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1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19화(217/300)
219화 네피림 신전 (2)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저 백의를 입은 존재가 소개한 이름. 그에 경악을 느끼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쿠, 쿠, 쿠아른이면……!”
뒤늦게 정신이 든 에드워드의 낯빛이 창백하게 죽었다. 맹하게 있던 혼도 파르르 눈썹을 떨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얀 존재는 사뿐사뿐 계단을 밟고 내려온다.
2군단장 쿠아른. 마왕군의 수괴이자 마경 게헤나의 절대자. 저자는 현재 자신을 인류의 거악이라고 소개했다.
사고의 흐름이 뒤죽박죽 엉켰다. 2군단장 쿠아른? 정말인가? 정말이라면 어째서 인계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신관 행세나 하면서? 설마 이 모든 게 장로의 계획이었나?
퍼뜩 고개를 돌렸다. 장로가 정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경련하고 있었다. 너무도 큰 충격에 빠진 것이다.
“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 있으신 겁니까!? 군단장급 마족은 인계에 올 수 없을 터!”
장로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얼굴 위로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차올랐다. 공포, 불안, 공황, 경악.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장로도 결백하다는 것이. 또한 저 백의의 사내가 2군단장이란 사실도 말이다.
하얀 존재, 쿠아른이 옅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진정하세요, 다크 엘프의 장로여. 이 몸은 본체가 아닙니다. 제 힘의 일부만을 잘라 내어 만든, 이를테면 분신 같은 것입니다.”
쿠아른은 우리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나 저 한없이 인자한 목소리는 영혼을 할퀴는 것만 같았다.
계단의 중간까지 내려온 쿠아른은 거기서 걸음을 멈췄다. 이제야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되는 중성적인 외모. 목소리로나마 그가 남자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언뜻 보면 그냥 인간 남성처럼 보였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색된 것처럼 전신이 온통 백색이었다.
더해 흩뿌리는 순백의 안광, 무기질적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저자가 인외의 존재라는 사실을 머리에 새겨 주었다.
인간과 몹시도 닮은 모습에 되레 불쾌감이 일었다. 비유하자면 밀랍 인형이 걸어 다니는 듯한 기괴함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것과 비슷한 존재와 마주한 적이 있다.
과거, 고대인을 멸종시키려 했던 천사들. 쿠아른의 외형은 그놈들과 몹시 유사했다. 백의 대신 날개만 퍼덕이면 딱 그 비둘기들이었다.
쿠아른이 미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신관분은 잠시 자리를 비우신 상태라, 제가 대리를 맡고 있을 뿐입니다. 엘프의 장로는 알겠지만, 원래 신관은 인간 여성 아닙니까. 그녀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고 신전은 늘 누가 지켜야 하니 제가 그 역할을 하는 것뿐이죠.”
“이유가 어떻든 군단장이 인계를 침범하다니!”
에드워드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등에 업던 대검을 꺼냈다. 뭉툭한 검극이 2군단장을 겨누었다.
“이것은 엄연히 인마 협정 위배다!”
흑곰 에드워드의 사나운 외침. 위기와 당면한 인간은 용력을 끌어 올려 무장을 쥐었다. 과연 워리어급 영웅의 기백이라 할 만하다.
“방금 말했다시피 이 몸은 본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협정 위배도 아니죠.”
쿠아른이 말했다, 권태감마저 느껴지는 무심한 눈빛으로. 워리어급의 기개조차 쿠아른에겐 조금의 자극도 주지 못했다.
“뿐더러, 저는 전투력이 실오라기만큼도 없답니다. 이 자리에서 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쿠아른이 스스로의 무해함을 주장했다.
“저 개소리, 진짜야?”
내가 혼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침을 삼키고서 무겁게 끄덕거렸다.
“…네, 정말이에요. 아까부터 계속 마력 감지 중인데 느껴지는 마력이 정말 없어요. 마력을 숨기거나 하는 것도 아니에요. 저건 정말 껍데기에 불과한 몸입니다.”
