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1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16화(215/300)
216화 말보다는 사시미
장로 엘프, 로그는 눈을 내리깔고 강검마의 신발만 보았다. 고개를 들 엄두가 안 났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다.’
인간으로선 꿈꿔 볼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장로였다. 죽음의 공포는 벗어난 지 오래였다. 오히려 사는 게 슬슬 지겹기까지 했다. 이젠 삶의 목적도 방향도 없었다.
그런 닳디닳은 노괴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다. 바싹 마른 수건을 꽉 비틀자 물이 나오는 격이었다. 발치 앞의 괴물, 강검마가 장로의 트라우마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시조의 영웅에게 당했던 깊은 굴욕감. 그 모멸을 로그는 몇백 년을 거슬러 다시 느끼고 있었다. 발로르 호아킨의 제자를 자칭한 인간에게 말이다.
‘발로르 호아킨과는 다르다.’
천검 강검마. 그는 아직 시조의 영웅과 비교해선 약했다. 고금 최강이라 불리는 1군단장 라이칸을 베어 버린 인간이 발로르 호아킨이다.
강검마는 분명 강하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발로르 호아킨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군단장 쿠아른 선에서 처리될 수준이다.’
강검마는 아직 제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조의 영웅과 동수를 이루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마족의 직감이 세차게 경음을 알렸다. 이 소년은 장차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가 되리라.
“야.”
눈가를 문지르던 강검마가 말했다. 1분 가까이 ‘검신의 가호’를 사용한 탓에 눈이 뻐근했다.
“미친 척은 다 했나.”
“…….”
강검마가 쭈그려 앉아서 장로를 쳐다봤다. 로그의 주름진 얼굴이 푸들푸들 경련했다.
그러는 사이, 검제와 혼 쪽의 상황도 정리되었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로그가 붙잡히자 나머지 엘프들이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무기를 내려놓은 엘프들은 머리 뒤로 손을 깍지 끼고서 무릎 꿇었다.
그제야 검제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강검마를 말렸다.
“천검! 잠깐, 기다리게!”
강검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검제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바로 죽이진 말게나. 그리고 저기를 좀 보게. 남은 엘프 수도 스물이 안 될뿐더러, 그조차도 전부 투항했네. 그러니 쓸데없는 살육은 더 이상…….”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장로 엘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죽일 생각이 없다고?
강검마가 끝말을 맺었다.
“아직은요.”
‘무통의 가호’ 시간을 초과해 더는 ‘검신의 가호’를 발현할 수 없다. 죽인다 해도 뒤처리는 검제나 협회 쪽에 맡길 생각이었다.
‘마무리가 깔끔한 건 좋지만, 고통을 참으면서까지는 딱히.’
게다가 이 늙은 엘프는 사장님에 대해서 뭔가를 아는 기색이었으니. 그뿐인가. ‘다섯 번째 편린’. 이 하와이섬 어딘가에 있을 편린도 찾아야 했다. 마경 게이트 주변은 다크 엘프의 영역인 만큼 지리를 훤히 알고 있을 터.
‘어차피 얘네 중 몇 놈 살려서 길잡이를 시키려 했는데.’
장로 엘프면 길을 잘 알겠지. 이것저것 따져 봐도 당장은 살려 두는 게 좋았다. 물론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처리하겠지만.
강검마는 시선을 내렸다. 이 늙은 다크 엘프의 손가락부터 자르고 시작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백정도 아니고 신체 부위를 건드는 건 좀 그랬다. 자르면 그냥 목을 자르고 말지.
“차… 차라리 죽여라!”
로그가 내지른 말이었다. 장로 된 엘프로서 마지막 저항이었다. 아직 다크 엘프들이 몇몇 살아 있었다. 갈 땐 가더라도 체면치레는 해야 했다.
“내 단칼에 죽을지언정 네놈들에게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겠다!”
“…….”
강검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꼭 대화로 하려고 해도.’
항상 이런 식이었다. 마족이나 빌런은 말로 해선 한 번에 알아듣지 않았다.
‘역시 말보다는…….’
강검마는 한숨을 내쉬고서 오른팔을 옆으로 뻗었다. 모두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
“으어어어억…….”
