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20)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18화(297/300)
218화 네피림 신전 (1)
날이 밝고 우리는 바로 신전으로 향했다.
이번 여정의 일행은 나와 혼, 길잡이 역할의 장로 엘프, 그리고 다크 엘프를 참수하려다 만 남자 영웅 이렇게 넷.
남자는 협회 소속의 워리어급으로, 이름은 에드워드. 흑곰(黑熊)이란 이명의 영웅이었다.
참고로 검제와 성 부장을 대신해서 에드워드가 함께한 것이었다. 그들은 남은 다크 엘프 잔당을 관리해야 했거니와, 목적지 또한 신전인 까닭이었다. 네피림 신전은 무력 투쟁이 일어날 일 없는 성역이니까.
신앙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마족도 거기서만큼은 잠자코 있단다. 그 부분에 대해선 어제 검제가 말하기도 했고, 길잡이인 장로 엘프도 단언했다.
인류와 마인 모두가 입 모아 말했다. 적어도 신전 내에선 분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신전 밖에서는 어떨지 모를 일이지만 워리어급인 에드워드가 동행한다. 웬만한 기습은 그 선에서 정리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둘, 마인 둘이라는 기묘한 반반 조합이 꾸려졌다.
저벅, 저벅.
네피림 신전까지 걸어서 이동한다, 혼이 어제의 전투에서 마력 대부분을 끌어다 써서 드래곤 변신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상공을 나는 드래곤은 너무 눈에 띄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기에.
장로 엘프의 길 안내를 따라 조용히 이동하는 게 외려 좋았다.
“여기서 이백 보 정도만 더 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되오. 그러면 거대한 침엽 나무가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쭉 가서…….”
장로 엘프가 포승줄로 묶인 두 손을 들어 설명했다. 이에 에드워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내게 속닥였다.
“천검님, 저 귀쟁이 녀석 왜 이렇게 고분고분한 겁니까? 혹여 도망치거나 하진 않겠죠? 아니면 신전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유인하거나 그런 거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일은 아마…….”
앞쪽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장로 엘프가 앞만 보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뭐여, 이걸 들었어?”
에드워드가 흠칫 놀랐다. 장로 엘프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보고 맨날 귀쟁이라고 하지 않소? 그에 우리도 이름값을 하는 것뿐이지.”
“…….”
“생각해 보시오. 내가 도망치면 살아남은 일족들이 전부 목이 달아날 텐데, 미쳤다고 그러겠소? 장로 된 자로서 그럴 순 없는 일지. 그럴 바엔 스스로 목숨을 끊겠소.”
에드워드가 되물었다.
“도망은 안 친다고 해도 우리를 이상한 장소로 안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마 해 떨어지기 전까지 그쪽이 연락되지 않으면 본대의 인간들이 그 나름대로 조처를 할 터. 그렇게 되면 또다시 다크 엘프들이 곤란해지겠지. 내가 모를 것 같소?”
장로의 말에 나는 내심 감탄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말만 장로가 아니라, 통찰력이 좋은 편이군.’
장로 엘프는 한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의심하는 건 자유지만 나한테 선택권이 없다는 것 정돈 알고 있지 않소. 그러니 빨리 일을 마치고 복귀하는 데 집중하시오. 나 역시 동족을 학살한 인간들과 같이 있으려니 창자가 뒤집히는 것 같으니.”
장로가 가던 걸음을 마저 옮겼다. 아르노가 턱수염을 슬슬 쓸면서 중얼거렸다.
“마인 주제에 인간 말은 기막히게 하네. 하여튼 저놈들 속내는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안 그렇습니까, 천검님?”
“뭐, 뒤통수칠 생각은 없다는 건 확실하잖습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감시 좀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천검님께선 어느 상황에서든 신중하십니다. 본받겠습니다.”
에드워드의 두 눈에 존경심이 비쳤다. 그가 내게 척 경례를 올렸다.
“존명!”
에드워드는 장로에게 바싹 붙어 그를 감시했다. 장로는 불편하다는 기색이었지만 별말 없이 걸음을 이었다.