쿠아른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당겨 웃었다.
“이제는 좀 믿어 주시겠습니까, 용맹한 영웅이시여?”
“용맹한 영웅……?”
에드워드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무려 마왕 군의 수괴가 직접 치하하는 것이었다. 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기뻐해야 하나?
“다만 개인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심심한 위로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 네피림 신전에서 당신은 그릇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쿠아른의 말을 들은 에드워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더니 그의 안색이 대번에 사색이 되었다.
“자, 자, 잠깐만!”
절박함이 섞인 단말마. 에드워드의 흉부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생기더니 블랙홀처럼 몸을 나선으로 빨아들였다.
비명과 절규, 파육음, 피 냄새.
에드워드가 머물던 자리엔 죽음의 잔향만이 맴돌았다. 워리어급 영웅은 생전의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소멸했다.
손쓸 새도 없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사달이 났다.
네피림 신전은 선악의 구별이 없는 공간. 인간이든 마인이든 율법을 어긴 자는 엄히 벌한다.
쿠아른이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신전의 첫 번째 규율, ‘무슨 일이 있어도 무기를 꺼내면 안 된다’. 그 가장 기본적인 것을 위배하다뇨. 부디 다른 분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쿠아른은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평정심을 잃은 에드워드 스스로가 자초한 죽음이었다.
“…씨발.”
다섯 번째 편린을 찾고자 신전에 왔다. 목적은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인류 최대의 적이 불쑥 나타난 상황. 한데도 칼자루도 깔짝일 수 없다. 무작정 사시미를 뽑아 들 시 어떻게 될지는 에드워드가 죽음으로 증명했다.
나는 장로를 곁눈질했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고 있었다. 혼 이상으로 그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야 인간의 앞잡이를 하다 마족의 우두머리한테 들켰으니. 피로 적셔진 미래가 눈 앞에 아른거리고 있겠지.
그 마음을 아는 듯, 쿠아른은 장로를 보며 히죽 미소 지었다.
“아… 아…….”
장로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의 윗니가 늙은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피 맛이 입안에 돌아다녔다.
장로는 생각했다. 갖은 치욕과 굴욕을 견디며 이곳까지 온 이유가 무엇인가.
‘이 모든 게 다크 엘프의 존속을 도모하고자 함 아닌가!’
이 검은 악마, 강검마의 손에 멸족할 뻔했지만 스물 남짓의 엘프가 살아 있다. 그들만큼은 살려야 한다. 장로의 염원은 오직 그 하나였다.
늙은 마인은 두뇌를 굴렸다.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묘수, 순간의 잇속을 재빨리 계산했다. 영악하기로 유명한 다크 엘프, 그중에서도 수백 년을 장로로 있어 온 로그였다.
어느 쪽에 붙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결론에 도달한 장로는 망설임 없이 강검마 뒤에 딱 붙었다.
쿠아른이 미간을 좁혔다. 나란히 모인 흰 눈썹. 이내 그는 어이없다는 실소를 흘렸다.
“같은 마족을 배신하고서 인간에게 붙은 그 선택. 거기에 후회는 없겠지요?”
“없소.”
거짓말이었다. 2군단장의 강함을, 로그는 절절히 알고 있었다. 그가 시전하는 공(空) 속성 마법은 그야말로 파멸적이었다.
강검마가 날고 기어 봐야 아직은 저 초월자에겐 잽도 안 된다. 쿠아른과 마주친 장소가 네팔림 신전이라서 천만다행이었다. 마경이었으면 전원 파리처럼 몸이 터져 나갔을 테니까.
‘하지만.’
비록 일족의 대부분을 학살한 저주스러운 인간이었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장로는 강검마에게 다크 엘프의 명운을 걸었다.
엄밀히 말해 깅감미의 잠재성에 건 도박이었다.
