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2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26화(224/300)
226화 선생님 (2)
굳은 표정의 료조가 초저녁의 어둠이 자욱한 복도를 걷는다. 11월의 공기가 싸늘했다. 실내임에도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뽀얗게 피었다.
쿵. 쿵. 쿵.
복도 판석을 때리는 그녀의 발소리가 거칠었다. 웨폰이 손을 뻗었다.
“잠깐만, 사키……! 뭘 그렇게 급하게 가는데!”
“검마한테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아, 아니. 그거 확실한 것도 아니라니까!”
“진심으로 검마를 생각한다면 확실치 않아도 알려 주는 게 맞아.”
“그리고 만약 웨폰, 네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 선배가 보통내기야? 너도 알 거 아니야, 만력 메아인 포이즌.”
료조는 눈썹을 좁혔다.
‘이제야 아다리가 들어맞네.’
일전에 교무진 인사 목록으로 산하나를 추궁했을 때, 료조는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다.
당시는 자신이 부주의했다는 걸 사키도 인정한다.
그땐 너무 날이 서 있었고 언행도 섣불렀다.
누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당시 상황을 누가 봤다면 황당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경솔한 판단을 줄였다.
주변인 한정 쓸데없는 의심은 자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산하나.’
선배의 첫인상은 무색무취.
말투나 성적, 그밖에 모든 행동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하다. 그에 위화감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것도 아직 십 대가 매사에 여상스럽게 딱 중간을 견지할 수 있는 거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말이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료조는 발상을 전환했다.
그 행동거지 모든 게 연극이 아니다.
선배의 정신 상태가 이미 식물 상태인 거라고.
내면이 크게 비틀린 이들 가운데 누구는 감정을 초개와 같이 버리곤 한다.
‘그런 부류가 아주 가까이 있었지…….’
절궁 사키 코지마.
그 역시 가뭄 들린 땅처럼 심상이 메말라 있지 않던가.
산하나에게 느꼈던 꺼림칙함은 료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
누구나 그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사에 초탈할 수 있는 건 상위계의 영웅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각성자라 불리는 영웅들.
가호의 각성과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신을 닮아 간다.
그렇게 신들은 보다 강한 힘을 대가로 감정을 징수한다.
‘하나 선배의 정체가 전대 학원장이건, 그 할아버지 건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형의 마음을 가진 자의 모습이 선배에게서 겹쳐 보였다.
그것 하나만으로 그녀는 고위험군이었다.
강검마에게서 떼어 놓아야 한다. 접근도 원천 차단해야 한다.
‘선배뿐만이 아니야.’
강검마의 주도 아래 사흘 뒤, 개관되는 천 클래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기획이었다.
그래도 분란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료조는 언짢아하는 데서 그쳤다.
그러나 하나 선배가 우리와는 다르다는 정황이 반쯤 밝혀졌다.
‘근거는 웨폰의 말 하나뿐이지만.’
그간의 일들을 숱하게 반추한 료조의 눈엔 확신이 비쳤다.
‘신분을 숨기고 강검마한테 접근했어.’
료조의 강박적인 의심증이 다시금 돋아났다.
한동안 누그러져 있던 의증이 이번 일로 촉발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아벨도, 레이첼도 믿을 수 없어.’
그러니 자신이 강검마의 바로 곁을 지켜야만 한다.
그녀의 검붉은 욕망에 어린 시절의 결핍이 착화해 불씨를 지폈다.
‘같잖지도 않은 년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게끔.’
광채가 아른거리는 하늘색 동공이 빙글빙글 회오리쳤다.
그 뒷모습을 보는 웨폰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쭉 내렸다.
눈치 더럽게 없는 그마저 사키의 발걸음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깐, 잠깐!”
료조의 뒤만 밟던 웨폰이 헐레벌떡 그녀를 앞질렀다. 가쁜 호흡 때문에 토막 난 언어가 뱉어졌다.
“하아, 하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하나 선배가 메아인 포이즌 님이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얼굴도 안 닮았고, 학원장님보다 그 뭐야… 키도 작고 그…….”
웨폰이 머뭇거렸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 료조는 그를 힐긋 곁눈질하곤 한숨을 흘렸다.
“왜, 몸매가 학원장님이랑 다르다고?”
“…윽.”
비수에 맞은 것처럼 웨폰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배덕감에 그는 양심이 따끔따끔했다. 양아치같이 생겼지만, 외모 평가는 몹시 싫어하는 웨폰이었다.