상한 생선처럼 퀭한 눈. 부자연스러운 움직임. 목구멍을 관통한 다이쏘 사시미.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측근 엘프가 일어난다. 비칠비칠 좀비처럼.
장로 엘프의 눈길은 갈 곳을 잃었다. 그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가렘필드… 어째서… 아니… 이게, 무슨…….”
장로 엘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됐다. 천 년 가까이 살았어도 이런 건 보도 듣도 못했다. 시체가 살아나다니? 강검마, 이자는 정녕 악마라도 되는 건가?
안색이 새파래지긴 검제와 성 부장, 자리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명왕의 권능’을 보기는 처음이었으니까. 경험자인 혼도 어깨를 움츠렸다.
‘두 번 봐도 섬찟한 능력이야…….’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강검마가 뻗은 손을 허공에서 저었다. 그러자 측근 엘프- 언데드가 돌처럼 굳었다. 비유가 아니었다. 발바닥부터 석화된 측근 엘프는 한 점의 석상이 되었다. 그걸 보며, 혼은 등허리가 차가워졌다.
‘석화의 마안……!?’
바실리스크를 처단 후, 무라사메를 강화해 얻은 권능이다. 칼로 찌른 대상을 석화시키는 능력. 다만 조건이 몇 개 붙어 있어 실사용은 까다로웠다. 꽝이라 생각해서 묵혀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쓸 줄이야.
‘능욕하는 것 같아서 찝찝하지만.’
이 늙은 엘프한텐 공포를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충격 요법이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강검마가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장로 엘프를 봤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고들 하는데, 너도 지금 봤잖아. 나는 죽었던 놈도 잠깐이나마 살릴 수 있다.”
강검마는 목을 좌우로 스트레칭했다.
“굳이 귀찮게 산 놈들이랑 투덕거리느니 이렇게 부활시켜서 물어보면 돼.”
당연히 구라였다. 권능으로 되살린 시체는 시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저만의 상상 나래를 펼칠 것이다.
“저기 살아남은 다크 엘프를 차례차례 목을 치고서 살린 다음, 물을 수도 있다, 이 말이지. 하지만 난 너한테 협상의 여지를 주고 있는 거 고.”
“…….”
“선택해. 우리에게 순순히 협조하면 너를 포함한 네 동족은 살려 주마. 물론 영웅 협회 감옥에 끌려가긴 하겠지만.”
“…죽인 놈도 살린다면서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짧게 대꾸했다.
“자비.”
장로 엘프가 이를 깍 깨물었다. 강검마가 눈썹을 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협상의 기회를 제 발로 차고 싶다면. 거기, 그… 영웅님?”
“아, 저 말씀이십니까? 천검님.”
“예.”
강검마는 엉거주춤 서 있던 남자 영웅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남자의 무장은 망나니가 쓸 법한 대검이었다.
“장로가 침묵하는 1분당 다크 엘프 한 명씩 목을 치세요.”
“그, 그치만…….”
남자는 머뭇거렸다. 투항한 적을 참수하라니. 이게 맞나 싶었다.
강검마가 호령처럼 지시했다.
“이건 칠성으로서 말하는 겁니다. 명령 불복종할 거면 징계를 각오하시고요. 그리고 영웅님도 보셨잖습니까. 전 분명 기회를 줬습니다. 그런데도 이놈이 거절하는데 저라고 별수 있나요.”
“아…….”
“다크 엘프들이 협조할 거면 몰라도, 그럴 생각이 없다면 결국 후환이 될 겁니다. 독이 바싹 오른 마족들이 뭔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자칫 ‘광폭화’해서 추가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 그러니 그 전에 싹을 자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엘프에게 다가갔다. 대검을 번쩍 추켜올렸다.
“천검님의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장로 엘프가 반쯤 정신을 잃고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놈은 바닥을 치며 엉엉 울었다. 결국 마음이 꺾인 것이다.
강검마는 무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째 내가 악당이 된 것 같군.’
어쩔 수 없다. 인간과 마인,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 두 종족은 각자가 서로의 악당이다. 혼처럼 예외적인 케이스도 있지만 그건 혼이 특이한 거다.