그 저력을 끌어낼 수 있다면? 2군단장은 물론이거니와, 1군단장도 아래에 두리라. 이는 쿠아른도 분명히 아는 사실. 추측건대 저 악마가 신전에 나타난 건 그 때문이겠지.
사전에 그 불상사를 막고자 어디서 진짜 신관을 죽인 뒤에 가짜 행세를 하는 것. 만약 그렇다면… 쿠아른은 용서받지 못할 악질이었다.
신관을 죽인 죄는 마족의 신망을 잃기에 충분했다. 제아무리 2군단장이어도 말이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군요.”
그때 쿠아른의 안광이 살벌한 빛을 뿌렸다. 장로는 순간 몸이 졸아붙는 걸 느꼈다.
“그래도 선택에 후회가 없다니 다행입니다.”
쿠아른이 비틀린 입술로 씹어 뱉었다.
“훗날 미련 없이 다크 엘프를 몰살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다.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장로 엘프는 등 뒤로 숨고. 생각해 보니 나 빼고 전부 마족이었다. 뭐, 혼은 거의 인간이니 열외로 봐야 하나.
‘지랄 났네.’
슬슬 충격도 가셨겠다 난 신전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내가 짜증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2군단장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신관 대행이라며. 가오는 그쯤 잡고 본업에 충실하시지.”
중요한 건 쿠아른이 나타났다는 게 아니었다. 놈이 전투 의사가 없다는 거였다.
혹시 모를 일이다. 저놈이 진짜 신관 대행일지.
아니라고 해도 아무렴 어떤가. 나는 내 용무만 마치고 바로 자리를 뜨면 된다.
물론 에드워드의 복수는 값을 제대로 치러 줄 생각이다. 지금은 아니고 다음을 기약해야겠지만.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쿠아른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따라오라 손짓했다.
“따라오시지요. 당신의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릴 테니.”
여전히 인자한 말투. 따라가기 직전에 나는 놈을 한번 떠본다.
“쿠아른, 네 형제가 내 손에 목이 떨어진 건 잘 알겠지.”
“잘 알다마다요.”
쿠아른은 갈무리한 감정을 언어로 내뱉었다.
“하지만 조금도 슬프지 않습니다. 그런 쓸모없는 녀석들이 당신의 양분이 되었다는 게, 오히려 기쁩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네피림 신전에서 하시죠.”
* * *
그 시각, 어두운 대강당.
은발의 여인, 유세인이 두 손을 마주 잡고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세인의 꿇린 무릎 아래로는 카펫이 땀으로 축축했다. 새하얀 예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반쯤 투명했다.
곧 질끈 감은 세인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그녀는 슬며시 눈을 돌렸다.
시선이 닿는 곳엔 금발의 사내가 대리석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굳게 낀 팔짱 위, 어둠에 잠긴 상반신이 보였다.
세인은 금발 사내를 차갑게 흘겼다.
“네가 왜 여기에 온 거임?”
금발은 팔짱 낀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성녀가 하는 일은 뭔지 궁금해서 들렀어.”
단정한 목소리. 하지만 세인의 귀엔 시비조로만 들렸다. 애당초 세인은 저 위선자가 이 신성한 장소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세인이 일갈했다.
“하긴, 마경에선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게 신기할 만도 하지.”
금발의 표정에 미동이 일었다. 암흑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으나 세인은 느낄 수 있었다. 저 녀석은 명백히 격분하고 있다는 것을.
“…내 고향이 어딘지는 입에 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금발 사내의 위협 조에도 세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비웃으며 맞받아쳤다.
“네 정체와 출신지를 숨겨 준 것만으로 나는 해 줄 만큼 해 줬다고 생각함.”
“…….”
금발이 팔짱을 풀고서 터벅터벅 어둠에서 걸어 나왔다. 금가루를 뿌린 듯한 머리 아래 동공이 짙푸른 빛으로 번뜩인다.
칠흑이 갈라지며 사내가 얼굴을 드러냈다.
“안 그래?”
세인은 사내를 마주 응시했다.
“레온 반 라인하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