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25)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25화(223/300)
225화 선생님 (1)
모범생처럼 땋아 내린 연녹색 머리카락과 혈관이 비칠 만큼 흰 피부. 전혀 수선하지 않은 치마는 기장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여기까지는 잘 아는 그녀의 특징이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아주 많이 달랐다.
‘선배……? 하나 선배라고?’
하나 선배는 싱긋 웃고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뒷짐 진 채로 사뿐사뿐 다가오며 묻는다.
“바빠?”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나 선배, 안경은 어디다?”
그렇다. 지금 하나 선배는 안경을 끼지 않고 있다. 단지 그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저리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하나 선배는 수수한 얼굴을 한 소녀다. 얼굴 갖고 뭐라 하는 것 같아 좀 그렇다만, 그게 팩트다. 미소녀들이 숱하게 산재한 아카데미에서 되레 도드라지는 평범한 외모… 였을 터인데.
“아~ 그거?”
하나 선배는 엷게 미소 지으며 치마 주머니에서 슥 안경을 꺼냈다. 그리고 하얀 손가락으로 까닥까닥 흔들어 보인다.
“이거 도수 없는 거야. 왜, 안경 쓴 게 나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별로면 다시 쓸까?”
“아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선배는 눈웃음치며 도로 안경을 넣었다.
“검마, 너도 이미 눈치채지 않았어? 이건 그냥 안경이 아니라는 거. 이건 ‘장막의 거울’이란 아티팩트를 협회에서 가공해서 만든 안경인데, 신분 세탁용으론 성능이 좋거든.”
현재의 난 평소답지 않게 몹시 당황한 상태다. 내 눈이 이렇게 휘둥그레진 까닭, 그건 하나 선배의 외모 변화 때문이었다.
이름은 산하나인데 얼굴은 생면부지인 남이 접근해 오는 것이다.
“협회에서 만든 걸 왜 선배가……? 그것보다 왜 갑자기 맨얼굴을 드러낸 거야?”
“음, 이제 굳이 얼굴을 숨기고 다닐 이유가 없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자면, 취직하러 면접 볼 때도 안경 벗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야!”
취직? 대관절 이게 무슨 말이지? 그보다도…….
‘정신의 격’ 덕에 정말 어지간한 일에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나다. 한데 이 순간의 난 또박또박한 하나 선배와 달리 말을 더듬는다.
‘쿠아른을 만났을 때도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안경을 쓰지 않았다. 단 그 하나의 차이가 사람을 완전히 바꿔 놓았기에. 평범한 외모? 정정하겠다. 저건 평범한 외모가 아니다. 미소녀들이 즐비한 이곳에서도 독보적인 미모다.
세계관 최고 미인 아벨과 어깨를 나란히 한대도 무방하다. 사람에 따라선 이쪽을 더 쳐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달 모양의 눈매와 화사하리만치 긴 속눈썹. 예쁘다는 말은 부족하다. 저 분위기 있는 이목구비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맞았다.
‘왜 저런 얼굴을 안경으로 숨기고 산 거지?’
웬만한 여배우는 저 옆에 서면 안 될 것 같다. 선배한테 주목도를 전부 뺏길 테니까. 배우란 직업이 건사하지 못하리라.
그런 압도적인 미소녀와 난 야밤에 단둘이 있다, 그것도 내 서고 안에서. 저 농염한 입가의 호선 때문인가, 분위기가 야릇하게 치달았다.
또각.
하나 선배가 바로 앞에 섰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책상 폭만큼이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떼었다.
“내 정신 좀 봐. 네가 칠성 영웅 된 후로 처음 보는 건데, 기본을 깜빡할 뻔했네. 미안, 미안~ 나이가 나이인지라.”
하나 선배가 제 머리에 콩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그러곤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호아킨 아카데미의 전대 학원장인 메아인 포이즌, 위대한 하늘이신 천검님을 뵙습니다.”
선배가 슬며시 고개만 들어 올린다. 단아하게 땋은 머리가 그녀의 왼쪽 뺨을 가렸다. 하얀 목을 기울이며 그녀가 나를 본다.
“마왕님이라 불러 드리는 게 나으려나요?”
가슴에 얼음덩어리가 내려앉았다.
* * *
호아킨 아카데미 본관 1층 스타 복스.
시험 기간의 카페답게 저녁 시간대임에도 생도들로 복작거리는 가운데, 구석 테이블에 사키와 웨폰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시험 준비 겸 ‘천 클래스’ 관련 의논 차 온 것이었다.