뭣보다 다크 엘프는 식인을 즐긴다. 식인종이야 마족 중에선 흔하다지만 다크 엘프들은 그 수법이 야비하다. 상냥한 얼굴로 다가가 경계심을 허문 뒤, 습격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커뮤니티에서 본 바로는 2차 인마대전에서 인류 측에 붙어먹다가 뒤통수를 친다지. 괜히 ‘얍삽한 귀쟁이’란 수식어가 꼬리 붙은 게 아니었다.
“협조하겠네…….”
장로 엘프가 흐느끼듯 말했다. 잠시간 만에 그는 200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강검마는 그런 그를 보다가, 대검을 든 남자에게 끄덕였다. 남자도 마주 끄덕이곤 손을 내렸다. 우악스러운 대검이 참수 직전까지 간 엘프, 그 바로 옆에 꽂혔다.
강검마는 나무둥치에 털썩 앉았다. 장로 엘프가 앉았던 자리였다.
“그럼.”
강검마가 사시미에 묻은 피를 닦았다.
“이제 진짜 협상을 시작하자.”
* * *
노을이 지평선 자락에 걸리는 늦은 오후.
검제는 멍한 눈으로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 부장이 그런 그에게 절뚝절뚝 다가갔다. 의족이 완전히 익숙하진 않은 탓이었다.
“검제님. 다크 엘프들의 포박을 전부 끝냈습니다.”
“수고했네.”
“수고는 무슨요. 이런 뒤처리는 저희 영웅 협회 담당 아닙니까. 고생은 검제님이나 천검님께서 하셨지요.”
겸양이 서로 오가고서 대화의 주제가 넘어갔다.
성 부장이 성과를 보고했다.
“다크 엘프들의 무기를 전부 수집해서 선별해 본 결과, 인계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 소재로 되어 있었습니다. 처분하면 값이 상당히 나갈 것 같습니다.”
“흐음.”
검제의 상념은 짧았다. 그는 바로 말했다.
“절반은 협회에서 보관하고, 나머지 반은 처분해서 천검한테 입금하는 게 어떤가.”
“아, 에! 예. 협회 규정상 마수나 마인을 토벌해서 나온 것들은 영웅 당사자에게 귀속되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협회 차원에서 처분해서 천검의 계좌로 보내 주게. 칠성에 있으면 이것저것 은근히 돈이 많이 빠져나갈 거야. 이런 소소한 용돈벌이도 있어야지. 대략 얼마쯤인지 알 수 있나?”
성 부장은 생각했다. 소소한 용돈이라기엔 어마어마한 액수일 텐데.
“지금 계산해 보겠습니다.”
성 부장은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내 계산기를 두드렸다. 기다란 숫자가 망막에 맺혔다.
“…천검께 입금될 금액은 대략 한화 316억이군요.”
“적군, 천검이 우리 목숨을 살려 준 것에 비하면 말이야.”
검제는 껄껄 웃고서 초저녁 하늘로 시선을 두었다. 아스라한 심홍색이 노인의 얼굴에 스몄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강검마, 그리고 인간의 탈을 한 드래곤. 이에 관해 검제는 묻고 싶은 게 목까지 차올랐다.
상황이 진정되면 강검마에게 설명을 부탁하려 했다. 그러나 끝내 그러지 않았다. 드래곤부터 시체 되살리기, 석화. 물어야 할 질문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래서 궁금증은 접어 두고 결과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해 줄 테지.’
문득 협상에 임하던 강검마의 모습이 스쳤다. 그는 엘프들한테 모든 정보를 탈취했다.
퍼머쉬가 언제쯤 나타나는지, 게헤나 게이트 주변에 특별한 장소가 없는지, 마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러면서 정작 내어 주는 것은 감옥에서 콩고기를 제공한다는 게 전부였다. 엘프는 원래 채소나 과일만 먹어야 한다면서…….
다크 엘프들은 찍소리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말만 협상이지 놈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당시 상황을 돌이키며 검제는 탄식을 흘렸다.
“공포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협상이라…….”
혼잣말을 덧붙였다. 이 나이 들어서, 소년에게서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고.
검제는 실없이 웃곤 걸음을 옮겼다. 강검마가 쉬고 있을 임시 초소를 향해서.
“천검이 내일 꼭 들러야겠다던 장소.”
그곳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