에드워드 저 아저씨, 슬슬 캐릭터가 잡히기 시작한다. 정의와 파이팅이 넘치는 열정 마초였다. 무장도 큼지막한 대검이니 어울린다 싶다.
‘장로를 의심하는 거 보니까 완전 근육 뇌 속성은 또 아닌가 보네.’
나는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이 두리번거리며 사주 경계를 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갸웃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검마 님?”
“아니 그냥 고마워서. 무턱대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군말 없이 따라와 줬잖아.”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섭섭한 말씀을.”
…우리 사이.
‘인간과 마인은 번식 활동이 가능하다네.’
불현듯이 검제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지.
내가 말이 없자 혼이 반대로 목을 기울였다. 그녀의 옆머리가 어깨 위로 흘렀다. 귀를 마법으로 바꾸니 외모도 영락없는 인간의 그것이다. 거기에 그동안의 영양 상태를 반영하듯 머릿결은 곱고 피부는 매끈했다.
전엔 삐쩍 곯아서 몰랐지만, 지금 보니 혼은 대단한 미소녀다. 미인이 자갈처럼 많은 이 게임 속 세상에서도 드문 미모였다. 미인의 기준점인 아벨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 그녀가 본격적으로 아카데미를 다니면 남생도들이 줄을 설 장면이 절로 그려졌다.
‘이런 애랑 같은 텐트에서 잤다니.’
나는 멋쩍게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러자 혼은 반대로 목을 기울이더니 돌연 얼굴을 들이댔다.
“검마 님, 얼굴이 빨개지셨는데 어디 몸 안 좋으세요?”
“그, 뭐야, 하와이 날씨가 좀 더워서.”
“초겨울이라 좀 추운 날씨인데……. 아! 검마님은 저희 드래곤과 달리 인간이셔서 체온이 높으시군요! 혹시 괜찮으시면 체온 교류하실래요?”
“괜찮아.”
체온 교류가 뭔진 몰라도 일단 거절했다. 어감이 너무 그렇다.
혼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리더니, 다시 후방 경계를 섰다.
두 시간쯤 걸었을 무렵, 우리는 한적한 공터를 발견했다. 내가 말했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죠. 아침도 안 먹고 왔으니까 점심도 먹고 가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 준비는 제가 하겠습니다!”
에드워드가 빨빨 움직이며 식사를 준비했다. 대검을 우악스레 휘둘러 장작을 패어 불을 지폈다. 곧바로 잽싸게 어딘가로 가더니 계곡물을 길어 왔다.
에드워드는 고작 몇 분 만에 임시 야영지를 뚝딱 만들어 냈다.
어째서 성 부장이 에드워드를 추천했는지 짐짓 알 만했다. 그의 행동력은 신속 정확 능숙,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내 에드워드가 완성한 요리를 내왔다. 육포와 뿌리채소로 끓인 죽이었는데, 냄새가 제법 그럴싸했다.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죽을 정성스레 덜어 주었다.
“먹어 보십쇼, 천검님.”
“감사합니다.”
한 숟갈 떴다. 쿰쿰한 노린내가 나긴 해도 맛이 썩 괜찮았다. 혼도 입에 맞는지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죽을 한 국자 퍼다가 장로에게 내밀었다.
“먹어라, 귀쟁이.”
장로는 멍하니 에드워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포박된 두 손으로 고기죽을 낚아챘다.
“잘 먹겠다.”
짤막한 감사. 장로는 접시째로 죽을 벌컥벌컥 마셨다. 에드워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진장 잘 먹는군.”
“우리 다크 엘프는 미식을 즐기지.”
장로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에드워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식인을 자행했나? 그놈의 미식 때문에?”
“인간들도 여러 고기를 먹지 않소? 소, 돼지, 닭, 양. 우리는 거기에 인간이 추가됐을 뿐이오.”
“우리 인간은 마족을 먹지 않아.”
“누가 먹지 말라고 했소?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마족이나 마수를 사냥해서 잡수시오.”
“야만적인 놈들. 쯧.”
