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3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28화(298/300)
228화 이슈 (1)
지축이 한순간 뒤틀렸다. 겨울잠을 준비하던 새 떼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 혼란에 빠진 산짐승들이 공포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터전에서 내쫓겼다. 산봉우리에 걸린 보름달은 잘게 제 몸을 떨고 있었다.
격동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메아인이 뚜벅뚜벅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단아한 단화가 지면을 밟는 박자에 따라 땅과 하늘, 천지가 흔들린다.
쿠웅- 쿠웅- 쿠르릉-
그에 절궁은 자약함을 가장하며 스승 만력을 쳐다보았다. 그가 놀람을 내비친 건 찰나의 움찔. 그뿐이었다. 과거 이 힘을 몇 번인가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무렵엔 멀찍이서 본 게 전부였는데…….
‘마경을 헤매느라 몸이 쇠했을 터인데, 여전한 기백이로구나.’
전율이 일 정도였다. 과연, 이 장면이 각성의 영역인가.
덕분에 그는 확신이 섰다. 수십 년 전, 과거에 스치듯 봤을 적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절궁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만력이 냉담한 목소리로 씹어 뱉었다.
“오해할까 봐 말해 두는데, 이거 각성의 힘 깨운 거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저력의 깊이는 각성 덕에 깊어졌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절궁은 주변을 휘둘러봤다. 자색 베일이 일대를 반구형으로 둘러싸는 광경. 아공간 장막이 전개되고 있었다.
“죽이시겠다는 엄포와는 다르게 여전히 상냥하시군요. 제자를 위해 아공간 장막을 다 전해주시다니요.”
만력은 픽 코웃음 쳤다. 그녀의 발걸음은 느릿하면서 유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제자 절궁을 향했다.
“아쉽게도 아카데미 내에서 살인은 불가하거든. 그리고 애들 다 잘 시간인데 소란 때문에 깨우면 미안하잖아?”
“미안… 이라…….”
씰룩거리던 그의 입꼬리가 이내 늘어졌다. 한순간 슬픈 낯이 된 절궁이 손을 옆으로 뻗었다.
“40년 전, 스승님께서 참전하지 않아 목숨을 잃은 제 아내한테는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그의 약지에 낀 반지에서 기다란 형상이 불쑥 돋아나왔다. 치장 하나 없이 삼나무 고유 질감만 머금은 활. S+급 무장, 아메노 하바야.
“당신의 이 힘만 있었더라면 제 아내는 죽지 않았을 것이며, 설사 죽었더라도 가호의 각성을 깨우쳐 잊히지 않았을 겁니다.”
절궁이 시위에 끼릭 화살을 메겼다.
“…코지마, 너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하다 하다 이젠 철심의 죽음을 나한테서 이유를 따지고.”
“무슨 말로 매도하셔도 좋습니다, 스승님. 다만 전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각성의 비결만은 알아야겠습니다.”
스무 발짝 정도의 가까운 거리. 뾰족한 화살촉이 만력을 겨냥한다.
“제 딸만큼은 결단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게 놔둘 수 없으니까요.”
만력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네 딸의 의사나 수명은 안중에도 없이, 네 이기심 때문에 말이냐.”
“언젠간 제 딸도 이해해 줄 겁니다. 저 사키 코지마의 딸이니 당연합니다.”
만력은 결국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푸핫!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몹시 불쾌합니다.”
냉정한 눈으로 돌아온 만력이 말했다.
“나랑 같은 동아리 부원이니까.”
콰아아아앙!
폭발적인 도약에 이어 격타음이 연달아 메아리쳤다.
그 소란은 근방을 덮은 아공간 장막 안에서만 맴돌았다.
* * *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등받이가 뒤로 훌쩍 젖혀졌다.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로 찌뿌둥한 목만 좌우로 까닥였다.
“어우, 이러다 허리 디스크 터지겠네.”
좀 과장해서 이 사흘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그러니까 세 시간만 잤던 것 같다.
그것마저 침대에서 취한 안락한 수면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의자에 잠깐 누운 형태의 가사 수면이었다.