료조는 한소끔 숨을 들이마셨다. 겨울 초입의 공기가 머리를 식혔다. 평정을 되찾은 그녀가 이내 대답했다.
“너, 포이즌 가문이 어떤 곳인지 몰라?”
웨폰은 고개를 저었다. 료조가 약식으로 설명했다.
“포이즌 가문은 고대인의 유일한 후손이야.”
“고대인이면……. 설마.”
“맞아. 수명이 우리와는 몇 배는 차이가 나는 인간. 하나 선배가 전대 학원장님이라면, 메디아 님과 쌍둥이라 동갑이실 테고. 그렇게 되면 나이는 일흔이지만, 외모는 우리 나이로 치환하면 십 대 후반 정도야.”
웨폰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학원장님이 수업 시간에만 들었던 구인류였다고? 료조는 계속해서 말했다.
“참고로 나도 자료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지금 메디아 님도 본 모습이 아니셔. 정확히는 가호로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드신 거지.”
“어째서……?”
“너, 방금 하나 선배 모습 상상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료조의 되물음에 웨폰은 머뭇거리다 답했다.
“가녀리다고…….”
“좋게도 포장해 줬네. 속으로 몸뚱이가 웬 어린애냐고 생각했으면서.”
“으윽.”
“여튼, 네가 말한 이유대로야. 호아킨 아카데미의 학원장임과 동시에 칠성인 영웅이 어린애 같아 봐. 어디 면이 서겠어?”
“…그건 또 그렇네.”
“그러니까 하나 선배가 어린이 모습인 것도 이상한 게 아니란 거지. 게다가 선배의 안경, 내가 볼 땐 그거 예사 안경이 아니야. 분명 신원을 가릴 수 있는 특별한 장치가 숨겨져 있겠지. 웨폰, 너 하나 선배 얼굴 제대로 기억나?”
“어, 당연… 어? 뭐지? 왜 기억이…….”
“너도 알지? 나 절대 기억력인 거. 그런데도 하나 선배 얼굴 나도 기억 안 나. 얼굴을 마주 볼 때는 ‘아,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데, 뒤돌아서면 기억이 안 나더라.”
경청하던 웨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의아함이 팽창했다. 료조가 말했다.
“이렇게 하나 하나 따져 보면 결국 가설은 한 곳에서 수렴해. 적어도 하나 선배는 일반적인 생도가 아니라는 걸로. 선배가 전대 학원장님인지는 차차 알아봐야겠지만-”
그때 하늘색 옆머리 사이로 귀가 쫑긋 섰다. 대화 소리가 귓전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건물 자체가 조용한 탓에 작은 소리도 잘 들렸다.
-…그래서,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검마야?
산하나의 목소리.
-나 정도면 괜찮은… 라고 생각되는데?
료조가 판석을 박찼다.
* * *
선배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다리를 꼬았다.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리고 턱을 받친 자세. 그대로 가까이서 나와 눈을 맞춘다.
사슴 같은 눈망울은 남자한테 치명적이었다. ‘정신의 격’으로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어때, 내 제안?”
선배가 웃으며 속삭였다.
“아직 천 클래스 담당으로 임용된 교수는 없지? 그리고 넌 날 1년 동안 봐 왔잖아. 너는 교수로서 나 어떻게 생각해, 검마야?”
이 여자, 다 알면서 묻는 거다.
“천 클래스의 1 목적이 학업이 아니라곤 해도 생도 된 도리에서 공부는 해야 하잖아. 수업을 내가 진행해 줄게. 나, 가르치는 덴 꽤 소질 있거든. 나 정도면 괜찮은 교육자라고 생각되는데?”
학원장이었는데 소질이 있을 뿐이겠나. 그녀의 식견은 현 교수님들을 가볍게 웃돌 거다.
나는 눈을 감고 미간을 주물렀다. 저 반짝거리는 시선 때문에 혀가 꼬일 것 같았다. 일단 물어나 봤다.
“선배가 담당 교수를 왜 맡고 싶어 하는지 의도는 물어도 안 알려 줄 거고.”
“응!”
…그래, 기대도 안 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가 담당 교수를 맡는다 쳐. 그러면 학원장님이 당연히…….”
“아, 말을 안 했네. 두리도 이젠 알아. 산하나란 가명을 달고서 아카데미에 부정 입학 한 거.”
