 학살한다. 승기가 넘어왔어도 그의 칼날은 검푸른 살점을 추격했다.
‘저대로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어.’
들은 바 있다. 3군단장 베스나와 대적할 적에 강검마의 머리색이 재처럼 바랬다지. 흔히들 말하는 ‘각성’이었다. 실제로 강검마의 머리 끝동이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나 천검의 각성은 달라.’
정도가 심했다. 사시미는 끝없이 피를 갈구했다. 저대로 두면 두 자루의 사시미는 피아를 가리지 않으리라.
다만 이쪽도 섣불리 다가가기 힘들었다. 드래곤의 마법 덕분에 수월히 상대하고 있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기회를 봐서 접근해야겠군.’
숨소리가 많이 줄었다. 두 다리로 서 있는 엘프가 없었다. 숨이 붙어 있어도 팔다리가 성치 못했다. 그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강검마를 올려 봤다.
누군가는 발악하고, 누구는 엉금엉금 기었다. 또 누구는 최후의 최후까지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들 모두가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죽음.
“하…….”
강검마가 눈을 감았다. 눈 주위가 뻑뻑했다. 비린내로 코끝이 찌르르르 떨렸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곤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방해물이 많았다. 발아래에 뼛조각과 피 찌꺼기가 돌부리처럼 걸렸다. 툭 치고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걸음이 이어질수록 머리는 흑색을 되찾았다.
저벅.
강검마가 장로 앞에 섰다. 장로는 이마를 감싸며 낄낄거렸다. 그 이마는 물로 흥건했다.
장로를, 강검마는 물끄러미 내려 보다 입을 열었다.
“제정신인 거 안다.”
“…….”
웃음소리가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