진짜 뒈지기 일보 직전까지 일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오늘부로 조금은 일에서 해방된다.
내가 서고의 천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일 천 클래스 개장일.”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했던 일인만큼 속도가 생명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안이 결정된 다음 일주일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나와 부원들이 잠을 불살라 기간 내에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 상주 중인 몇몇 협회 직원도 돕긴 했지만, 실무 대부분은 부원들이 처리했다.
돌이켜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생도들이 다녀야 할 클래스를, 생도 스스로가 일궈 낸다니. 상황이 좀 우습지 싶었다. 이런 것들은 보통 어른의 일이지 십 대가 할만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부원들이 도맡아 할 의무는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부원들은 소명 의식을 갖고서 자발적으로 협조했다.
그들의 적극성은 선배가 다녀갔던 그날 밤이 시작이었다.
나는 그간 애매하게 넘겼던 클래스 창설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얼버무리기 일쑤인 나였지만 그 자리를 빌려 쌓였던 말 보따리를 풀었다.
물론, 모든 걸 구구절절 이야기하진 못했다. 내가 빙의자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였다.
그래서 적당히 간추려서 문맥에 맞게 약식으로 말해주었다.
요는 이러했다. 나는 레온을 필두로 천 클래스를 꾸렸다. 그리고 클래스원 전원 고심 끝에 내가 엄선한 정예라는 것. 이 모든 건 레온이 용사로서의 각성을 돕는다는 취지임을.
나는 없는 말재주로 열심히 강론했다.
부원들이 굳이 클래스까지 신설할 필요가 있냐 물었다. 나는 그만큼 마족의 동향이 의심스럽다고 답했다.
또한, 내 주변인인 이상 마족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 이들도 정세가 불안불안하다는 걸 명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내 말을 들은 직후, 부원들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도 얼핏 눈치채고 있었기에 마냥 새삼스러운 통보는 아니었으리라.
불과 일 년 새 군단장이 두 놈이나 출몰하지 않았나. 마족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차고 넘치는 신호였다. 거기에 더해 칠성 영웅인 내가 못 박듯 말했으니.
부원들의 눈가에 그늘이 드리운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위험에 노출됐다는데. 덤덤하게 듣고만 있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러나 불안도 잠시였다. 부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곧바로 솔선해서 나를 도왔다. 넋 놓고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되겠냐며, 기탄없이 함께 밤을 지새웠다. 그 당시에 난 가슴께가 숫제 울컥거리는 걸 느꼈다.
현생의 난 천애 고아다. 부모님이 계셨는데 사라지셨다. 원래면 지독한 고독 속에 살아갔을 터인데, 그 결여를 부원들이 채워 준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난 사시미 쥔 깡패 새끼나 다름없었을 거다.
“괜히 낯 간지럽네.”
한 번 실없이 웃고서 나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그러곤 스마트폰으로 일간지를 읽어내렸다. 칠성 직을 수여 받고서 생긴 습관이었다.
‘액정 너머라도 정 재계인들의 얼굴을 익혀놔야 나중에 봐서 안 뻘쭘하지.’
보는 족족 모르쇠로 나가면 내 평판은 바닥이 될 터. 나는 상관없었지만, 나를 추천한 검제님 체면을 생각해야 한다.
“아침부터… 참…….”
전생엔 사장님 따라 새벽 수산 시장을 산책했던 나인데. 지금은 댓바람부터 생선 비린내 대신 잉크 냄새를 맡고 있다.
『랜슬롯 에이전시 기존 대표가 부정·비리로 사임. 따라서 새로운 대표로 “올 뮤트, 칸 엘리자베스”가 서임.』
『철왕 가(家)의 마오 쌍둥이 “전에 저질러왔던 패악질에 가슴 깊이 후회한다. 반성의 의미로 소림사에 귀의키로 결정.”』
서면을 장식한 일면식 있는 이름들.
“올 뮤트가 랜슬롯 에이전시의 대표가 된 건 그렇다 쳐도, 그 패악의 쌍둥이가 소림사에 간다고?”