“…뭐?”
“천 클래스 담당 교수로 지원할 거란 것도! 일주일 전에 전화로 말했거든. 기겁하는 목소리가 어찌나 귀엽던지. 따로 녹음해 뒀는데, 못 믿겠으면 들려줄까?”
사양했다. 그보다 보통 가족이랑 전화하는 걸 녹음해 두나? 둘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관계일까.
감았던 눈을 떴다.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서 선배를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 사람이, 만력 메아인 포이즌.’
이것저것 가지를 쳐 낸 다음, 만력이 어떤 자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인류 최강 전력 검제와 대등하거나 이상의 무력을 보유한 영웅. 전대 학원장. 줄줄이 나오는 타이틀만 해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력 메아인 포이즌이 천 클래스의 담당 교수? 부수적인 것들을 문제 삼지 아니하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지. 문제가 있어도 이견을 내비치지 못할 거다. 피떡이 되긴 싫을 테니 말이다.
‘듣기론, 만력의 손에 몽둥이찜질당하던 영웅들이 꽤 많았다니까.’
능력적으론 흠잡을 구석이 없다. 인성적인 부분은 한때 한 성깔 했다지만, 1년 동안 가까이한 결과 해가 없어 보였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러했다.
상념이 이어질수록 선배를 채용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단순한 정 때문은 아니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신분을 숨기고 접촉한 사람까지 보듬어 줄 만큼 내 도량은 넓지 않다. 반대였다. 나는 만력에게 언짢음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천 클래스는 2차 인마대전을 대비코자 만든 곳이다. 이 목적성을 마족은 금세 눈치채겠지. 그리고 끊임없이 침범을 시도할 테다. 용사와 그 주변인을 시해하기 위해서.
‘그렇게 되면 걔네는 온갖 위협에 휘말리게 될 거고.’
원천 봉쇄한다 해도 놈들은 옹이구멍이라도 찾아 올 거다.
“…….”
암초 같은 위해에서 천 클래스 생도들을 지켜 줄 방파제가 있다면…….
고사리손이라도 빌리고픈 마당 아닌가. 나로선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아니, 더할 나위 없었다.
때문에 하나 선배의 제안은 몹시 솔깃했다. 마음 같아선 반드시 채용하고 싶었다.
‘덥석 받아들이기엔 선배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나는 짧은 고뇌에 빠졌다. 그녀를 떠보아도 대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바쁘게 돌아가는 두뇌. 고민을 마친 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채용하기 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오. 진짜 채용 면접인가? 뭔가 50년 전 생각나서 엄청나게 설레는데~”
50년 전이라……. 소싯적 추억이 정말 한세월이군.
“알았어. 대답 회피 많이 했으니까, 이번만큼은 꼭 말해 줄게. 뭐든 물어봐!”
“40년 전.”
선배의 표정이 미약하게나마 차가워졌다.
“6군단장 바스몬이 쳐들어왔을 때, 왜 나 몰라라 했던 거지? 칠성 중 셋이 죽은 대참사였어. 합당한 사유 없이 중대사를 면피한 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야.”
“…….”
“지금 와서 과거 일을 끄집어내려는 건 아니야. 그저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나는 우리 천 클래스 담당 교수님은 책임감이 투철했으면 하거든.”
선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책상에서 내려왔다.
“두리가 오지 말라고 막았거든.”
그녀의 입술이 엷은 미소를 되찾았다.
“40년 전의 난 ‘가호의 각성’ 상태 전까지 갔었어. 그대로였으면 나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렸을지 몰라.”
목소리는 메여 있었다.
“너도 들었겠지만, 수십 년 전에 내가 두리랑 다툰 것도 두리가 폭주한 나를 억제해 준 거야.”
민트색 눈동자.
“그거 때문에… 나… 두리한테 상처를 입히고 말았어. 그래서… 그래서… 너무 늦었지만 꼭 속죄하고 싶어. 어떻게든.”
선배의 눈시울이 반짝였다. 나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끝내 결심했다.
“알았어.”
여전히 선배를 불신한다. 이것도 갑자기 뭔 소리인가 싶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짜내듯 성토하는 저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천 클래스 담당 교수에 선배를 채용할게-”
그 순간.
콰앙!
우렁찬 굉음. 서고의 문이 아가리 벌어지듯 활짝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