에드워드는 혀를 찬 후 홱 등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로는 열심히 고기죽을 퍼먹었다.
식사가 끝났다. 막간의 휴식 시간, 나는 바위에 앉아 한숨을 돌리는 중인 장로 엘프한테 다가갔다.
“장로.”
장로 엘프는 내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내 손이 사시미를 더듬자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가 축 낮아졌다.
“왜 그러시오…….”
“네가 어제 말한 거, ‘발로르 호아킨과 라이칸이 힘을 합친 결과물’. 그거 무슨 소리야?”
내 질문에 되레 장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스승이 발로르 호아킨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것이지?”
“내 스승이 그런 대단한 인간인지 얼마 전에 알게 됐거든. 근데 지금은 사정이 생겨서 그 인간을 만날 수가 없어서.”
장로의 눈빛에 의아함이 짙어졌다. 머릿속이 혼란한지 무어라 웅얼거리며 생각을 나열했다.
“발로르 호아킨이 자신이 시조의 영웅인 것을 숨겼으며… 라이칸의 존재마저 숨겼다…….”
그렇게 잠시, 장로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대답해 줄 건 아닌 것 같소.”
“……?”
“어차피 가는 길 아니오? 거기 가면 나보다 더 정확한 대답을 해 줄 분이 계시오.”
장로가 묶인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질질 끌 것 없이 가서 확인하라는 의미였다.
“우리가 가는 곳은 신전 아니오? 그러면 당연히 신탁을 내려 주실 신관이 있겠지. 그분이 그대의 의문에 답해 주실 거요.”
* * *
걸어 이동하길 몇 시간. 우리를 이끌던 장로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목만 뒤로 꺾더니 나지막이 입을 연다.
“다 왔소.”
장로가 시야가 막힌 울창한 숲 방향을 눈짓했다. 에드워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들만 빽빽하게 서 있을 뿐, 신전이라 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날카롭게 장로를 쏘아보았다.
“신전이 어딨다는 거지? 아니면, 우리를 속인 건가, 귀쟁이?”
장로 엘프가 이죽거렸다.
“아까는 나보고 야만적이라고 조롱하더니, 내 눈엔 그쪽이 더 야만적으로 보이는구먼. 하여간 인간들은 시각에만 의지해서는.”
“뭐, 임마?!”
“성격도 급하긴, 기다려 보시게.”
끌끌 웃으며 장로는 이내 고목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꺼슬꺼슬한 다른 나무들과 달리, 표면이 반질반질해 확 눈에 들어왔다.
장로는 그 고목의 가지 하나를 툭 꺾었다.
쿠구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듯 지축이 흔들렸다. 분분히 흩날리는 나뭇잎이 둥그렇게 우리를 에워쌌다. 온 사방이 녹색투성이였다.
“읔.”
나는 옅게 신음했다. 시야가 한순간에 백금색으로 물들었다. 암순응이 덜 돼서 안구가 아렸다. 혼과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인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차츰 풍경이 드러났다.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게슴츠레한 눈이 곧 크게 뜨였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뒤쪽에서도 탄성이 연달았다. 혼과 에드워드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하늘과 맞닿을 듯이 솟아 있는 계단. 그 끝에는 새하얀 석면으로 지어진 신전이 구름과 같은 높이에서 떠 있었다. 계단이 없었다면 덩그러니 창공을 부유했을 성채(聖砦). 네피림 신전이었다.
판타지 생활 어언 일 년 차에 접어든 나다. 어지간한 일엔 덤덤해졌지만,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고양감이 치솟았다.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또각또각 구둣발이 울렸다. 가늘어진 눈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햇빛이 반사된 건지, 자체적인 발광인지 모를 빛무리를 둘러싼 신형. 태양을 등진 백색의 그림자가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그 존재는 분위기만으로 신성함을 증폭시켰다.
“어서 오세요, 역천이시여. 당신이 오기를 700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미형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렸다.
“제 이름은 쿠아른, 네피림 신전의 신관을 맡고 있습니다.”
하얀 존재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