“흐음.”
웨폰이 턱을 괴고서 멍을 때렸다. 인중에 연필을 끼운 채였다. 그 모습을 보며 사키는 미간을 찡그렸다.
“웨폰, 네가 하도 징징거려서 낮잠도 거르고 온 건데, 정작 본인이 뜬 눈으로 자는 건 뭔 경우야?”
“아, 미안.”
콧잔등에서 떨어진 연필이 데굴데굴 테이블을 굴렀다. 웨폰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잠깐 학원장님 뵙기 직전의 일이 생각나서.”
“학원장님이랑 독대했다고 자랑할 거면 됐네요. 그렇게 부럽지도 않으니까.”
“그것도 자랑하고 싶긴 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사키는 새침하게 뜬 눈으로 웨폰을 째려봤다. 그녀는 빨대로 입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뭔 일이었는데, 말해 봐.”
딱히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이 지루한 시간의 작은 여흥 정돈 될 듯하다. 그 정도의 이유였다.
“그게…….”
웨폰은 말에 뜸을 들였다. 한차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사키 쪽으로 바짝 몸을 기울였다.
“내가 학원장님 실에 도착해서 문을 열기 직전에, 어쩌다 학원장님께서 통화하시는 내용을 듣게 됐거든. 근데 전화 상대가.”
“너 도청하니? 그거 범죄인 거 몰라?”
료조는 어깨를 슥 뒤로 뺐다. 질색하는 기색에 웨폰은 큰소리로 외쳤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 순간 웨폰한테 이목이 쏠렸다.
“…….”
생도들은 날이 바짝 선 눈초리로 웨폰을 가만 응시했다. 손에 쥔 연필들은 흉기처럼 날카롭게 갈려 있었다. 수험 기간의 생도들은 예민하다.
“읔.”
웨폰은 푹 웅크리듯 자세를 낮췄다. 30초가량의 침묵. 그제야 집중된 시선이 뿔뿔이 흩어졌다.
한숨 돌린 웨폰은 홱 옆자리를 노려보았다. 사키가 제 일 아니라는 눈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염병, 진짜.’
들릴 듯 말 듯 하면서도 분노 어린 목소리로 웨폰은 수습에 나섰다.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스피커폰으로 통화 중이셨다고오……!”
“난 또. 그럼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네가 한 말, 남이 들었으면 오해 사기 딱 좋았다는 건 알아둬. 그리고 장차 ‘천검님의 오른팔이 되겠다!’ 하는 애가 그렇게 쉽게 놀라고 소리 내서 되겠어? 방금도 봐 봐, 바로 당황해서 소리 지르는 거. 요직에 있을수록 첫째도, 둘째도 입조심이야.”
뻗치는 열불을 웨폰은 어금니를 꾹꾹 깨물어 삼켰다. 사키가 하는 말은 너무도 올바른 지적이었다, 정말 화나게도. 그녀의 주의대로 앞으론 입과 처신이 바위처럼 무거워야 한다.
“에혀.”
웨폰은 체념한 기색이 되었다. 사키는 그런 그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전화 상대가 뭐.”
“…별건 아니고. …그냥 전화 상대 목소리가 암만 생각해도 낯이 익었거든? 그래서 곰곰이 되짚어 봤지. 그랬더니 어느 순간 알겠더라. 학원장님이랑 격 없이 통화하던 목소리가 누군지.”
사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웨폰의 표정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누구길래, 이렇게 무게를 잡지? 웨폰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나 선배……. 맞아, 하나 선배가 분명했어, 그 목소리. 거기다 학원장님을 ‘우리 둘째 동생~’ 이렇게 친근하게 불렀다니까?”
하늘색 동공이 두 배쯤 커졌다.
* * *
“…….”
황당홤과 당혹스러움이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문자에서도 하나 선배가 추신으로 부연했을 때도 이랬지.
하지만 그때는 내 이름 ‘강검마’를 이용한 농담이라 생각했다.
‘그럴진대.’
산하나, 메아인 포이즌이 입술이 가느다란 곡선을 그린다.
저걸 보니 확신이 든다. 메디아의 쌍둥이가 맞았다. 조금 어린 버전의 학원장님이 지금 선배의 모습이다.
선배는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다시 말한다.
“안녕, 마왕님?”
…다시 들어도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내린다. 냉정함을 붙들기 어려웠다.
“읏챠.”