상상이 잘 안된다. 구라인가 싶어 유심히 녀석들의 사진도 보았다. 머리를 빡빡 밀고 포권을 취한 모습. 눈빛이 근엄 진지했다. 이마에 찍힌 8개의 점도 인상적이었다.
“진짜 갱생한 건가? 이 쓰레기들이?”
뭐, 그렇다고 녀석들이 저질렀던 짓들이 없던 게 되진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사회에서 격리되는 게 낫다.
쭉쭉 스크롤을 내렸다. 대서특필은 얼추 훑었고, 자잘한 기사가 등장할 타이밍.
그때 망막에 글귀가 어렸다. 모퉁이에 자그맣게 적혀 있어 자칫 놓칠 뻔했다.
『절궁, 사키 코지마 방한 도중 건강 악화로 인해 ‘호아킨 아카데미 부속 병원’으로 송치. 대변인 측에선 단순한 독감이라 밝혔지만.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왜 코딱지만 하게 적혀 있냐.”
고작 독감이라도 칠성의 건강 이슈는 분명 국제적인 중대사다. 나이 앞엔 장사 없다고. 칠성의 평균 연령은 칠십에 가깝다. 경미한 부상이나 잔병이 큰 병으로 되돌아올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칠성의 건강이 곧 인류의 안위였다. 칠성 영웅이 아프다고 하면 온 세계가 발칵 뒤집힌다. 언론 국민 할 것 없이 길길 날뛰는 게 예사였다.
근데 이 기사는 눈을 좁혀야 겨우 보였다. 이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절궁 측에서 의도적으로 사실을 감추려는 거다.
“이 기사는 미처 주워 담지 못하고 흘린 파편쯤 되는 거고.”
그리고 상식적으로 독감으로 병원 송치라니 이게 말이나 되나. 신생아도 아니고 환갑이 넘은 아저씨가 말이다.
내 가설을 증명하듯 기사가 그새 내려갔다. 눈 깜빡한 찰나에.
“이러면 단순 독감도 아니란 소리인데.”
나는 뚫어지라 액정을 바라보다 곧 폰을 덮었다. 그리고 눈두덩이를 살살 마사지했다.
“내가 입원할 판인데, 남 걱정은.”
더구나 절궁은 말 많은 양반이다. 서로 으르렁대기 바쁜 검제와 창성이 잠깐이나마 합심하게 만들 정도. 하물며 자신의 딸까지 치를 떠는 혐성이었다.
내 감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겉으론 사근사근해도 중간중간 비틀린 심성이 드러났었다. 말투에서 마치 사람을 물건 대하듯 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정말 위독했으면 호아킨 아카데미 부속 병원이 아니라 모국으로 돌아갔겠지.’
상념은 끝내고서 슬슬 씻으려 몸을 일으킨 순간. 부웅- 덮었던 스마트폰이 진동을 내뱉었다. 나는 지그시 그 뒷면을 바라보다가 액정을 귀에 붙였다.
“예, 학원장님.”
[어어, 검마야. 바로 받았네.]살짝 횡설수설한 목소리. 학원장님이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와닿았다. 난처함.
“무슨 일 있으세요?”
[그… 그게…….]메디아는 어조를 다듬고서 이어 말했다.
[우리 언니, 메아인 포이즌 언니가 너한테 말했니?]“천 클래스 담당 교수님 맡아주기로 한 건 사흘 전에 직접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천 클래스 담당 교수로 이름 올렸고요. 알 사람들은 다 알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오늘 오후에 날 겁니다. 만력님의 등장 소식도 같이요.”
[아, 그것도 있었지……. 근데 내가 지금 말한 건 그게 아니야…….]한동안 침묵하던 메디아는 더 진한 한숨을 흘렸다.
[그게… 언니한테… 메아인 포이즌한테 수배령이 떨어질 것 같아…….]“예?”
이게 뭔 소리지? 수배령? 현상금? 왜?
[놀라지 말고 잘 들어…….]메디아가 앓듯이 쓰리게 웃었다.
손에서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바닥과 맞닿은 액정이 쿠키처럼 바스러졌다.