선배는 폴짝 뛰어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상체만 뒤 돌려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푸하, 너무 ‘그걸 어떻게 안 거지?’라는 표정 아니야? 하기사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긴 하지. 무려 네게 깃든 존재가 마왕이라는 말인데.”
등골이 오싹했다. 정곡, 의표, 핵심 전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애초에 나도 얼마 전에 안 사실을 선배는 일찌감치 알고 있다는 듯 내뱉고 있었다.
“누구한테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러니까 너무 무서운 표정 짓지 말아 줘.”
“…어디서. 아니,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윽! 갑자기 존댓말은 너무 거리감 느껴지는데, 그냥 평소처럼 반말해 주면 안 될까?”
“그럴 수는…….”
기시감이 들었다. 선배가 한 말을 나는 웨폰에게 똑같이 했었다.
“알겠어.”
선배가 웃었다. 흡족한 기색이다.
“사설은 그만하고. 그 이야기, 어디서 들은 거지?”
어조를 높였다. 선배가 전대 학원장이건 뭐건, 경계심을 눈빛에 새겼다. 여차하면 사시미를 빼 들 각오도 했다.
그때 선배가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아무리 함께 오래 했어도 의심해 보는 건 좋은 습관이야! 칭찬할게, 강검마 생도!”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학생을 칭찬하는 선생님처럼.
“두리한테 들어서 알겠지만… 아! 두리는 메디아를 말하는 거야. 아빠랑 나는 걔를 두리라고 부르거든.”
첫째여서 하나, 둘째여서 두리. 그녀의 성씨인 ‘산’은, 순우리말로 ‘메’인 것일 테니- 메 아인, 그래서 산 하나.
‘처음 봤을 적부터 성씨가 범상하다 했더니.’
얼개가 맞아 들어간다. 선배는 거부할 수 없던 손길을 거두었다.
“아무튼, 40년 전쯤에 두리한테 학원장직 넘긴 다음 마경 산책 좀 다녀왔거든. 거기서 꽤 많은 사실을 알게 됐어, 그중 하나가 검마, 네게 깃든 힘이 마왕이라는 거고. 정확한 정보 출처를 물으면 아쉽게도 대답은 못 해 줘. 너무 오래전이라 까먹었거든!”
그녀는 묶인 머리를 풀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민트색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너울거린 건 그다음이었다.
이제야 좀 상쾌하단 표정을 하고서 선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별로 믿진 않았어. 마왕이라니, 어이가 없잖아? 그래서 확인차 몰래 인계로 돌아와서 아카데미에 입학했지. 조금 귀찮긴 해도 난 궁금한 건 못 참거든. 이래 봬도 전직 학원장이잖니?”
선배는 분홍빛 혀를 앙증맞게 빼물었다. 나는 무시하고 채근했다.
“왜 하필 생도 신분이었지? 그 이상한 안경까지 써 가면서.”
“그대로 오면 당연히 두리한테 들킬 테고, 그러면 나한테 다시 학원장을 넘기려 할 거 같아서.”
“교관이나 교수도 가능했을 텐데?”
“금방 들킬 테니까. 생도가 그나마 만만했거든. 두리 걔, 엄청 고지식해서 생도들 정보는 절대 열람 안 하거든. 같은 학원장이었지만, 두리의 생도 사랑은 나도 한 수 접어 준다니까.”
선배는 천진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이완시켰다.
“그렇게 해서 어찌어찌 여행 동아리에 가입하게 됐고~ 겸사겸사 너도 관찰했지. 정말 맞나 싶어서. 근데 세상에, 지금까지만 보면 ‘그 예언’과 딱 들어맞지, 뭐야?”
“예언?”
“아, 방금 건 말실수.”
능글맞기는.
이게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화법인가. 메디아랑 쌍둥이면 선배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란 거니.
“친절하게 전부 말해 줄 생각 없으면 나도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어.”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그것보다, 인제 와서 얼굴 드러내고 나타난 이유가 뭐야.”
선배가 손으로 V를 만들었다.
“두 가지 이유야. 첫 번째는 인류가 2년 안쪽으로 멸망할 것 같은데, 그걸 마냥 좌시할 순 없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아까 말한 거!”
“……?”
“이번에 검마, 네가 창설하는 특별 클래스의 담당 교수로 취직하고 싶어.”
그녀가 정갈한 치아를 드러냈다.
“우리 같은 동아리잖아. 나 빼놓고 하는 건 너무 서운하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